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안철수의 지지율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작년 대선 당시 21.4%의 지지율을 달성했던 안철수 후보의 과거를 뒤로하고, 국민의당은 최근 5%대를 기록하며 기어이 한 자릿수의 지지율을 찍었다.
이는 당 지지율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선 이후 정치인 개개인의 지지율을 조사한 공식적인 자료는 아직 없지만, 리얼미터가 8일 발표한 ‘수도권 내 국민의당 지지율’인 5.3% 정도가 안 대표 개인 지지율로 추정된다. 중도통합으로 미운털이 박힌 호남 지역을 제외하고, 국회의원 당시 지역구였으며 ‘안철수의 새정치’ 개념만으로 표를 던졌던 ‘제2의 지역기반’이 수도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의 득표가 5%로 곤두박질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YS의 표’로 처음 한국 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중도(中道)표심’이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대선 당시 안철수의 20%는 흔히 ‘부동(浮動)층’으로 묘사되지만, 한국 사회에 명확히 존재했던 ‘중도표’다.
이에 <시사오늘>은 중도표가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부터 가시화(可視化)됐다고 가정해봤다. 이 가정에 동의한다면, 지금부터 우리와 함께 중도표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고생 끝에 낙이 오듯, 기나긴 30년 궤적의 추적 끝에 안철수의 전략이 보일 것이다.
1987년 제13대 대선
노태우는 36.6%라는 역대 최저 득표율로 28%의 김영삼, 27%의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DJ는 ‘4자 필승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노태우·김영삼·김종필·김대중 4인 출마 시 노태우·YS가 영남 지역, 김종필이 충청 지역, 자신이 호남 지역과 수도권 지역의 표를 가져가면서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상당히 합리적인 생각처럼 보였으나 실패했다. 실제 노태우와 YS 측에 영남 표·JP에게 충남 표·DJ에게 호남과 서울 표가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노태우가 당선됐으며 근소한 차이지만 YS가 총 득표율에서 DJ를 앞선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현상은 노태우와 YS, 그 중에서도 특히 YS에게 지역과 이념을 떠난 중도표가 몰린 것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다. YS는 영남 지역을 제외하고 서울에서 28.6%, 충청 19.5% 등 상대적으로 고른 표를 받았다. 요컨대 87년 대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영·호남의 ‘대립적 지역주의’가 정치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절망적인 단면을 보여줬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중도표의 존재가치를 입증해준 것이다.
1997년 제15대 대선
이후 YS의 중도표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그들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 YS의 당선을 도왔고, 1997년 다시 정치권에서 ‘부동층’으로 명명되며 대권의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97년 DJ는 ‘DJP 연합’을 구성하며 호남과 충청 표, 또한 진보표를 확보했고, 이회창 전 총재는 이에 맞불을 놓듯 민정기 전 전두환 대통령 비서관과 손잡으면서 ‘보수의 극우화’를 시작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YS 화형식’이다. 한 선거 유세장에서 YS 마스코트 인형을 불태우는 극단적 행동을 한 것이다.
이 비정한 퍼포먼스로 등을 돌린 중도표는, 상대적으로 개혁 성향의 보수 입장을 취했던 이인제 전 의원에게 향했다. 이인제의 19.2%, 약 20%에 육박하는 ‘의외의 선전’은 중도표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에 대해 자유한국당 이종혁 최고위원도 작년 11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이 전 총재는 그것(화형식) 때문에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선
보수의 단일화로 이회창 전 총재가 다시 대선후보로 나섰다. 그의 상대는 상대적으로 체급이 약했던 노무현이었다. 이 전 총재는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일찍이 ‘이회창 대세론’을 굳혔지만, 노무현은 정몽준 전 대표와 대선후보 등록일 직전까지 단일화 협상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정 전 대표의 ‘노무현 지지 철회 기자회견’까지 덮쳤다. 선거일 당일 아침, 일부 지역에 ‘이회창 16대 대통령 당선’이라는 설레발 기사가 흩날린 것이 당시 현실을 방증한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노무현의 손을 들어줬다. 46.6% 대 48.9%,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것이다. 그의 손을 잡아준 이 ‘승리의 여신’이 바로 중도표였다. 만일 보수 후보가 굳건한 ‘극우 보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이회창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중도층의 행방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2007년 제17대 대선
17대 대선에서 보수는 단일화에 실패해 이명박·이회창·이인제 등 거물 후보들이 난립했다. 반면 진보는 정동영으로 모아지는 분위기였다. 물론 문국현이 등장하며 표가 일부 분산됐지만, 두 후보의 표를 합해도 34.9%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48.7%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회창의 득표율은 15.1%로, 이는 당시 경선후보에서 진 박근혜 후보의 지지표를 물려 받았다는 것이 정론이다. 정동영 후보는 낮은 26.1% 지지율로 인해 ‘더블 스코어’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의 50%는 어디로 갔을까. 노무현에게서 이탈한 약 20%, 즉 중도표가 이번엔 이명박에게로 향한 것이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이회창 후보처럼 극우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2년 제18대 대선
2012년 ‘보수대연합’이 성공해, 박근혜는 단일보수후보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진보 측 역시 서울경선을 통해 과반 이상을 차지한 문재인 후보가 단일 후보로 선출됐다. 대선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득표율은 51.6% 대 48.0%, 박빙이었다.
여기서 선거의 주요 변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당시 안철수 교수였다. 기성의 이념정치와 진영논리에 대해 염증을 느낀 중도층은 안철수를 통해 결집하고 정치적 세력화를 시작했다. ‘안철수 현상’은 이처럼 선거 전략으로써 중도의 중요성을 자극했다. 안철수의 사퇴 이후 박근혜와 문재인 캠프 모두 중도층을 흡수하려 애쓴 것이 그 증거다.
박근혜 후보는 당명을 바꾸고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하며 ‘좌클릭’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문재인 후보는 ‘남북교류 균형론’ 등으로 ‘우클릭’을 펼치며 ‘안철수와의 정책연대’ 등 중도 전략을 제시했다. 동시에 좌파 성향이 강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와의 연대도 하지 않았다.
결국 중도층이 절반으로 뿔뿔이 흩어져, 근소한 차이로 박 후보가 승리하게 된 것이다.
현재 국민의당과 안철수 대표가 낮은 지지율 고전하는 이유도, YS로부터 97년의 이인제, 07년의 이명박, 그리고 17년의 자신에게로 와주었던 ‘중도 표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중도표’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 즉 유동층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존하지 않는 게 아니듯, 어느 한 곳에 머물러있지 않다고 해서 허상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극단적 보수주의와 국수주의 성향 거부’라는 실질적인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역사는 결국 중원(中原), 즉 ‘중도표’를 삼킨 자가 승리했다. 혹자는 ‘부동층이 선거를 좌우한다’고 말하며 이를 단순 부동표로 명명하고 있지만, 지난 대선을 훑어보면 그 표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보수진영으로 향했던 중도표, 하지만 극우 이미지를 가진 보수 후보는 차지 할 수 없었던 표심이다. YS에서 시작해 이명박이나 이인제로 향했던 그 표다. 하지만 이회창이나 박근혜는 온전히 차지할 수 없는 지지층이다.
안철수 대표가 ‘극중주의’를 내세우며 중도통합을 추진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중도표는 현재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으로 나눠져 있다. 이 표를 온전히 먹기 위해서, 중도통합은 필수다. 중원을 차지한 조조가 삼국 전쟁의 실질적 승리자가 됐듯, 그 열쇠는 선거의 중원인 중도층의 표심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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