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9 일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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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 散策] 박경옥 “6월 항쟁의 동력은 시민의 성원”
박경옥 민주동지회 운영이사
˝불의의 시대, 민주화가 유일한 희망˝
˝군사정권에 대한 공포보다 분노가 커˝
˝수많은 시민들의 성원에 힘을 냈다˝
˝광화문 촛불시위, 6월항쟁 생각나˝
2017년 06월 09일 (금) 글=박경옥 정리=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박경옥 정리=김병묵 기자)

“그대들이여 그 날의 6월을 아는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6월의 혼불 행진을. 생목숨이 꽃잎처럼 떨어질 때 우리는 분연히 일어섰노라.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는 민권 대행진은 배반의 역사를 가로막았노라.”

지난 1997년에 썼던 6·10 항쟁 10주년 기념대회 축시(祝詩)의 일부다. 1987년, 그 치열하고 벅찼던 시대를 어찌 말이나 글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싶다. 하지만 이후에도 세월은 쉬지 않고 흘렀고, 당대를 함께 지나온 많은 동지들과 숱한 이름 모를 열사(烈士)들이 떠났다. 그래서 누군가는 증언을 남겨야 한다. 자신의 안일과 생업을 등지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과 모든 민주시민들은 왜 생사의 기로에서 싸웠는가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맞서야 할 대상이었던,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군부독재정권의 만행을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승리했는가도 적어야 한다.

뜨거웠던 6월로부터 꼭 30년이 된 2017년 6월의 첫 날, 나는 기자를 만나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밝혔다.

   
▲ 1987년, 그 치열하고 벅찼던 시대를 어찌 말이나 글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싶다. 자신의 안일과 생업을 등지고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과 모든 민주시민들은 왜 생사의 기로에서 싸웠는가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맞서야 할 대상이었던, 총칼로 정권을 탈취한 군부독재정권의 만행을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승리했는가도 적어야 한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84년 : 어두운 시절, 민주화 운동의 시작

1984년, 다니던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했다. 정의라는 게 없는 사회였다. 부당한 고발과 항의에도, 노동부와 기업이 뒷돈을 몇 차례 주고받는 것으로 묵살되는 것이 다반사인 세상이었다. 나는 군부독재정권과 그에 붙어있는 이들만 호의호식 하는 이상한 세상을 참지 못했다. 원래도 내 성정이 정의롭지 못한 것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민주산악회(민산)의 사람들, 평생 동지들을 만나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오직 민주화만 생각하는 내일이 없는 삶이 시작됐다.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고 2년이 지난 1986년,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부천경찰서의 성고문 사건이 폭로됐고, 유성환 의원은 통일국시 사건으로 구속됐다. 전경들이 쏘아댄 최루탄은 온통 거리를 꽉 채웠다. 마치 나치 독일의 ‘독가스 실’이 연상될 정도의 최루 연기로 인해 한 치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 해는 새벽이 오기 전 가장 어두운 밤과도 같았다.

1987년 1월 19일 : '탁' 치니 '억' 죽다

이듬해인 1987년 벽두에 일어난 비극은 결국 민주화 운동 세력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전 국민의 강력한 공분(公憤)을 일으켰다.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그것이다.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다니던 박 군이 대학 선배의 행방을 대라는 취조를 받던 중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한다. 당국의 해명은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틀 후인 16일에 결국 박 군의 사인(死因)고 함께 진실이 밝혀졌다. 우리 민추협에서는 사무실에 분향소를 차리고 추모 농성을 시작했다. 비감하고 애통한 분위기 속에서, 민추협 공동의장인 YS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하루씩 분향소를 지켰다. 문부식 의원은 붉은 글씨로 ‘민주 사망’이라고 쓴 삼베 건을 써서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당시 민추협 당사가 있던 건물 입구를 전경들로 하여금 삼엄하게 지키도록 했다. 시민들의 분향소 출입을 방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몇몇 시민들은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들어와 조문을 하는가 하면, 과일과 음료수 등을 전달하거나 놓고 가기도 했다.

   
우리 민추협 여성들은 까만 근조 리본을 미사에 온 시민들에게 달아주었는데, 2천 개 정도 준비한 것이 동이 난 것을 감안하면 더 많은 인파가 몰렸을 가능성도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 자리에서 “현 정권은 아우 아벨을 죽이고도 하느님 앞에서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는 카인과 같다”고 날선 비판을 가한 것이 생각난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87년 1월 26일 : 전두환 정권은 카인과 같다

약 열흘 뒤 26일은 오후 4시 기독교 회관에서 ‘고문근절 대책위원회’ 모임이, 오후 6시 30분엔 명동성당에서 ‘故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추방 미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무장한 전경들이 아예 종로 일대를 완전 봉쇄했다. 몸싸움을 하며 내는 고성과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기독교 회관 주변 곳곳에서 들렸다.

