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황명수)이나 가서 혼자 다해 처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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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황명수)이나 가서 혼자 다해 처 먹어라”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07.02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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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 불참선언에, ‘황명수 급파’
내각제 파동 때, 최형우 분당 주도

⑦ 갈등
90년 1월 민정-민주-공화 3당간의 합당은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그 중에서도 민주당은 3당 통합을 놓고 큰 갈등을 빚었다.

평생 군정종식을 위해 뛰어왔던 김영삼이 독재세력들과 하나로 합친다는 것에 대해 상도동 사단 내부에서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기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며 설득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오른팔이었던 최형우조차도 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졌다.

▲90년 3당합당을 후 김영삼이 이기택(좌측)과 최형우(우측)와 함께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김영삼

YS의 설득에 최형우 생각 바꿔

 
#1. 89년 10월경. 3당 합당이 있기 3개월 전쯤.

김영삼(YS) 민주당 총재와 김종필(JP) 공화당 총재가 골프회동을 가지면서, 정가에는 민주-공화 양당의 합당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때 최형우는 ‘유신잔당’ 세력인 JP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느냐며 평민당과의 ‘야권통합운동’을 전개했다. 물밑에서 3당 통합을 진행 중이었기에, YS의 제지가 있을 것은 자명한 일.

YS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최형우에게 강력히 경고했다.

하지만 최형우는 말을 듣지 않았다.

노무현 김정길 장석화 등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과 힘을 합세하는 한편, 평민당 조윤형 의원과 여러 차례 접촉해 정대철 이해찬 이상수 등 여러 명의 평민당 의원들로부터 ‘통합찬성’이라는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힘을 얻은 최형우는 통합자금을 마련키 위해 여러 중진 의원들로부터 2백 여 만원씩 받아냈다. 또한 그는 통합 자금을 마련키 위해 서예전을 열기도 했다.

그러다가 3당 합당이 발표되자, 최형우는 YS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댔다. 그러나 YS는 최형우 없이 통합 후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끈질기게 설득했다.

YS의 명을 받아 설득에 나선 인물은 황명수 심완구 김정수 의원 등이다.

황명수 의원이 설득하고 나서자 최형우는 “형님(황명수)이나 가서 혼자 부총재하고 다해 처먹어라”고 버텼다.

심완구 의원도 최형우로부터“아니 죽으러 들어가는 굴에 혼자나 가서 죽지, 왜 여러 사람 끌어 들이냐”고 욕을 들었다.

YS는 황명수로부터 “최형우는 같이 가기 어려울 것 같다”라는 말을 듣고 직접 설득에 나섰다.

최형우는 그러나 YS와 면담을 하고 난 후 태도가 확 달라졌다. 면담 후 오히려 동료의원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때문에 둘 사이에 무슨 밀약이 오고갔다고 소문이 났다. 즉 통합 참여를 놓고‘YS가 최형우에게 장관자리 하나라도 약속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3당 통합 후 최형우는 변변한 직책하나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최형우는 YS와의 면담 후 생각이 바뀌었을까.

최형우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민정당, 공화당과 통합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지들은 내가 YS와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따라가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특히 큰 딸 은지는 YS와 끝까지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라며 소리 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현철씨 도움으로 곤궁에 빠진 김영삼 ‘돌파’
 
#2. 90년 10월 28일. 김영삼은 곤궁에 빠졌다. 이른바 ‘내각제 파동’이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내각제 합의각서가 민정계에 의해 언론에 유포된 것.

문건이 공개된 지 3일 후, 궁지에 몰린 김영삼(YS)은 특유의 돌파력을 보였다.

“합의문서 공개는 처음부터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고 고사시키기 위한 정치공작이다. 내각제 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 할 경우 절대 할 수 없다.”

이렇게 김영삼이 강경하게 나오자 청와대는 “내각제 문제는 연말까지 꺼내지 않겠다”며 ‘화해’를 요청했다.

이에 YS는 ‘당무복귀냐, 거부냐’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이때 YS의 결정에 도움을 준 사람이 그의 아들 현철씨다.

현철씨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때를 이렇게 밝혔다.

“주변에서 이 정도하고 청와대와 타협 하자는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참에 단단히 쇄기를 박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상도동에 갔더니, 우려했던 대로 아버님이 당무복귀 성명서를 준비 중이었다. 서재에 있던 박종웅 비서관님한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봤더니 나와 뜻이 같았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내 생각을 용기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YS는 집무를 거부하고 아버지가 살고 있는 마산으로 향했다. 이에 최형우와 민주당 소장파를 중심으로 “아예 분당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최형우 서청원 강삼재 김운환 최기선 등은 탈당 강경파로 꼽혔고, 탈당 날짜를 잡고 기자회견까지 준비할 정도였다. YS도 이에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역사를 바꿔놓은 인물이 ‘빈배’로 유명한 허주(虛舟) 김윤환이다.

