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신화] 그는 ‘이회창-DJ’ 만나 神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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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화] 그는 ‘이회창-DJ’ 만나 神이 됐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6.26 17:1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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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26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던 박정희
당내 경쟁서 밀린 민정계, 박정희 되살려 돌파구 모색
IMF 외환위기로 YS 평가 하락…‘구국의 영웅’ 된 박정희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군사정권에서조차 뒤안길로 물러나 있던 박정희는 어떻게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시사오늘
군사정권에서조차 뒤안길로 물러나 있던 박정희는 어떻게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시사오늘

‘징검다리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6월 9일.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에 위치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결코 좁다고 할 수 없는 주차장에는 점심때부터 차가 가득했고, 관광버스를 타고 온 단체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주차장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삼삼오오(三三五五) 짝을 지어 이곳저곳을 돌아봤다. 이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박정희 동상이었다. 오른쪽 손에 1964년 국방대학원 졸업식 유시(諭示)를 들고 있는 박정희 동상은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사진 배경이 됐다.

다른 한 편에 위치한 민족중흥관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몰렸다. 특히 아이 손을 잡고 기념관을 찾은 부모들은 안내판 앞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대통령”이라며 ‘박정희 업적’을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박통(박정희 전 대통령)이 잘했으니 못했느니 하는데, 그 사람들이 안 굶어봐서 그래. 몇 날 며칠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민주주의도 박통이 먹고살 만하게 만들어주니까 된 거 아니야? 굶는데 민주주의 생각할 시간이 어딨어?”

-대구에서 온 김모 씨-

그런데 박정희 생가를 꼼꼼히 살펴보면,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違和感)이 느껴진다. ‘시간’ 때문이다. 구미시에 따르면, 박정희 생가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된 것은 1993년, 기념관 건립계획이 발표된 것은 1997년이다.

하지만 10·26 사태가 일어났던 해는 1979년이다.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 뒤에야 기념사업이 시작됐다는 의미다. 더욱이 박정희 사후(死後)에도 전두환·노태우라는 군부정권이 지속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간차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2019년,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박정희는 왜 14년 동안이나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춰야 했을까. 그리고 군부정권 하에서도 ‘뒷방’으로 물러나 있었던 박정희는 어떻게 문민정부에서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밀려난 민정계, 죽은 박정희를 되살리다

6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이곳에서는 탄핵 이후 절판된 박근혜 전 대통령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를 찾아볼 수 있다. 박정희 사후(死後) 분위기를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체험한 박근혜는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반추(反芻)한다.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있는 동안 나라 전체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권력 상층부에 있었지만, 아버지 사후에는 밑바닥까지 경험했다. 수많은 매도 속에 몇 년의 시간을 버티며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박정희에 대한 혹평(酷評)은 문민정부 때까지도 계속됐다. 1993년, 박정희 정권 2인자였던 김종필 당시 민자당(민주자유당) 대표는 5월 16일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서 열린 5·16 민족상 시상식에서 “이 나라의 오늘을 있게 만든 분들의 대표는 故 박정희 대통령이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잘나왔건 못나왔건 그 계승자로 존재하고 오늘의 토양을 만들었다. 우리 후손들이 자유·평등 속에서 여유 있게 생활하게 되는 날, 그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분명히 박 대통령을 만나게 될 것이며 박 대통령의 고마움을 되새기는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러나 문민정부 중반부터, 이런 분위기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발단은 민자당 내 세력 다툼이었다. 알려진 대로, 민자당은 민정당(민주정의당)과 민주당(통일민주당), 공화당(신민주공화당)이 합쳐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다. 이 가운데 민정당과 공화당은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의 후예였고, 민주당은 군부독재와 맞서 싸운 민주화 투사들이 중심이었다. 태생적으로 민자당은 치열한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박정희의 부활은 당내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민정계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시사오늘
박정희의 부활은 당내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민정계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 중론이다. ⓒ시사오늘

결론만 말하면, 승자는 민주계였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정치적 자본을 쌓아온 민정계와 공화계가 그대로 물러설 리 없었다. 이때부터 민정계와 공화계는 ‘박정희 재평가’에 공을 들인다. 이 드라마틱한 움직임은 당시 언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아래는 1993년 10월 27일 <동아일보>가 박정희 14주기 추모식을 보도한 단신 기사 내용이다.

