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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전술 이야기①]피라미드 시스템과 WM시스템
2016년 06월 12일 (일)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호셉 과르디올라 감독의 지도를 받은 리오넬 메시는 역대 최고의 선수였다. 그러나 헤라르도 마르티노 감독 하에서의 리오넬 메시는 마치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 같았다. 같은 선수가 같은 팀에서 같은 동료와 함께 뛰었음에도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전술’이라는 참고서가 필요하다. 〈시사오늘〉은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 유로 2016 등 남미와 유럽을 달구는 ‘축구 축제’ 개막에 맞춰 축구 전술을 다루는 시간을 준비했다. 오늘은 ‘지루하지만 알아두면 좋은’ 간략한 축구 역사 시간이다.

피라미드 시스템의 등장

축구의 유래에 관한 주장은 다양하다. 중국에서는 고대 한나라 병사들이 훈련을 목적으로 돼지나 소의 오줌보에 공기를 넣어 차던 활동을 축구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영국에서는 12세기에 자신들의 나라를 침략해 온 바이킹의 두개골을 공삼아 차고 논 것이 축구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설이 있다. 가죽 주머니나 동물의 오줌보에 털이나 공기를 집어넣어 차고 놀았던 기록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축구의 기원이 이것이다”라고 단언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축구의 기원설에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축구가 폭력적인 동기로 인해 발생한 스포츠였다는 사실이다. 훈련을 위한 것이든, 자신들의 나라를 침략한 적장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든, 고대 축구는 마초적 감성이 가득한 스포츠, 아니 활동이었다.

시작이 이러했으니, 발전 과정도 다를 리 없다. 영국에서는 축구가 ‘몹 풋볼(mob football)’이라는 집단 축구로 발전했는데, 이는 일종의 마을 대 마을의 전쟁과 같은 형태였다. 일단 경기가 열리면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의 젊은 남자들이 모두 동원되어 상대 마을의 교회로 공을 옮겨 놓는 경기를 펼쳤다. ‘남성의 스포츠’이니 만큼 주먹다짐이나 발길질이 난무했던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몹 풋볼을 하던 도중에 적잖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 엘리자베스 여왕 때는 축구를 법으로 금지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발전 과정은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술(Soule)이라는, 특별한 규칙 없이 두 마을 사람들이 공 하나를 두고 ‘싸우는’ 경기가 있었고,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벨기에 지방(당시에는 플랑드르)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경기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집단 축구는 일종의 카니발로서 사회적 불만의 배출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공을 차고 사람을 때리는 행위를 통해 고단한 일상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치, 사회, 경제적 불만을 표출했던 것이다.

이후 여러 발전 단계를 거친 축구는 ‘패싸움’이 아닌 ‘스포츠’로 발전했지만, 스포츠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태동과 함께 했던 폭력성이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었다. 축구와 폭력성의 관계, 이것이야 말로 초창기의 축구 전술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이러한 배경을 깔고 근대 전술 이야기를 해 보자. 축구의 목적은 승리다. 승리하려면 골을 넣어야 한다. 당연히 태동 단계에서는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 즉 공격에 최대한 많은 선수를 배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1872년 11월 30일에 스코틀랜드에서 열렸던 역사상 최초의 A매치가 2-2-6 시스템(스코틀랜드) vs 1-2-7 시스템(잉글랜드)의 대결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아이러니하게도 양 팀 통틀어 공격수만 13명이 포진했던 이 경기는 득점 없이 0-0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태동단계였다고 해도 골을 넣는 것만큼이나 골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골을 넣어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골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1-2-7 시스템이나 2-2-6 시스템처럼 상식 이하의 시스템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축구가 ‘남성성, 폭력성’으로 대변되는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1800년대의 축구에서는 패스와 페이크 동작(수비수를 제치기 위해 속이는 동작)을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축구는 오로지 드리블과 슈팅, 몸싸움의 게임이었고, ‘진리’를 거스르는 팀에게는 가차 없는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축구는 드리블과 슈팅, 몸싸움의 게임이었다.