허주는 “YS를 그대로 두면 당은 깨진다. 그러면 다음 대통령은 김대중”이라며 노태우를 설득했다.

노태우로부터 ‘내각제 포기 메시지’를 가지고 마산으로 간 허주는 YS를 설득해, 당무복귀로 키(key)를 돌려놨다.

또한 YS가 당무복귀를 결정하게 된 데는 아들 현철씨도 한몫했다.

현철씨는 “내각제는 절대 될 수 없다. 그러니 민자당에 남아 있으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고 건의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가 YS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즉 현철씨는 YS의 마산행에서, 당무복귀까지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의 이 같은 예상은 정확히 적중해, YS는 민자당을 장악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같은 결정이 내려진지 모르는 탈당파들은 그해 11월 7일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탈당선언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물론 주동자로 꼽힌 사람은 최형우다.

때문에 상도동은 최형우를 잡기위해 나섰다. YS는 3당 통합 때처럼 최형우를 붙잡기 위해 황명수를 보냈다.

황명수는 최형우에게 “야, 이놈아 탈당하려면 같이 해야지, 말도 안하고 혼자 하겠다는 것이냐”고 막말을 했다.

이에 최형우는 “형님 다 끝난 일이다. 이번엔 무조건 탈당이다”고 맞섰다.

또다시 YS가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최형우가 피했다. 이에 YS는 탈당기자회견이 있기로 한 마포가든 호텔로 가, 기자 회견이 있기 3시간 전에 최형우를 만났다.

최형우는 YS와 앉은자리에서 “거, 내가 뭐라 했습니까, 3당통합 때 안 된다는 통합을 해가지고 이렇게 어렵게 만듭니까”라고 강경하게 나왔다.

YS는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로 최형우를 또다시 붙잡았다.

“내가 이렇게 하는 자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이번 한번 만 꼭 참아줘야겠다. 분명히 말 하건데, 이번 연말까지 후보가시화가 안되면 내가 먼저 탈당계를 쓰겠다.”<계속>
 
 
<내각제 유출 파동이란>


YS,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정치공작”

박철언, “고도로 계산된 YS측의 자작극”

 
1990년 가을 집권 여당이던 민자당을 내분의 극한으로 내몰았던 내각제 각서 파동의 시작은 3당 합당 선언을 한 그 해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합을 위한 회담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는 “내각제를 당의 공식 입장으로 써 넣자”고 했지만, YS의 반대에 부딪쳐 논의의 진척이 없었다.

그 후 1990년 5월 민자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시 노재봉 비서실장과 박준병 사무총장은 YS를 압박해 나갔다.

박 사무총장은 YS를 직접 찾아와, 내각제 합의각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YS가 “이런 각서가 무슨 필요가 있냐. 내각제는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므로 불가능하다. 나 자신도 내각제를 반대한다”며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박 총장은 “세 계파가 통합하기 위한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야당과 국민이 반대하면 내각제가 추진되겠냐. 3부만 만들어 노 대통령과 YS, JP 세 사람이 한부씩 보관하되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에 공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서명을 요구했다.

YS는 이에 “세 계파의 융화를 위해 이런 형식이 필요하다면 하겠다”고 해 내각제 서명문건에 사인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내각제 문건이 5개월 뒤인 10월 26일 중앙일보에 의해 사본이 공개됐다. 당이 발칵 뒤집혔다. 사무총장이던 박준병은 이 일로 해서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YS는 ‘공작정치’라며 당무를 거무하고 마산으로 떠났다.

YS는 “개헌은 국민과 야당의 동의와 협력 없이 결코 추진되어서는 안된다”고 전제한 뒤 “국민다수와 야당이 반대하는 것이 확실한데도, 내각제 개헌을 끌고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개헌반대입장을 밝혔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마산에 가고 싶으면 가고 생각할 것이 있으면 하는 것이지 의미부여 할 게 뭐가 있느냐. 당무는 다른사람이 대신 보면 될 것”이라며 YS를 압박했다.

▲3당합당후 김영삼 대표 최고위원과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김영삼 자서전

그러나 여론이 ‘공작정치’쪽으로 돌아가자 노 대통령은 급히 YS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때 나선 인물이 김윤환 원내총무였다.

김 총무는 마산으로 내려가 ‘내각제 포기 메시지’를 YS에게 전달했다.

15년이 흐름 지금, 내각제 유출파동에 대해 YS와 당시 YS의 정적이었던 박철언이 생각하는 견해차는 너무도 크다.

YS는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각서는 고의로 유출된 것이 분명했다. 물론 노태우의 지시 없이 각서가 유출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약속을 위반한 공작정치를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각제 개헌은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박철언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1990년 10월에 있었던 내각제 각서 유출 파동은 고도로 계산된 YS 측의 자작극, 고육지책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진실이야 YS만이 알지 모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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