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狂氣)의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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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狂氣)의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 김재한 대기자
  • 승인 2009.05.29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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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9일 발행 시사오늘 <노무현을 위한 변명>에서 ‘노무현을 대변할 사람은 없는가’ 라는 글을 올렸다.

『불법과 비리의 실체도 밝혀지기 전에 한 정치인이, 그것도 전직 대통령이 검찰의 실황중계와 언론과 여론의 도마 위에서 몰락했다. 노무현의 범법사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일이다. 그런데 재판도 하기 전에 검찰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믿고, 진실을 파헤쳐보기도 전에 단안을 내리고 한쪽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노무현의 입장을 대변하고 항변해줄 사람은 없다. 노무현을 위한 변명은 없는가? 왜 최소한의 방어권도 주지 않는가? 그것은 부정과 불법 등 비리를 방어하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흘러가는 일련의 사건들 중에 절차상 잘못되었거나, 잘못 흘러가는 것이 있다면 시시비비를 지적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과 이성보다, 감정과 정서가 우선시되고, 여론재판으로, 노무현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도덕적 명분’을 상실한 상태에서 법리논쟁과 자기방어는 아무런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이성이 지배하고, 법과 원칙이 살아숨쉬는 나라가 발전하는 것은 기본이다. 합리성이 나라를 지배할 때, 이성이 살아숨쉴 때 나라가 발전한다. 5년의 과거를 한 순간에 다 묻어버리겠다는 말인지 묻고싶다.

노무현을 대변할 사람은 없는가. 그는 한때, 5년간 이 나라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이다. 노빠는 어디에 갔는가? 왜 그들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좋아했으며, 어느 부분 때문에 그 사람에 매료되었으며, 노무현의 공(功)은 무엇이며, 노무현의 허물은, 잘못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 우리의 역사는 발전한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전직 대통령이 없다. 수인(囚人)만 있다. 역사적으로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이 영어(囹圄)의 몸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는데, 어떻게 존경의 문화가 만들어지겠는가. 국가의 어른이어야 할 전직 대통령이 개인적인 불법과 비리로 국민의 지탄을 받는데, 어떻게 평화로운 정권교체와 깨끗한 정치문화가 만들어지겠는 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우려했던 수인(囚人)은커녕 자살한 전직 대통령을 우리 역사에 남기는 한 순간을 지금 목도하고 있다. 참으로 참담한 심경이다. 먼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면서, 지금의 상황이 오게 된 데 대해 국민들에게 묻고 싶다.

나는 지금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문(弔問)에 이상(異常) 열기를 느낀다. 생전(生前)에 적대적이었던, 흔히들 차별화를 시도했던 자들이 「죽은 자(者)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그래서 혹자는「산 노무현」보다「죽은 노무현」이 더 무섭다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수사에 침묵하던 여·야 정치인이 안절부절한다. 여·야 의원들이 앞 다투어 분향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지 않으면 마치 야단이나 생기는 것처럼, 여·야 정치인이 앞 다투어 찾는다. 노무현과 차별화를 시도했던 정동영 의원이 상가(喪家)를 찾고, 퇴짜를 맞는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전 대표도 문상(問喪)은커녕 성난 노무현 지지자들의 제지에 막혀 발걸음을 돌린다. 동방예의지국의 도(道)는 사라지고, 문상(問喪)온 분을 매몰차게 쫒아낸다. 죽음 앞에 원수도 없다. 더욱이 여·야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들은 감정에 치우쳐 광분한다.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가 정한 기준에 두고 무조건 싫어한다. 이상하다. 아무리 눈을 감고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그들의 잘못인가? 이상하게 바라보는 내가 잘못인가 헷갈린다.

민주당은 기회를 틈타, 마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계세력인 양 떠든다. 그동안 노무현과 차별화 시도에 대한 자성(自省)도 없이. 지난 5년간의 활개를 치다 이명박 정부 들어 사라졌던 친노세력이 전부 나선다.

