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인물실록(2)] 한의학 세계화의 선구자, 際光 배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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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인물실록(2)] 한의학 세계화의 선구자, 際光 배원식
  • 설동훈 기자
  • 승인 2019.01.14 09: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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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만은 물론 미수교 공산국가까지 한의학 국제교류 추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설동훈 기자)

“진실로 임상에서 체험하고 터득한 것을 거짓됨이 없이 전해야만 그것이 바로 올바른 강의이며 또한 책을 저술할 때도 추호도 거짓이 섞이지 않은, 내가 임상에서 직접 체득한 경험을 글로 실어야만 한다.”

際光(제광) 배원식 선생이 저술한 ‘한방임상보감’의 머리말에 적은 의학관이다.

한의계의 딸깍박이 선비로 통하는 배원식 선생은 한의사로서 임상에서 성가를 높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한의학과 한의계에 남긴 업적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현대 한의학의 학술적 토대 마련과 한의학의 세계화, 한의학 수호, 장학사업 및 사회사업 등을 손꼽을 수 있다.

▲ 현대 한의학의 학술적 토대를 마련하는 역할을 했던 한방 임상학술지 '의림'. ⓒ배원식한의원

‘醫(의림)’지 창간, 학술좌담회 등 현대 한의학의 학술적 토대 마련

현대 한의학의 학술적 토대를 마련한 배원식 선생의 업적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한방의학 월간지 ‘醫林(의림)’지의 창간이다. ‘의림’지는 배원식 선생이 한의학중흥의 기치 아래 1954년 창간, 이후 51년간에 걸쳐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한국한의학의 역사와 임상연구 논문 등을 담아낸 한의계 대표적인 학술지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또 한국 한의계에 학술연구단체가 전무함에 안타까움을 느껴 ‘의림’지에서 주최한 학술좌담회를 주도하던 맹화섭, 이종형 선생들과 함께 1956년 현재의 대한한의학회 전신이랄 수 있는 동방의학회를 창립했다. 이후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동방의학회와 의림사를 통한 임상학술좌담회를 지속적으로 개최, 정례화 시키며 학술적 연구가 미미하던 시기에 한방임상교육과 토론문화를 이끌어 내고 특히 당시 한의계에서는 이단으로 여겨지던 권도원 선생의 8체질 강의를 실시하는 등 한의학의 학문적 풍토를 쇄신하는 한편 학술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동양의학회 월례학술집담회 및 허준의학회 세미나 등으로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배원식 선생은 또 1955년 8월 한의계 최초로 전국순회학술대회를 대구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학술대회는 지속적으로 이어져 현재 전국한의학학술대회와 보수교육 등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동양의학회와 허준의학회를 창립, 동양의학회 월례학술집담회에서 임상가의 저명한 학자를 초빙, 강연하고 허준의학회에서는 자신의 임상체험례를 사례별, 처방별로 공개 강의, 한의학의 임상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특히 한국동양의학회는 이후 국제동양의학회에 가입과 함께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의학의 세계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배원식 선생의 소련 방문 및 한의학 국제교류 등을 소개한 구 소련의 매체. ⓒ배원식한의원

일본·대만은 물론 공산권 국가도 학술교류, 한의학의 세계화 초석 놓아

배원식 선생은 ‘의림’지와 같은 해 창간한 일본의 ‘한방의 임상’지와 1955년 처음으로 국제교류를 시작했다. 이 때 선생은 ‘한방의 임상’지 발행인이던 矢數道明 先生과 한일 양국의 한의학 중흥을 위한 도원결의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인연은 국제동양의학회의 근간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또 1961년 4월 일본 경도에서 개최된 제12회 일본동양의학학술대회에 국내 한의계에서는 최초로 초청을 받아 참가했다. 역사적인 일본과의 본격적인 학술교류를 시작한 셈이다.

한의학의 세계화와 관련된 배원식 선생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제3회 국제침구학술대회의 유치를 성사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64년 10월 배원식 선생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다음 해 개최 예정인 제1차 국제침구학회의 대회 조직부장인 목하청도(木下晴都)를 만나 한국 측 한의사를 초청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 이듬해인 1965년 10월 18일 제1회 대회에 권도원, 진태준 등과 함께 초청되어 참가했다.