故 박정희 대통령 14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경북 구미시 상모동 고인의 생가에서 상모동 새마을협의회 주최로 김재학 구미시장 등 각급 기관 단체장과 주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993년 10월 27일자 <동아일보> ‘故 박정희 대통령 구미 생가서 추모식’

그로부터 1년 후인 1994년 10월 27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박정희 15주기 추도식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26일 국립묘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도식은 최규하·전두환·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 3명과 구 여권 인사는 물론 구 야권 인사 등 1000여 명이 참석, 역대 추도식 중 최대 규모로 열렸다.
이날 추도식 위원장인 신현확 전 총리는 추도사에서 5·16 당시 장기수였던 자신을 발탁한 것 등을 예로 들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회고를 통해 최근 구 여권 인사들의 소외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듯했다.
공개적인 발언을 거의 하지 않는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신 전 총리에 이어 추도사를 맡아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민족사에 남기신 그분의 족적은 더욱 뚜렷하게 부각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추모했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는 미리 준비한 인사말 대신 즉석 인사말을 통해 “가신 어른이 남겨 놓으신 기반을 훼손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한 후 “우리나라가 아직 갈길이 멀어 방황하고 있다. 많은 얘기 드리고픈 게 있지만 더 하지 않겠다. 이심전심으로 같이 느끼실 것”이라고 여운을 남기며 말을 맺었다.
이날 추도식에 김영삼 대통령과 추도위원회의 고문직을 수락한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은 조화를 보냈다.
유족으로는 외아들 지만 씨가 히로뽕 상습복용으로 구속돼 공주감호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고, 큰딸 근혜 씨는 지난 90년 육영재단이사장을 그만둔 뒤 칩거 중이어서 현재 육영재단이사장인 서영 씨(근영에서 개명)만 나왔다.
이날 추도식에는 채문식·박준규·이만섭 전 국회의장, 민복기·김용철·김덕주 전 대법원장, 남덕우·박충훈·김상협·황인성 전 국무총리와 민관식·김치열·최광수·김계원·백선엽·최재구·김기춘·김용식·이태섭·오유방·노재현·고병우·유혁인·장예준·유재흥·서종철·홍성철 씨 등 구 여권인사, 정석모·권익현·장영철·박명근·구자춘·박준병·김길홍·김해석·이택석·이환의·변정일·조용직·김용환 의원 등 현역 의원, 이철승·유치송·고흥문 씨 등 구 야권인사와 정주영·조중훈 씨 등 경제계 인사, 한경직 목사 등이 참석했다.
1994년 10월 27일자 <동아일보> ‘전 대통령 3명 등 1000여 명 참석…박정희 전 대통령 15주기 추도식 이모저모’

본격적인 ‘박정희 부활 프로젝트’는 JP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시스
본격적인 ‘박정희 부활 프로젝트’는 JP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시스

여기에 JP가 탈당 후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박정희의 복권(復權) 작업에 속도가 붙는다. 자민련은 민자당 내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공화계와 민정계 일부 인사들이 주축이 된 정당이었다. 소위 말하는 ‘구 여권’ 중심의 연합체였던 셈이다. 구 여권 그룹의 지역 기반이 TK였던 점을 감안하면, 자민련이 TK를 향해 손을 뻗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더욱이 ‘박정희의 고향’ TK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잔존(殘存)해 온 지역이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199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박정희 생가를 방문한 뒤 ‘경제대국 건설’을 약속했던 것은 TK 정서가 어떠했는지를 방증하는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와 고락(苦樂)을 함께 했던 구 여권 인사들이 자민련의 옷을 입고 러브콜을 보내자,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소외감을 느끼던 TK는 곧바로 반응한다.

대구·경북의 선거전은 뚜렷한 승자가 없이 마무리됐다. 전체 32개 선거구를 신한국당과 자민련, 무소속의 3개 정파가 대체로 4대3대3의 비율로 분점했다.
의석수로 보면 신한국당 14석, 자민련 9석, 무소속 8석, 민주당 1석이다. 그러나 대구에선 신한국당의 완패였다. 11개 선거구 중 신한국당 후보가 당선된 곳은 2곳(강재섭·김석원)에 불과했다.
반면 자민련은 무려 8개 선거구에서 승리를 낚아 대구에서의 1당을 차지했다. 무소속은 3석을 얻었다. (후략)
1996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 ‘대구-경북 신한국 자민련 무소속 분점양상’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박정희 향수’는 TK에 국한됐다. 제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얻은 의석 대부분이 TK와 대전·충청에 집중됐다는 것이 그 증거다. 6월 18일 <시사오늘>과 만난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제15대 총선은 새 인물을 영입해서 당을 일신한 개혁보수 정당 신한국당과 구 보수인 자민련이 맞부딪친 선거였는데, 결과적으로 자민련 바람은 TK와 충청권에 멈춰 섰다”며 “박정희에 대한 향수보다는 새로운 인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더 강했다고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회창을 만나고, 박정희는 神이 되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신화’가 본격적으로 집필된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시사오늘>은 6월 20일 ‘김영삼-상도동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서울 상도동을 찾았다. 이 행사에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함께 민주화 투쟁 전선(前線)에서 활약하고, 문민정부에서 국정에 참여한 원로(元老)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곳에서 <시사오늘>은 <거산에 오르면 큰 길이 보인다> 저자이자,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을 지낸 최양부 전 수석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찌됐건 우리나라 경제를 이렇게까지 발전시켰고, 끝이 비극적이었으니까 동정 여론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처럼 이렇게 떠받드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재평가된 건 이회창 덕분이라고 봐야 합니다. 당시 이회창은 TK에서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했고, 그래서 박근혜를 영입했습니다. 박근혜가 정치권에 들어오면서부터 박정희 재평가가 시작됐다고 봐야죠.”