아수라장을 간신히 빠져나가서 도달한 명동성당엔 2천 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당시 나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오사순 전 민산 여성위원장을 비롯한 우리 민추협 여성들은 까만 근조 리본을 미사에 온 시민들에게 달아주었는데, 2천 개 정도 준비한 것이 동이 난 것을 감안하면 더 많은 인파가 몰렸을 가능성도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 자리에서 “현 정권은 아우 아벨을 죽이고도 하느님 앞에서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는 카인과 같다”고 날선 비판을 가한 것이 생각난다.

1987년 1월 27일 : 이 순간에도 누군가 고문으로 죽어간다

광화문에 있는 변호사 회관에서 1월 27일 변호사협회가 주최한 ‘고문대책 공청회’가 열렸다. 건물 초입부터 사복경찰들이 지키고 서서 출입을 막고 있었다. 민추협 회원들, 구속자 가족들이 정문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뒤에 비상문이 있다고 해서 그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 전 구속돼서 고문을 겪은 뒤 출소한 남녀 대학생이 증언을 위해 나와 있었다. 그 중 여학생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고문 타도를 외치며 폭로하는 이 순간에도, 소리가 밖으로 새 나오지 않는 두꺼운 벽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고 호소했다.

1987년 2월 7일 : 거리에서 울리는 조종(弔鐘)

박 군의 국민추도회 날 행사가 2월 7일 열렸다. 오후 2시를 기해 서울·부산·대구·광주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행됐다. 모든 차량은 경적을 울리고, 종교 시설들은 타종(打鐘)을 하기로 했다. 서울 전역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오후 1시부터 군중들이 서서히 시청 앞을 비롯한 종로 일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동성당은 새벽부터 아예 출입을 차단했다. 2시가 되기 얼마 전, 시민들이 ‘고문추방’을 외치자마자 일명 ‘지랄탄’이라 불리는 연발최루탄이 마구 발사됐다. 최루탄 탄피가 머리위로 날아와 떨어졌다. 정각 2시가 되자 모든 교회와 성당, 사찰에서 조종(弔鐘)이 울렸다.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도로위에서 울려 퍼졌고, 길을 지나던 이들은 묵념을 했다.

그러나 소위 ‘백골단’으로 불리는 하얀 헬멧을 쓴 전경들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끌고 나갔다. 박 군의 초상화와 흰 국화 한 송이를 각각 양손에 들고 있던 내게도 백골단이 다가와 주변을 에워쌌다. 나를 끌고 가려고 하자 민추협 남자 간부들과 시민들이 전경들에게 달려들어 밀어냈다. 공포보다도, 후안무치한 정권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1987년 3월 3일 : 우리나라 국기를 왜 빼앗느냐

3월 3일 박 군의 49제 추모행사로 ‘고문추방, 민주화 평화 대행진’이 열렸다. 신민당과 민추협을 중심으로, 재야단체가 주최하는 침묵의 행진 행사다. 어김없이 전두환 정권은 수 만 명의 전경과 최루탄으로 이를 막으려 했다. 종로 탑골공원 정문 앞에서 나와 노옥자 민추협 여성특위장이 전경에게 포위됐다. 내 손에 들린 태극기를 빼앗으려는 전경에게 “우리나라 국기를 국민이 들고 있는데 왜 빼앗느냐”며 저항했다. 숫제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전경들도 어쩔 줄 몰라 했고, 지나던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다.

1987년 4월 6일 : 정 검사,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민주화 운동 투사이자 상도동계의 핵심인 유성환 의원의 결심 공판이 4월 6일 열렸다. 유 의원은 지난 해 ‘통일국시 사건’으로 인해 재판 중이었다. 유 의원의 지역구에서도 사람들이 올라와서 거의 천 여 명에 달하는 방청인들이 있었다. 방청석에서 보던 나는 검찰의 억지가 계속되자 결국 참지 못했다.

당시 부장검사였던 정민수 검사를 향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 검사! 당신들 지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어떻게 유 의원이 공산당이냐. 전두환 정권의 호구 노릇을 하지 마라. 나중에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정 검사는 나를 째려보는데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판관이었던 박영무 부장판사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저 여자가, 저 여자가…”라며 말을 잇지 못하다 휴정을 선언했다.

재판관이 나가자마자 김덕룡(DR)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유성희 여성국 부장을 시켜 내게 피신을 권유했다. 법정소란으로 구속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나는 각오하고 왔다고 버텼더니, 유 부장이 “앞으로 싸울 날이 많다. 구속되면 못 싸운다”라고 설득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당에선 청년당원 두 사람을 보내서 나를 버스 타는 곳 까지 호위토록 했다. 한동안 민추협에 모습을 보이지 말고 숨어있으라는 전언을 들었다. 약 일주일간 나는 하남시 모처에서 있으며 몸을 숨겼는데, 후일 듣기로 형사가 매일같이 민추협 사무실에 와서 내 행방을 찾았다고 했다.