또 196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차 대회에 최진창, 이정규, 이창빈 3인이 대표로 참가. 차기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한편 배원식 선생은 한·일 양국의 진정한 한방교류를 이끌어내기 위해 양국 한의학자 간의 상호이해와 학문교류를 위한 동양의학심포지엄을 개최, 상호 간의 한방의 수준과 특색을 파악할 는 한편, 이를 통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 발전시키기도 했다.

동양의학심포지엄은 이후 한일한방학술세미나, 한일동양의학토론회 등 명칭의 변화가 있었으나 현재 양국의 2세대들로 소장파인 한국의 김영신, 이종안, 맹원모, 일본의 吉富 誠, 安井廣迪 선생이 주도가 되어 심포지엄을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이후에도 배원식 선생은 일본은 물론 대만과 동남아 지역 각국의 한의학계, 미주 각지와 캐나다 등지의 동양의학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영국 등지의 동양의학계와도 교류를 시작하게 되며 나아가 1983년에는 당시 공산국가였던 중국, 불가리아, 체코, 루마니아, 소련 등의 동양의학계와도 교류를 시작했다. 단순한 해외여행조차 화제가 됐던 시기에 공산국가와 교류를 했던 배원식 선생의 왕성한 활동력과 한의학에 대한 애정이 놀라울 뿐이다.

소련 동양의학계와의 교류활동은 당시 소련 당 기관지 ‘프라우다’지에 기사로 소개가 될 정도로 국내는 물론 소련 내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와 함께 배원식 선생은 국제동양의학회를 창설하고 1976년에 일본동아의학협회 고문,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ICOM) 대회장, 1999년에는 국제동양의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의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국제동양의학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이응세 한약진흥재단 원장은 “해외여행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시기에 일본, 대만은 물론 미수교국이었던 공산권 국가까지 찾아다니며 한의학의 세계화를 추진하신 배원식 선생님의 노력과 한의학에 대한 애정은 지금까지도 후배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 배원식 선생이 대한한의사협회장 시절 개최한 제1회 한방의날 기념식. ⓒ배원식한의원

한의계에 남다른 애정, 한의학 수호에 바친 한 평생

배원식 선생은 한의학과 한의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만큼 일생 또한 한의학 수호를 위해 바쳤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배원식 선생은 대한한의사협회장 시절인 1968년 ‘한방의 날’ 행사에 대한 논의를 시작, 국민의료법공포일인 9월 25일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정부 관계자 및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을 개최했다. 또 ‘한방의 날’을 맞아 무료진료를 실시하는 등 국민들에게 한의학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노력을 경주했다.

선생은 또 허준의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허준의학상은 한의계 저명인사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심사에 의해 우수논문 3편을 선정, 상을 수여함으로써 한의학술진흥 및 학술분위기 제고를 이끌어내며 한의계 연구풍토의 발전에 기여해오고 있다.

배원식 선생은 사회적으로 한의학을 비하하는 이슈거리가 등장할 때마다 그 부당성을 주장하는 일에도 솔선했다. 대표적인 것이 1955년 발생한 뇌염논쟁이다.1955년 9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한의사 박은영이 '뇌염관견(腦炎管見) - 병독소배설(病毒素排泄)로 치유될 수 있다'라는 글에서 한약으로 뇌염을 치료하여 높은 치료율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자 양의사 강성렬은 이에 반박하는 '과학적 입증 없는 한방(부제: 박은영 씨의 '뇌염치유될 수 있다'를 박(駁)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박은영의 주장을 비판했다.

당시 양의의 독선에 분개하면서도 선뜻 나서 반박하는 이가 없던 상황에서 배원식 선생은 1955년 9월 28일 자와 29일 자 ‘동아일보’에 '한의학리상(漢醫學理上)의 뇌염검토(腦炎檢討)'(부제: '박은영 씨 소론(所論)을 부연하면서 강성렬 씨 박문(駁文)에 답함')를 연달아 게재, 강성렬의 한의학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또 1959년 4월 양의 민광식 씨가 ‘경향신문’을 통해 ‘한약이 암을 유발 조장시킨다’는 글을 게재한 것과 관련, ‘연합신문’ 5월 10일자에 학술적인 임상논리로 정연하게 반박, 이후 민 씨 측에서 잘못했다는 사과의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배원식 선생은 결핵에 대한 한·양방간의 논쟁 공방전에 반박 논문 등을 발표, 한방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호감으로 변화시키고 양의의 한방관을 새롭게 하는 등 한의학을 수호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 한국동양의학회는 매년 전국 11개 한의대에서 선발된 한의대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한국동양의학회

장학사업과 사회사업 통해 국민과 함께하는 한의학 실천

남달리 한방교육사업과 후진양성에 힘쓰던 배원식 선생은 1960년 동방장학회를 설립, 장학사업을 실행해왔으며 1998년에는 한국동양의학회장학회를 설립, 매년 전국 11개 한의과대학에서 11명의 우수 학생들을 대학총장의 추천을 받아 선발, 장학금을 수여했다.