민정계와 손잡은 이회창은 TK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박정희 부활 프로젝트’에 가담했다. ⓒ뉴시스
민정계와 손잡은 이회창은 TK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박정희 부활 프로젝트’에 가담했다. ⓒ뉴시스

이회창. 최양부의 말에 따르면, 그는 박정희를 신(神)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대쪽 총리’로 이름이 높았던 이회창 전 국무총리는 일찌감치 유력 대권 주자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회창이 YS의 동지였던 최형우·김덕룡 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당내 세력이 필요했다.

이때 이회창에게 손을 내민 것이 민정계였다. 민주계에게 당권을 빼앗긴 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민정계는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과 결합해 ‘대 역전극’을 꿈꾼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민정계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후계(後繼)라고 할 수 있는 세력. 이로써 박정희는 이회창이라는 날개를 달고 부활의 날개를 펴게 된다.

신한국당 김덕룡 의원이 이회창 대표 지지세력을 ‘복고세력’이라고 연일 비난하는 데 이어 이수성 고문도 28일 이 대표와 김윤환 고문의 연대를 ‘수구연합’이라고 공격하며 가세했다. 이 고문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지향적인 수구연합을 주도하는 사람은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고 있으며 그 사람에게 의지해 집권하겠다는 ‘멋대로’ 정치인이 있다”며 이 대표와 김 고문을 한 묶음으로 공격했다.
이 고문의 발언은 지난 23일부터 “이번 경선은 ‘이회창’ 간판을 달고 있는 복고세력 대 신정치 주체세력의 대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온 김 의원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중략)
그러나 내심으로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기색이다. 실제로 정발협 내에서는 이 대표가 처음부터 김 고문을 중심으로 한 대구·경북지역의 민정계와 연대한 뒤 민정계 중심의 나라를 위한 모임(나라회)까지 사실상 흡수하자 ‘보수 회귀’로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이 대표가 집권할 경우 이 대표의 성향과는 별도로 주변의 구 여권 인사들이 ‘개혁의 계승’에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정발협 내에서 나온다. (후략)
1997년 6월 29일자 <동아일보> ‘여, 이번엔 보혁 논쟁’

故 유성환 전 의원은 2010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민정계의 ‘박정희 신화화 작업’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호랑이를 잡으러 간다며 3당 합당을 감행해 권력을 잡은 YS는 하나회를 숙청하는 등 군정을 뿌리 뽑고 당을 개혁세력으로 채워 넣었다. 하지만 199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은 당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구 민정당 세력들과 손을 잡았다. 구 민정당은 군사독재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박정희를 신격화한 것이다.
박정희 신격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TK 민심도 달라졌다. 1985년 선거에서 내가 대구 중·서구에 출마했을 당시, 손명순(YS 부인) 여사 지원 유세에 힘입어 당선됐을 정도로 YS나 민주 세력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곳이 TK다. 그런데 1997년 이회창과 민정계에 의해 ‘경제를 살린 대통령’이라는 박정희 신화가 등장하면서 TK 정서가 달라졌다.”