   
▲ 나는 당시 부장검사였던 정민수 검사를 향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 검사! 당신들 지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어떻게 유 의원이 공산당이냐. 전두환 정권의 호구 노릇을 하지 마라. 나중에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87년 6월 10일 : 역사는 오늘을 6·10 항쟁이라 기록할 것

법정소란사건의 약 일주일 뒤인 4월 13일 YS는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가열된 민주화 투쟁은 6월 10일, 드디어 절정에 달했다. 산발적으로 이어지던 시위는 결국 이날 전국에서 일제히 ‘박종철 군 고문살인 범죄조작·은폐 규탄과 4·13 호헌철폐’ 범국민 운동으로 일어났다. 같은 날 민정당은 국민의 요구를 묵살하며 잠실체육관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노태우 전 대통령을 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있었다.

나는 오전 11시경 YS의 부인 손명순 여사와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의 부인인 원영일 여사 등, 의원 부인들이 포함된 여성 동지들과 함께 롯데 호텔 커피숍에 모였다. 최루탄 대책으로 치약을 바른 마스크를 쓰고, 눈에는 투명한 ‘비닐랩’을 붙이고 시위를 하러 나섰다. 이날은 최후 결전의 날이라, 모두 만반의 준비와 비장한 각오를 한 우리는 군인들의 출정(出征)을 방불케 했다.

12시 정오가 되자 선두에 선 오사순 국장이 “호헌철폐, 민주헌법 쟁취, 전두환 물러가라!”이라는 구호를 선창했다. 우리가 따라 외치자마자 최루탄이 정말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기택 전 총재의 부인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그 파편 등에 부상을 입었다. 그래도 우리는 물러서지 않으려고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팔짱을 끼고 스크럼을 짜기도 했다. 그렇게 이어진 치열한 하루의 끝 무렵, 전국적으로 거센 저항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산에서 수 십 만이 들고 일어났다는 속보를 시작으로, 전국이 민주화 투쟁으로 밤을 지샜다. 나는 그날의 일기에 “전국적이며 전국민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운동을 일으킨 오늘을 역사는 ‘6월 항쟁’혹은 ‘6·10 민주화항쟁’이라고 기록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과연 현재 역사는 그렇게 부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날의 일기에 “전국적이며 전국민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운동을 일으킨 오늘을 역사는 ‘6월 항쟁’혹은 ‘6·10 민주화항쟁’이라고 기록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과연 현재 역사는 그렇게 부르고 있지 않은가.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막간 :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호응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6월 항쟁에서 성원을 보내준 수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에 대해서다. 그들은 투쟁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자 올바른 길이라는 믿음을 주는 존재였다. 종파를 초월한 종교단체들의 타종(打鐘)을 통한 지지와 시내를 달리는 버스, 택시 기사들의 경적 응원은 차라리 장엄한 느낌마저 줬다.

또한 최근과는 달리, 시위에선 최루탄이 기본이었던 때라 종로 일대의 가게들은 시위 날에는 사실상 셔터를 내리고 장사를 접었다. 그러나 많은 가게들이 셔터를 완전히 닫지 않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열어둔다. 혹은 문을 두드리면 열어준다. 시위를 하다 그리로 피신한 이들에게, 차가운 물이나 얼굴을 닦을 것들을 준비해두곤 했다.

지나가는 공무원들, 직장인들, 넥타이 부대들은 함께 혼연일체가 돼서 성원해줬다. 6월 29일 있었던 민주화 조치 성명, 전두환 정권의 항복에서 YS가 가장 먼저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얻어진 눈물겨운 결과”라고 논평한 이유다. 그래서 민주시민이라고 불렀다.

29일엔 ‘오늘 무료’라고 써 붙인 다방을 볼 수 있었고, 요금을 받지 않는 택시기사도 있었다. 제도권에서 앞장서 민주화를 견인했지만,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민주화 쟁취다.

2016년 : 촛불에서 비친 6·10 항쟁

지난해 민주 시민들은 또다시 분연히 일어났다. 나는 2016년 10월 29일 광화문에서 열린 첫 번째 촛불시위부터 참석했다. 촛불의 물결을 보면서, 6·10 항쟁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그 당시에도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6·29 항복을 불과 며칠 앞둔 날에도, 나는 멀어만 보이는 우리의 민주 새벽이 언제 열릴까 생각했으니까. 정의를 잃는다면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해낸 경험이 있다. 6·10 항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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