장학사업은 비단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해외에서도 진행됐다. 1997년 8월 중국중의연구원에 2억원의 배원식장학기금을 조성, 매년 중국중의연구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연구하는 중국학생 6명과 한국학생 3명을 선정 장학금을 수여했다.

배원식 선생의 장학사업에서 주목할 만 것은 공산권 국가와 공식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인 1983년 고려인 3세 소련 의사로써 당시 불가리아 대통령 주치의로 소피아에 파견 나와 있던 오한도 박사와의 만남을 인연으로 공산권 국가 동양의학계 의사 및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한의학을 소개하고 한의학 수업에 입문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1989년 배원식 선생을 포함한 26명의 임상사절단이 공산국가인 소련을 방문, 현지 의학계와 소련 국민들을 놀라게 했으며 의사 및 학생들에게 강의를 통해 소련의 녹용과 웅담, 사향 등 동식물 약재가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인식시켜 주기도 했다.

이러한 장학사업의 결과 1990년 소련정부의 결정에 의해 한국의 한의과대학 시스템과 동일한 동양의과대학이 모스크바에 설립될 예정이었지만 1991년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사라지게 됐음은 두고 두고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이처럼 한방교육사업과 국적을 가리지 않은 후진양성에 힘쓴 배원식 선생은 한의사로서 얻은 경제적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지난 2002년 11월 진해시 경화동 1145-8번지 224.5m2에 총 공사비 3억7000여만원을 투입, 지상 2층, 연면적 250.5m2 규모의 경로당을 건립 진해시에 기증했다. 배원식 선생의 아호를 따 ‘제광(際光)’으로 명명된 경로당은 1층 할머니방, 2층 할아버지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배원식 선생은 자신이 소장했던 귀중한 한의학 서적들도 국립도서관과 한의과대학 등에 기증하는 등 기부문화를 몸소 실천했다.

1988년 ‘근세한방의학서집성’ 전 116권과 일본 矢數道明 先生이 저술한 ‘한방임상백화’ 6집, ‘동양의학사 기념논문집’ 등 다수를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 한의계를 감동시킨 바 있으며 다시 1992년에는 矢數道明 先生이 발행하는 ‘한방의 임상’지 창간호부터 38년간 속간한 456권을 기증, 한의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 자신이 교수로 제직했던 경희대한의대에도 한의학 희귀 소장본 서적 등을 기증, 한의대 도서관에 선생을 기념하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기도 했다.

2003년 7월에는 평생 소장했던 한방서적 전체를 상지대학교 한의과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의림’지 전권을 비롯한 희귀본의 서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배원식 선생의 각종 자산에 대한 사회 환원은 선생의 사후, 유훈을 받든 후손과 제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2017년 발족한 국가한의임상정보센터에서 한의표준진료지침을 구축할 당시 진료지침 구축에 필요한 서적과 처방 원고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센터장이 배원식 선생의 처방을 게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협조공문을 보내왔고 선생의 가족들과 제자들은 이를 기꺼이 허락, 한의표준진료지침을 구축하는데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한의계의 3대 거목으로 불리는 배원식 선생은 한의학과 한의계에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배원식 선생이 작고한 지 13년이 흐른 지금도 한의계에서 일면식조차 없는, 이제 막 한의사의 길로 접어든 신진 한의사들의 입에서조차 선생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음은 아마도 ‘한의계에 큰 어른이 없다’고 아쉬워하는 회원들이 많은 요즘 배원식 선생이 한의계에 남긴 유산이 너무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배원식한의원의 2대 원장인 이종안 원장은 “한의학에 대한 열정과 후학에 대한 관심, 난치병에 대한 도전 등으로 보아 배원식 선생님은 이 시대의 허준으로 추앙받아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배원식 선생의 13주기를 맞은 지금, 많은 후배 한의사들에게 ‘한의계의 큰 어른’이었던 배원식 선생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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