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선거는 언제나 정치·사회적 변화를 추동(推動)한다. 기본적으로 선거는 민의(民意)의 총체적 반영이라는 속성을 갖기 때문. 대한민국 역사를 돌아봐도, 크게는 시민혁명에서부터 작게는 정권의 레임덕에 이르기까지 ‘한 표의 힘’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사오늘>은 대한민국 정치·사회 발전의 원동력 역할을 해온 역대 선거를 간략히 짚어봤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해 국가원수를 선출한 사례. 다만 직접선거가 아닌,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정·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 방식이었다. 당초 제헌헌법은 내각책임제 기반이었으나,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이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국회가 정·부통령을 뽑는’ 기묘한 형태로 타협됐다. 이 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 이시영이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최초의 직접선거. 그러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남북 협상파와 좌익계열은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내부 혼란과 정치적 갈등이 그대로 발현된 셈이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대한민국 최초의 직접선거라는 것 외에도, 95.5%라는 역대 최고 투표율을 남긴 선거로 기록돼 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 (1950년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 2년 만에 민심을 잃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건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좌절되고, 김구 암살에 이승만이 연관돼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기 때문이다. 이러자 이승만은 5월로 예정됐던 총선을 12월로 연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개입으로 선거는 계획대로 치러졌고, 이승만의 세력은 크게 축소됐다. 결국 이승만은 이 선거 이후 자신에게 유리한 직선제로의 개헌 운동을 전개하면서, 부산 정치파동을 거쳐 이른바 ‘발췌 개헌’을 강행한다.
제2대 대통령 선거 (1952년 8월 5일)
6·25 전쟁 중에 치러진 선거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다. 이승만이 자신에게 유리한 직선제를 도입한 데다, 전시(戰時)였던 까닭에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이날에는 부통령 선거도 함께 치러졌는데, 함태영이 제3대 부통령으로 당선된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 (1954년 5월 20일)
자유당이 ‘후보자 공천제’를 채택하며 대한민국 최초로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자 공천이 이뤄진 선거다. 제3대 총선에서는 경찰이 곤봉과 몽둥이를 이용해 후보자들의 출마를 막고, 야당 정치인들을 고문하는 등 불법을 자행한 결과 여당인 자유당이 의원 정수의 56.2%에 해당하는 114석을 획득했다. 제3대 총선에서의 대승으로, 자유당은 이승만의 독재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시도하게 된다.
제3대 대통령 선거 (1956년 5월 15일)
제헌 헌법과 1952년 개정 헌법에 따르면, 이승만은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자격이 없었다. 헌법에 ‘대통령 임기는 4년으로 하고, 재선에 의한 1차 중임만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러자 이승만은 ‘초대에 한해서 중임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사실상 부결됐음에도 ‘사사오입의 원리’를 내세워 억지로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이로써 이승만은 3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된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 (1958년 5월 2일)
자유당이 126석으로 원내 제1당을 고수했으나, 민주당도 80석을 얻어 ‘여당 견제’가 가능한 거대 야당으로 올라선 선거. 특히 제4대 총선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양당제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여당은 시골에서, 야당은 도시에서 지지를 받는 ‘여촌야도’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선거이기도 하다.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이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각종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선거. 미국의 무상 원조가 축소되고, 무리한 개헌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여당인 자유당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팽배해졌다. 이러자 자유당은 정치 폭력배를 동원하고, 개표 조작을 감행하는 등 선거를 부정으로 물들였다. 이것이 바로 3·15 부정선거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전국 각지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김주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며 전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결국 이승만과 이기붕은 각각 대통령직과 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 (1960년 7월 29일)
4·19 혁명 후인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를 정부 형태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따라서 제5대 총선은 내각 전반을 통솔할 정부를 선출하는 선거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또한 이 선거는 대한민국 국회 사상 처음으로 양원제를 구성하는 선거이기도 했다. 다만 제5대 국회는 5·16 군사정변에 의해 9개월여 만에 문을 닫는다.
제4대 대통령 선거 (1960년 8월 12일)
3·15 부정선거가 국회에 의해 무효화되면서 치러진 선거. 그러나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출은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이뤄졌다. 당선자는 당시 집권 여당이던 민주당이 내부 합의로 대통령 추대를 결정했던 윤보선. 그러나 윤보선 역시 5·16 군사정변으로 일찌감치 자리에서 물러난다.
제5대 대통령 선거 (1963년 10월 15일)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민정 이양을 위해 실시한 선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도 예편한 뒤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박정희가 민주공화당 후보로,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로 출마했던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불과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을 꺾고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 (1963년 11월 26일)
군부 세력은 개헌을 통해 국회를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꾸고, 의원내각제도 다시 대통령 중심제로 돌려놨다. 또 지역구와 전국구 제도도 도입했다. 한편, 이 선거에서 박정희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은 제5대 대선의 여세를 몰아 의원 정수 175명의 62.8%에 해당하는 110명으로 절대다수의석을 차지한다.
제6대 대통령 선거 (1967년 5월 3일)
박정희의 4년 집권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했던 선거. 국민의 선택은 박정희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노골적인 군사 독재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윤보선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선거는 영호남 지역구도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선거로 평가된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67년 6월 8일)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은 농촌 지역에 대량의 금품을 살포하는 방식으로 ‘표를 사는’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심지어 공화당 스스로 “타락되고 혼탁한 분위기의 선거”라고 자인했을 정도. 어찌됐건 129석을 확보한 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77.9%를 가져가면서 3선 개헌의 토대를 마련한다.
