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무리울에서] ‘생계’와 ‘생존’의 우열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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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무리울에서] ‘생계’와 ‘생존’의 우열법칙
  • 권혁식 논설위원
  • 승인 2016.09.20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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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권혁식 논설위원)

국민의 ‘생계’와 ‘생존’은 정치 지도자들이 책임져야 하는 핵심 목표들이다. 그래서 함께 거론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가끔 정치권에선 ‘생계’와 ‘생존’이 충돌하거나 우열을 다투는 경우가 있다. 생계는 ‘먹고 사는 문제’이고, 생존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굳이 국민 앞에서 선후를 따진다면 생존이 먼저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생존의 문제가 대두되면 생계의 문제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게 정치권의 ‘우열(優劣)법칙’이다.

생계와 생존이 우열을 다툰 위천국가산업단지 조성 갈등

지난 1990년대 중반에 대구시 달성군에 위천국가산업단지 조성 문제를 놓고 대구경북(TK)지역과 부산경남(PK)지역이 극심하게 대립한 적이 있었다. 위천산업단지 예정부지 위치가 낙동강에 인접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대구시는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첨단산업을 유치할 수 있는 국가산업단지 조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대구 경제와 공생하는 경북지역도 대구시 편을 들었다. 

그에 맞서 낙동강 하류에 취수장을 두고 있는 PK 지역에선 식수원 오염 가능성을 제기하며 강력 반대했다. 앞서 1991년 구미시에서 발생한 낙동강 페놀 유출사고로 식수공포를 경험했던 PK 주민들로선 “(산단을 조성하면) 폐수 통제가 체계적으로 이뤄져 오히려 수질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TK측 주장을 선선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양측 논란이 국회에서 ‘낙동강관리특별법’ 제정 문제로 비화되자 TK 정치권과 PK 정치권이 세과시 모임을 갖는 등 정면으로 맞섰다. 이때 PK 정치권에서 나온 말이 “위천산업단지 조성이 TK 주민들에게 생계의 문제라면, PK 주민들에는 생존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겠지만, 결국 위천국가산업단지 조성 계획은 좌초됐다.

대선의 ‘시대정신’과 잠룡들의 어젠다 선점 노력

5년마다 돌아오는 대선에서 ‘시대정신’이 승패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어느 후보가 시대정신과 가장 부합하는지, 어느 후보가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비전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를 유권자들은 지지후보 선택의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이와 맞아떨어지는 후보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된다.

김대중 후보의 ‘정권교체론’, 노무현 후보의 ‘지역균형발전론’, 이명박 후보의 ‘경제살리기’,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등 핵심 슬로건들이 시대정신과 맞물리면서 대선 승리에 효자노릇을 했다.

내년 12월 19대 대선을 겨냥해 최근 여야의 대권 잠룡들이 어젠다 선점에 힘쓰고 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의 ‘미래 먹거리’와 ‘4차 산업혁명’,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격차해소’와 ‘국민통합’,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공존과 상생’, 남경필 경기지사의 ‘首都 이전’과 ‘모병제’ 등이 그 예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의 ‘중부담 중복지’,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의 ‘지역주의 타파’ 등도 그들의 고유 브랜드라고 볼 수 있다. 당 차원에선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전 비대위 대표가 ‘경제민주화’의 기치를 다시 올렸다. 이중 어느 것이든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지면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승기를 잡을 것이다.

제5차 핵실험을 계기로 생존과 관련된 시대정신 잉태 조짐

그런데 역대 대선의 슬로건과 현재 어젠다를 통틀어 봐도 대부분 ‘생계 문제’에 한정되며 ‘생존 문제’로 연결되는 것은 전무하다. 당시 ‘시대정신’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달 초에 감행된 북한의 제5차 핵실험은 생존과 관련된 시대정신을 잉태시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지난 1993년 NPT(핵비확산조약) 탈퇴에서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23년이 지났다. 그간 남쪽에서는 1997년 제15대 대선 때부터 2012년 18대 때까지 4차례 대선이 치러졌지만 한번도 북핵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 적이 없었다. 여러 변수 중 하나였을 뿐이다. 초기에는 북의 핵실험이 ‘대미(對美) 협상용’으로 평가절하된 데 주원인이 있다. 지난 2012년 대선 3년 전인 2009년5월 제2차 핵실험도 국민들의 ‘안보 불감증’을 일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달 6일 5차 핵실험 이후 북한의 핵개발이 국민정서에 던지는 충격파는 예전과 많이 다르다. 그간 유엔 제재를 통해서든, 강대국의 압박에 의해서든 북한의 핵개발 의지가 중도에 꺾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국민 불감증을 키웠다. 하지만 “핵탄두의 표준화·규격화에 성공했다”는 북한의 발표는 미국뿐 아니라 남쪽 국민들에게도 북핵이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가도록 하는 촉진제가 됐다. 북한이 핵무기를 앞세우고 “파멸과 항복 중 택일하라”면서 남쪽을 겁박하는 단계까지 문제를 끌고갈 것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허황된 비관론으로 평가절하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북핵 문제가 대선전의 최대 어젠다로 부상 가능성

이런 맥락에서 북핵 문제가 앞으로 1년 안에 해결의 단초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내년 대선전에선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최대 어젠다로 부상할 것이란 관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격차해소’에서부터 ‘경제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작금에 제기되는 각종 어젠다는 ‘북핵의 블랙홀’로 모두 빨려들 것이다. ‘생존의 문제’가 머리를 쳐들면 ‘생계의 문제’는 꼬리를 감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시대정신도 ‘북핵 해결을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 근처 어딘가에 닻을 내릴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북핵을 자체 군사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킬체인, KMD(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에 이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까지 동원해 방어망 구축에 나서고 있으나 왠지 구멍이 숭숭 느껴진다. 특히 북한의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장면은 그간의 노력을 뒤로 되돌려놓는 듯하다.

자체 군사력으로 북핵 대처에 한계가 있다면 주변 강대국의 힘을 빌려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선 외교력이 관건이다. ‘미군 전술핵’ 도입을 위해서라면 미국 대통령을 만나 설득해야 하고, 사드 배치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대북제재에 중국의 협조를 끌어내야 한다면 시진핑을 만나 우리의 입장을 이해시켜야 한다. 이와 관련,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19일 “중국이 3일만 식량 원유 생필품 등 지원을 중단하면 북한은 견딜 수 없다”면서 “문제는 중국이다. 한미가 중국과의 외교적 노력으로 북핵도, 사드도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기문 총장이 가장 유리한 출발선상

그렇다면 내년 대선전에서 일단 유리한 출발선상에 있을 잠룡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외교에 관한 한, 실전 경험이 풍부한 현장 전문가다. 다양한 국제현안 해결을 위해 각국 정상들과 접촉해서 협의하고 소통하는 것이 그의 주업무 중 하나다. 북핵 해결을 위해 누구를 만나 어떤 협조를 이끌어내야 하는지 국가적 과제를 놓고 반 총장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야당에선 벌써부터 견제구를 던지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 재직 10년 동안 풀지 못한 북핵 문제를 과연 대통령이 돼서 풀 수 있겠는가’라는 냉소적인 물음이 그것이다. 반 총장의 답변에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며, 그 해법의 신빙성과 실천 가능성 등을 가늠해서 국민들은 지지 여부를 판단할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북핵의 블랙홀'이 주위 별빛을 계속 삼키는 '얄궂은 현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前 영남일보 서울 정치부 기자

現 시사오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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