2-2-6 시스템과 1-2-7 시스템이 맞붙었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기가 0-0으로 끝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패스가 없다면, 설사 10명이 공격에 배치된다 해도 결론적으로는 공격수 한 명과 수비수 한 명의 일대일 싸움이다. 1~2명의 수비수로로도 6~7명의 공격수를 막을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를 시작으로 패스 게임의 유용성이 증명되고, 패스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패스 게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패스 게임의 도입이 수비 방법의 변화를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드리블 위주의 경기에서는 3~4명의 수비수만으로도 상대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6~7명의 공격수가 좌우로 펼쳐져 패스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수비수의 수적 열세가 실점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시스템은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등장했다. 패스 게임이 유행하면서 많은 팀들은 수비자 수를 늘릴 필요성을 절감했고, 공격자 수를 줄이는 대신 수비자 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전술을 수정해 나갔다. 2명의 수비수와 3명의 미드필더가 협력해 공격자 수와 수비자 수의 균형을 맞추는 2-3-5 포메이션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것이다.

2-3-5 시스템의 핵심은 센터 하프라는 새로운 포지션이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하프백 두 명이 측면으로 이동해 윙 포워드를 수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즉, 센터 하프가 인사이드 포워드 한 명을 막고 좌우 하프백이 상대 윙 포워드를, 풀백이 인사이드 포워드와 센터 포워드를 막는 5:5 구도가 형성됐다. 기존의 1-2-7 시스템이나 2-2-6 시스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안정된 공수 밸런스였다.

2-3-5 시스템은 축구 역사상 최초로 공수 밸런스에 관심을 기울인 포메이션이었다. 또한 양차 세계대전으로 전술의 교류와 발전이 더뎠던 탓에,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 이르기까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계 축구의 주류로 자리하며 세계 축구의 흐름을 이끈 포메이션이기도 했다.

WM 시스템의 등장

축구 전술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한정된 인원이 105m × 68m의 넓은 공간을 커버해야 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내적 한계가 원인일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한 외적 환경의 변화가 원인일 때도 있다. 2-3-5 시스템의 퇴보는 외적 환경의 변화가 원인으로 작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1925년 이전의 오프사이드(offside)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볼을 받을 공격자와 상대 골라인 사이에 상대 선수 세 명 이상이 존재해야 온사이드(onside)로 인정된다.’ 쉽게 말해 당시에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는다 하더라도 골키퍼 외에 한 명의 최종 수비수가 더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오프사이드 규정의 폐해는 명백했다. 오프사이드 트랩, 즉 오프사이드 규정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팀들이 늘어나면서 경기당 득점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골이 줄어들면 경기는 지루해진다. 날이 갈수록 지루해지는, 그러면서 관중 수가 급감하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국제 축구 평의회(International Football Association Board)는 ‘볼을 받을 공격자와 상대 골라인 사이에 상대 선수 세 명 이상이 존재해야 온사이드로 인정된다’는 규정을 ‘볼을 받을 공격자와 상대 골라인 사이에 상대 선수 두 명 이상이 존재해야 온사이드로 인정된다’로 변경한다. 이는 현재와 동일한 오프사이드 규정이다.

오프사이드 규정 완화의 효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공격수들을 뒷걸음질 치게 만들던 오프사이드 트랩이 사라지자 공간이 늘어났고, 수비수들의 부담이 늘어났다. 당연히 득점수는 증가했다. IFAB의 결단은 완벽한 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프사이드 규정 완화는 조금은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수비수들이 커버해야 할 공간이 늘어나다 보니, 늘어난 공간에 맞춰 수비수 수를 늘리는 대응책을 내놓은 감독이 나온 것이다. 그가 바로 허버트 채프먼이다.

허버트 채프먼은 2-3-5 시스템에서 미드필더를 한 명 내리는 3-2-5 시스템을 고안했다. 오프사이드 트랩으로 제어하기가 불가능해진 상대 공격수를 전문적으로 견제하는 센터백 포지션이 등장한 것이다. 또한 미드필더 한 명이 내려오면서 엷어진 중원은 전방에서 두 명의 공격수를 끌어내려 보강했다. 이로써 허버트 채프먼은 수비를 안정화함과 동시에 중원의 창조성 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WM 시스템을 완성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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