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기자님, 제 강의 어땠나요? ‘정치 철학’ 같은 내용보단 실무자한테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니 더 좋지 않던가요?”
강의를 마친 더불어민주당 정재호 의원(경기 고양시을)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외환은행 신용카드사 노조위원장부터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사회조정 비서관 등을 역임했던, 탄탄한 실무 경험에서 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제 강의는 평소에 듣기 힘든 주제입니다. 제가 작년부터 1년여 간 특별경제고문을 맡아 직접 체험했던 북방경제 협력 이야기거든요.”
수사(修辭) 없는 담백한 강의. 지난 17일 오후,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북악정치포럼>에서 진행된 정 의원의 ‘동북아 평화와 북방경제협력’ 강의는 그와 닮은 모습이었다.
“저는 83학번입니다. 87년 6월 항쟁 때 화염병을 들었던 적이 있죠. 우리는 30년 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만 쟁취했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6·29 선언 다음 달 ‘노동자대투쟁’이 발생했고 오늘날의 노동법이 정비됐습니다. 이처럼 한 사회의 큰 변화, 제도적 변화가 있는 시점 이후에는 후속 현상이 벌어지죠.”
그로부터 30년 후, 화염병이 아닌 촛불이 거리를 점령했다. 정 의원은 이 촛불의 시작을 ‘정유라 이대 특례입학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들이 다 참아도 특혜, 즉 부정(不正)은 못 참았다는 것이다. 그는 국민적 분노의 이면에 경제적 어려움이 깔려 있었다고 본다.
“촛불이 11차까지 이어지기 전에 0차가 있었습니다. 1차 집회 일주일 전 토요일로 기억합니다. 그 집회에 대학생들이 그렇게 많더라고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가히 87년 시절의 거리 현장을 보는듯한 광경이었죠.
저는 정유라의 이대 특례입학 때문에 촛불이 시작됐다고 봅니다. 젊은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해서죠. 마침 수능을 앞둔 시점이었고요. 특혜가 왜 그렇게 싫었을까요?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공정하지 않으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심리적 기반은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게 있습니다. 우리 경제가 힘들고, 더군다나 젊은 층의 사회적 기회가 봉쇄됐기 때문입니다. 경제(經濟), 풀어서 경세제민(經世濟民). 이게 대통령의 첫 번째 숙제입니다.”
“그런데 이 좁은 대한민국 땅에서 일국적인 노력으로는 과거 박정희 고도성장기 시대처럼 경제발전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정 의원은 이 대목에서 힘주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는 북방경제협력이 필요한 겁니다.”
그는 러시아 방문 당시 인상 깊었던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에너지 공급 차원에서 북방경제협력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한국은 사할린 가스를 연간 300만t 도입해요. 러시아를 방문하니까 외국의 모 가스공사 회사 사장이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더라고요. 왜 저러냐고 물어보니까 ‘가스 좀 사달라고 저러고 있습디다’라고 해요. 그만큼 한국 천연가스 구입 총량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연간 3300만t 정도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전 세계에서 가스 소비자가가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운송비 때문이에요. 가스 생산지로부터 한국 가스탱크까지의 거리가 무려 5000km 정도라니까요. 그런데 사할린에서 삼척 가스단지까지는 1500km밖에 안 돼요. 일단 운반비가 3분의 1로 확 줄어들죠. 게다가, 기체 상태인 것을 액화시켜야 운반할 수 있죠? 그런데 지금 들여오는 가스는 열대 지방을 거쳐 들어와요. 이 액화시설이 너무 비싼 거야. 그런데 북극에 위치한 야말반도는 너무 추워서 가스를 지하에서 꺼내자마자 바로 액체가 돼버려요. 액화 비용이 굉장히 적게 들어서 가격이 확 내려가는 거예요.
이 야말반도 가스를 개발 중인 러시아 회사가 우리한테 제안을 하나 하더라고요. ‘캄차카 반도까지 우리가 가스를 가져다줄게, 너희는 캄차카에서 이틀 동안 싣고 가라’고요. 이 회사가 야말 반도에서 가스를 싣고 이동하려면, 북극 15m의 얼음을 깨는 쇄빙선이 필요해요. 쇄빙선 제조 능력을 가진 최강 회사가 어딜까요? 바로 한국기업, 대우조선입니다. 이게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습니까. 가스 도입하고, 배도 팔고.”
그러나 모든 문제의 열쇠는 북한이 쥐고 있다. 유라시아 철도건설 사업도, 가스 운송 사업도 북한의 순조로운 협력 없이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정 의원은 북방 경제망의 중요성을 다시 역설한다. 진정한 ‘불가역적 합의’는 경제 협력으로부터 나온다는 논리에서다.
“개성공단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개성공단, 솔직히 잘한 일이기도, 못한 일이기도 합니다. 북방경제협력이라는 관점에서 개성공단을 들여다보니 좀 잘못한 일이기도 하더군요. 북방 영역 전체를 놓고 했어야하는데, 남과 북의 문제로만 생각했던 거예요. 결국 북한하고의 돌이킬 수 없는 협력구조를 짜기 위해서는 남북한 일대일 구조가 아니라, 러시아-중국-몽골-한국을 포함한 경제망을 만들어서 그 망 속에 북한을 넣어야 합니다. 다시는 못 돌이키게요. 일대일로만 하니까 저쪽이 삐지면 답이 없지 않나요?
다들 실크로드의 위대함은 잘 아시겠죠? 인류 문명은 ‘길의 역사’라고 합니다. 새로운 길이 열리면, 그 길을 따라서 문명의 역사가 변화하고 발전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길을 만들어보자는 것은 어떨까요? ‘북방경제협력 로드’의 완성을 통해서요.”
그는 촛불 항쟁과 북방경제협력의 연관성을 설명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그를 평가하는 단어로 손꼽히는 ‘경제를 다루는 정치인’ 다운 연사였다.
“남한이란 땅은 사실상 섬나라죠. 북한을 거쳐 대륙으로 못 가니까요. 북한과 우리가 평화 국면으로 들어섰기는 하지만, 이 국면을 완전히 보장받은 것은 아닙니다. 북한과의 관계 안정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북한을 뛰어넘어 러시아로 가야 합니다. 러시아도 한국과의 협력을 제일 좋아할 걸요? 일본은 러일전쟁 대상국, 급성장한 중국은 견제 대상국이니까요. 제일 최적의 파트너로 생각하는 곳이 기술력, 자본력 있고 극동지역과 가까운 한국일 것입니다. 러시아와의 경제 파트너십을 높여 나가는 길, 그 길이 촛불항쟁이 바랐던 경제를 관철할 수 있는 길입니다.”
시계를 보니 예상 종료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만큼 그의 ‘일 욕심’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던 열정적인 강의였다. 이에 사회를 맡은 서정도 국민대 교수도 다음과 같이 호평했다.
“한 시간도 못 돼서 끝나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시더니, 그 어떤 의원님들보다도 열정적이신데요? 하하. 에너지부터 운송까지, 학생들도 많은 공부가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