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31일 대선불출마를 선언했다. 춘추전국시대로 불릴 정도로 대선후보가 난립하는 시점에서 한 박자 쉬어가는 길을 택한 셈이다. 일각에선 ‘잠룡’ 대열에서 탈퇴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차분히 살펴보면 실보다 득이 많아 보이는 숨고르기다.
원 지사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바른정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도정)업무와 대선출마의 병행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다”며 “저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에서 원 지사는 당의 요청을 받고 도지사 선거에 나섰다. 소장파 동지인 남경필 경기지사와 함께 ‘중진차출론’바람에 떠밀리듯 출마를 결정했다. 중앙정계의 핵심에서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로 불리던 그로서는 고향에서 행정경험을 쌓는 것도 괜찮은 선택으로 보였다. 도지사로서의 시작도 나쁘지 않았다. 연정(聯政)과 협치를 내걸고 상대 후보였던 신구범 전 제주지사를 인수위원장에 앉히는 파격을 선보였다.
그러나 처음 겪는 변방의 해풍은 혹독했다. 때마침 제주는 중국인 관광객 폭증 문제 등 새롭게 등장한 여러 사안들과 직면해 있었다. 그러한 제주도의 특수성 때문에, 이후 한동안 원 지사의 이름은 중앙정가에서 거론되지 못했다. 비슷한 연배의 남 지사와 안희정 충남지사 등이 조금씩 몸집을 불려나갈 때도 원 지사는 다양한 문제와 씨름 중이었다. 어느새 원 지사는 대권주자의 일각으로 거론되면서도, 지지율 여론조사에도 오르지 못할 만큼 '마이너 후보'가 됐다.
하지만 원 지사의 이번 결단은 오히려 두 가지 측면에서 괜찮은 판단으로 보인다. 제주도민들에게 면을 세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급히 열린 대선이 아닌, 안정적 일정의 차차기 대선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우선 제주도민들에 대한 신의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기자가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원 지사에 대한 우려는 ‘대권을 바라보는 사람인데, 지사직을 끝까지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임기 동안에도 원 지사가 서울에 모습만 보여도 일부 현지 언론들은 ‘제주를 두고 중앙을 기웃 거린다’는 질타를 쏟아내기도 했다. 원 지사는 임기를 마치기로 하며 이러한 논란을 불식시키고, 홀가분하게 다음 도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원 지사는 대망을 위한 정비 시간을 벌었다. 상상초월의 거대 게이트로 초유의 사태를 맞은 정치권에선, 결국 조기대선이 가시화됐다. 그렇지 않아도 야권에 유리하다는 이번 대선이다. 무리한 도전으로 피로감만 올리고 ‘대권 재수생’의 이미지만 만드는 것보단, 착실히 기반을 다지는 편이 정치인으로선 유리할 수 있다. 시간도 충분하다. 1964년생인 원 지사의 나이는 이제 50대 초반에 불과하다.
정계의 한 소식통은 얼마 전 기자와의 만남에서 정치인들 오판(誤判)의 최대 이유로 ‘초조함’을 꼽았다. 초조함이 성급함을, 성급함이 악수(惡手)를 부른다는 이야기다. 그런 측면에서 원 지사의 이번 결단은 이성적인 판단에 가까워 보인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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