제7대 대통령 선거 (1971년 4월 27일)
제7대 총선을 통해 압도적인 의석수를 갖게 된 민주공화당은 1969년 10월 21일,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 3선에 도전한다.
그러나 3선은 쉽지 않았다. 신민당에서 김영삼·김대중·이철승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며 돌풍을 일으켰기 때문. 결과적으로는 박정희가 95만 표 차이로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증을 거머쥐었지만, 지역감정 자극과 부정선거 공작에도 불과 95만 표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는 것은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게다가 제8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89석을 획득하면서 개헌 저지선을 훌쩍 넘기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결국 유신을 선포한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 (1971년 5월 25일)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은 당수 유진산이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려다 당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진산 파동’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여기에 중앙정보부의 공작이 합쳐지면서, 신민당은 개헌 저지선 확보도 힘들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선거 결과, 신민당은 89석으로 개헌 저지선을 훌쩍 뛰어넘는 의석을 확보한다. 민주공화당은 113석으로 과반을 확보했지만, 사실상 패배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이로써 합법적 방법으로 정권 연장이 불가능해진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선포하게 된다.
제8대 대통령 선거 (1972년 12월 23일)
국민들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이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선출한 간접 선거. 여기서 박정희는 박정희 2357표, 무표 2표(‘박정희’ 한자를 잘못 표기한 표)로 대통령에 다시 당선된다. 이처럼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1979년 10·26이 일어나기까지의 대통령 선거는 선거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 (1973년 2월 27일)
유신 헌법에 의해 치러진 선거. 146석의 지역구 선출은 중선거구제로, 73석의 유신정우회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로 선출됐다. 유신정우회는 사실상 대통령의 입법부 내 친위 세력 역할을 했던 인물들의 모임. 대한민국 정치의 ‘암흑기’를 온몸으로 대변하는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제9대 대통령 선거 (1978년 7월 6일)
제8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박정희가 당선된 선거. 박정희 2577표, ‘박정희’ 한자를 오기(誤記)한 무효 1표로 박정희가 또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8년 12월 12일)
유신 체제 몰락의 신호탄이 된 선거다. 제10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은 야당에게 득표율이 뒤지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게 된다. 이에 힘을 얻은 신민당이 ‘강성’ 김영삼을 내세워 사사건건 각을 세우자, 박정희 정권은 무리하게 야당을 탄압하면서 완전히 민심을 잃게 된다. 결국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고, 10·26이 터지면서 박정희 정권도 무너지고 만다.
제10대 대통령 선거 (1979년 12월 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피살되면서, 권력 공백을 막기 위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9년 12월 6일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최규하는 개헌 후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선출되기까지 역할을 수행할 대통령이었으나, 전두환의 12·12 쿠데타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제11대 대통령 선거 (1980년 8월 27일)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이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남긴다는 명분을 앞세워 최규하를 강제로 하야시킨 후 치른 선거다. 이에 따라 다시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전두환 2524표, 무표 1표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1981년 3월 25일)
기존 정치인들이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 규제를 당하면서, 제11대 총선은 여당과 관제야당만으로 치러졌다. 이른바 3金(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모두 참여하지 못했던 선거. 그 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151석, 민주한국당이 81석을 차지한다.
제12대 대통령 선거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1981년 대통령 선거인단 제도를 도입한다. 미국과 유사한 제도를 도입해 정통성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제1야당이 관제 야당이었던 탓에, 사실상 대통령 선거인단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결국 제11대 대선에서도 전두환은 유효 투표수의 90.2%인 4755표를 얻어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1985년 2월 12일)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의 출발점이 된 선거. 김영삼과 김대중이 힘을 합쳐 67석을 획득,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을 끌어내리면서 6월 항쟁의 토대를 마련했다. 신민당이 ‘헌법 개정 1000만 人 서명 운동’으로 민주화 열망을 끌어올리고, 시민들의 시위가 잇따르던 와중에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터지며 6월 항쟁이 일어났기 때문. 제12대 총선은 ‘선거가 혁명’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직선제라는 ‘희망’이 야권 분열이라는 ‘절망’으로 귀결된 선거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권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민주화 세력은 국민들은 군부정권 종식이라는 역사적 과제 해결을 5년 뒤로 미뤄야 했다. 후에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때의 단일화 실패를 ‘가장 아쉬운 기억’으로 꼽기도 했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1988년 4월 26일)
제6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치른 최초의 선거. 제13대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참패함으로써, 국회 주도권을 쥐게 된 야당은 제5공화국에 대한 청문회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한 노무현이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이와 같이 여소야대 정국에서 어려움을 겪던 노태우는, 결국 ‘3당합당’을 통해 218석의 거대 여당(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킨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2년 3월 24일)
3당합당을 통해 200석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보유했던 민주자유당은 제14대 총선에서 14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한다. 원인은 공천 과정에서의 잡음과 계파 갈등으로 인한 혼란. 제20대 총선에서의 새누리당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정주영의 통일국민당과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이 보수의 표를 나눠가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
반면 신민주연합당과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은 민주당으로 통합, 97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이 선거의 영향으로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이 가속화됐으며, 31석으로 돌풍을 일으킨 통일국민당의 정주영은 일약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오르게 된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1992년 12월 18일)
진정한 군정 종식이 이뤄진 선거다. 민주화 투사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박정희 이후 30여 년간 계속됐던 군부 정권이 막을 내렸다. 이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김종필은 민주자유당에서 출당돼 자유민주연합을 결성한다. 김영삼은 민자당에서 군부 세력을 축출한 뒤,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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