지난 총선 패배와 박연차 사건 검찰수사를 거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두던 민주당이 23일 서거소식을 듣자 마자 전국 시·도 당사에 분향소를 차려 이번 상(喪)은 민주당이 주도해 치를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의 모습에서 때로는 상주(常主)가 되고, 때로는 문상(問喪)을 가는 이중성이 나타난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봉하마을에서는 상주가 되고, 서울에서 문상을 가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정치적인 셈법이 뛰어난 우리 정치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아픔은 뒤로 하고, 정치적 호기와 실속을 차릴 수 있다면 염치도 없이 물불을 안 가린다. 이성도 없다. 실속만 챙기면 된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는데...

한나라당 또한 마찬가지이다. 노무현 자살의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입장에서 불통이 뛸까봐 전전긍긍한다. 이성을 잃은 듯 모든 것을 제쳐두고 노무현 지지세력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다.

법률 전문가인 안상수 원내 대표는 한나라당 최고의결기구인 최고위원 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위해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있는 형 건평씨의 구속집행 정기기간을 연장해 주자는 의견을 내는 가 하면, 이광재 민주당 의원,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 비서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구속 수감중인 자들에게 영결식 참석을 위한 구속집행 정지를 해주어 인도적인 예를 갖추도록 하자고 야단이다.
 
이들 또한 법원에 구속집행 정지를 신청한다. 명문규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법원이 초법적으로 이들의 의견을 들어준다.
이런 개판의 나라가 어디에 있는 가? 범법사실로 수감중인 자들이 직계가족도 아닌데도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구속집행 정지 신청을 받아준다. 힘없는, 빽 없는 우리 서민들은 일가 가족들이 죽음을 당해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구속집행 정지가 이렇게 쉽게 받아준다. 범법자는 똑같다. 우리 일반인인 소시민이 이와 같은 상사(喪事)를 당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법과 원칙 보다는 감정과 비이성적인 것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이래도 우리나라가 법치주의국가라고 떠든다. 사전의 의미가 궁금해 찾아본다. 대답이 없다. 여하튼 개판이다. 기본적인 법질서 까지 파괴하면서 까지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법의 온정주의에서 벗어나야 나라가 발전한다.

눈물이 많은 민족, 한(恨)이 많은 민족. 그래서 이성보다 감성이 더 지배하는 나라.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법과 원칙과 합리성 보다는 정치적 타결이라는 미명 아래 그럴듯하게 포장해 흐지부지되기 일쑤이며, 또한 한국인 특유의 정서에 기대어 집단사고가 팽배한 경우가 허다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 우리사회에 주는 충격이 무언가. 광분에 가까운 추모 열기, 비이성적인 법 집행, 「산 노무현」보다「죽은 노무현」이 더 무서워 고개 숙이는 여·야 정치인, 추모(追慕) 보다는 자기 보신(保身) 차원에서 분향소를 찾는다.

필자가 ‘노무현을 대변할 사람은 없는가’ 라는 글을 올렸을 때 대답 없던 이들이 지금 영정 앞에 상주 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때는 다 어디에 갔던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불러가 조사를 받고, 구구한 변명과 사과로 고개를 숙이던 그때 봉하마을에서 전국 각지의 분향소에서 상주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이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

노무현과 차별화만이 살 길이라고, 불똥이 자기에 뛸까봐 노심초사하던 이들이, 이제는 마치 언제 그랬던 가 하면서 언론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역겹기 짝이 없다. 그래도 욕하는 사람이 없다. 노무현의 비리를 발견해 마치 신기루를 찾은 듯 광분하듯 보도하던 언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언론의 상반된 태도, 180도 다른 모습에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냉철한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의 동기는 유서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신과 주변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적 압박과 이후 전개될 상황에 대한 모멸감과 중압감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천하에 혼자 뿐인 것을 느꼈을 그 적막감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필자가 노무현 지지세력, ‘노빠는 다 어디에 갔는가’ 라고 물었을 때와 다를 바 없다.

지금 이 순간은 우리 모두가 차분해질 때라고 말하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원치 않는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것은 그 자신으로 인해 이 사회가 혼란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그것을 빌미로 정치적 투쟁 등 사회 불안이 있어서는 안된다. 49제를 빌미로 거리 투쟁을 하는 불순세력이 나오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다. 차분해지자. 그것을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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