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요즘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복잡하다. 그래서 제가 지난 몇 달 동안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돌면서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봤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도 그 부분이다.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은 내용이니, 여러분께도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는 6선 의원이 미국·중국·러시아를 돌며 보고 듣고 생각한 내용을 메모한 종이뭉치를 꺼내들자, 빈자리 없이 꽉 찬 강의실에는 전에 없던 기대감이 감돌았다. 주요국 핵심 정·관계 인사들의 ‘진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을 터, 기자 역시 한마디를 놓칠세라 자세를 고쳐 잡고 귀를 기울였다. 다가온 봄을 시샘하듯 미세먼지가 전국을 뒤덮은 3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이석현 의원의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북악정치포럼’ 강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美, 북한 선제공격할 의사 없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후, 우리의 최대 관심은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 여부’였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말 폭탄’을 주고받자, ‘군사적 옵션’ 활용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증폭됐다. 그러나 북미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해 10월에 미국을 방문해 조셉 윤 전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 토머스 섀넌 국무부 정무차관, 도널드 만줄로 한미경제연구소장, 테드 요호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 조 윌슨 하원의원 등을 만났던 이 의원은 “미국은 군사옵션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지난 10월, 한창 북미 관계가 좋지 않을 때 미국에 갔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옵션을 사용하지나 않을까, 선제공격 의사를 갖고 있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만났더니, 미국은 군사옵션을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미국에는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협상을 위해 그 두 가지 목소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정·관계 인사들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그들의 발언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토마스 섀넌 국무부 정무차관에게 ‘한반도에서 전쟁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쟁할 의도가 추호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한창 ‘말 폭탄’이 오갈 때였는데, 그 와중에도 ‘북한 문제는 평화적 해결이 우선이다’라고 했다.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도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발언은 대북 협상용이라고 주장했다. 조 윌슨 하원의원 역시 ‘한반도에 미군이 몇 명이나 있는 줄 아느냐’며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에게도 재앙’이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의원의 전언(傳言)과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내각 구성 사이에 간극(間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슈퍼 매파’로 불리는 존 볼턴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에 지명하는 등, 이른바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위주로 외교안보라인을 꾸리고 있다. 분위기를 감지한 듯, 이 의원은 이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최근 미국이 초강경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하면서 ‘전시 내각’ 같다는 말이 나온다. 존 볼턴 안보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 모두 슈퍼 매파로 알려진 사람들이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런데 이 부분은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를 고려해서 생각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 협상 전략은 항상 복합적인 면이 있다.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 말을 빌리면,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전략은 ‘굿캅 배드캅’ 전략이다.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과 호흡을 맞출 때는 트럼프 대통령이 배드캅이었다. 하지만 북한과의 대화 국면에서는, 존 볼턴 안보보좌관에게 배드캅 역할을 맡기고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굿캅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전쟁을 준비한다기보다는, 역할 조정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北, 韓·美 두려워하고 있어”
다음으로 이 의원은 중국과 러시아를 방문한 이야기를 전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우방(友邦)으로 꼽히는 국가답게, 미국과는 다른 시선으로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년 11월 초에 중국에 갔다. 장예수의 중국 외교부 상무부장을 만났는데, 그 역시도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의 북핵과 미사일 동결 후 핵 폐기 추진 전략을 적극 지지했다. 북핵 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다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물론 중국도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 뒤에 만난 푸잉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 외사위원회 주임은 흥미로운 말을 했다. 한·미·일은 왜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대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줘야 협상이 되는데, 한·미·일은 중국에게 압력을 가하라는 요구만 하고 북한이 원하는 것을 줄 뜻은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탕자슈엔 전 중국 국무위원의 생각도 비슷했다. 무력으로 위협만 하지 말고, 북한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봐야 한다고 했다. ‘중국이 대만 앞에 가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한다면 대만에 어떤 자극을 줄지 상상해 봐라. 북한이 겁을 먹으면 먹을수록 핵 개발에 집착하게 된다. 이것을 없애려면 공포를 제거해 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충고였다.”
약속된 강의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이 의원은 시계를 바라보며 양해를 구한 뒤 말을 이었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과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3월 초에는 러시아에 가서 콘스탄틴 코사체프 상원 외교위원장을 만났다. 그도 중국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북한과 회담을 했는데, 회담에 나온 북한 인사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려 있더라는 것이다. 또 압력을 가한다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서방에서는 압력이 강해지면 핵 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카다피나 후세인을 본 북한이 핵을 쉽게 내려놓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아사드 대통령도 권력을 내려놓고 편하게 살고 싶은데, 자기 삶과 가족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을 받고 물러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마 북한도 그렇지 않겠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의원은 대북 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며 강의의 문을 닫았다.
“북한 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자신들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전력이 비교가 안 되고, 중국과 러시아가 도와줄지도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자신들이 공격을 받아서 망하는 일만 없도록 체제에 대한 보장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하게 무너뜨릴 생각을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자유의 바람이 스며들게 하면 장기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