이런 흐름에 순풍(順風)으로 작용한 것이 IMF 외환위기였다. IMF 외환위기는 민정계가 ‘박정희 신화화 작업’을 벌이던 중에 찾아온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다. 민정계에 의해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박정희는 IMF 외환위기가 찾아오자 ‘구국(救國)의 영웅’ 지위로까지 격상된다. 그 결과, 이회창은 YS-민주계-PK(부산·경남)에 맞설 수 있는 박정희-민정계-TK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 시대의 구원자인가. 박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징후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말 고려대생들이 ‘복제하고 싶은 인물’ 설문조사에서 박 대통령을 3위로 꼽은 데 이어, 주부들은 1위로 뽑았다. ‘사랑의 전화’가 발행하는 <세상 사람들> 4월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60대 주부 115명 중 35명이 ‘복제를 원하는 사람’으로 박 대통령을 꼽았다.
박 대통령에 대한 추모열도 높아지고 있다. 경북 구미시 모동 박 대통령 생가의 내방객은 하루 평균 300명 선. 생가보존회장 김재학 씨는 ‘초등학생에서 공무원·촌로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이 몰려든다’고 말한다.
‘박정희 신드롬’이라 불릴 만한 이 같은 현상은 최근 경제 불황에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가난과 절망에 빠진 한 민족을 (중략) 번영으로 이끌었다(이인화 씨·소설 영원한 제국의 저자)’, ‘우리들의 가난을 풀어주신 어른(생가 방명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략)
‘군사쿠데타의 원조’, ‘개발독재의 원흉’이라 평가되던 박 대통령이 경제난국을 기회로 부활하는 형국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997년 4월 12일 <경향신문> ‘불황 타고 박 전 대통령 부활’

박정희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DJ는 오히려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김대중평화센터
박정희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DJ는 오히려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김대중평화센터

역사의 아이러니…“DJ가 박정희를 살렸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보는 ‘박정희 신드롬’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오래 전부터 대북관에 의심을 받던 DJ는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박정희 재평가에 힘을 쏟았다. 1992년 대선에서 DJ가 박정희 묘지를 참배한 것이나, 1997년 대선에서 박정희 생가를 방문해 “김복동·박철언 자민련 부총재와 이정무 총무 등 이 지역 출신 정치인들과 손잡고 박 전 대통령이 이룬 경제 기적을 되살리겠다”며 ‘박정희 향수’ 자극에 나선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집권 후에도 DJ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정부 예산 지원을 약속하는 등 박정희와의 거리 좁히기에 골몰했다. DJ 입장에서는 이미지 재정립, 영남 민심 수습 등을 위한 정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박정희를 신(神)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다. 상도동계 핵심 인사이자 YS의 정치적 동지였던 故 노병구 민주동지회장이 2016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증언을 들어보자.

“IMF가 닥치면서 경제를 살린 대통령이라는 이회창과 민정계의 프레임이 완벽히 맞아떨어져 박정희 신격화가 이뤄졌다. 여기에 3당 합당에서 영감을 얻어 집권하려던 DJ가 군사 세력과의 연합(DJP 연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또 한 번 신격화됐다.”

노병구는 저서 <김영삼과 박정희>에도 이렇게 썼다.

“IMF는 군사독재 32년 동안 저질러진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만든 한국병의 표출인데, 엉뚱하게도 모든 죄를 YS에게 뒤집어 씌웠고 정작 책임을 물어야 하는 군사독재 세력에게는 경제를 살린 대통령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줬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1999년 <경향신문> 기사 일부다.

13일 대구·경북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의 화두는 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화해였다. 김 대통령은 업무보고와 지역인사와의 간담회, 기자회견 등에서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이례적으로 긍정 평가하면서 화해를 통한 지역 화합에 초점을 맞췄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강한 반면 현 정부에 대해 탐탁지 않은 정서가 남아 있는 지역 민심을 되돌리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는 행보였다.
김 대통령은 경북도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해 정부예산을 적극 직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저녁에는 신현확 전 총리, 김준성 전 경제부총리 등 지역 인사 44명과 만찬을 함께 하며 박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정을 전했다. (후략)
1999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 ‘박정희와 화해 TK 껴안기’

부활에 성공한 박정희는 지금도 정치권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진은 박정희 생가에 있는 박정희 동상. ⓒ시사오늘 정진호 기자
부활에 성공한 박정희는 지금도 정치권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진은 박정희 생가에 있는 박정희 동상. ⓒ시사오늘 정진호 기자

이회창과 DJ의 정치적 의도로 재탄생한 박정희는 현재와 같은 정치 지형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YS에 의해 군부독재 세력이 축출되고 ‘신(新)보수정당’으로 자리매김했던 신한국당은 박정희 신격화와 함께 구(舊)보수의 보금자리가 됐다. 구보수의 득세는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진보정당 대 독재를 옹호하는 보수정당 구도를 형성시켰다. 박정희 재평가에 대한 한 노정객(老政客)의 말이다.

“박정희 재평가는 단기적으로 보수정당에게 정권을 가져다줬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보수정당이 비민주적 세력으로 인식되게 만들었다. DJ가 박정희 재평가 작업에 큰 몫을 했던 것이 이걸 염두에 뒀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진보정당이 도덕적 정치적 우위를 가져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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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2019-07-01 10:20:41
되게재밌음 한국 정치의 판도와 박정희가 어떤이유로 되살아 났는지 명쾌하게볼수있어 좋네요

.... 2019-06-30 20:37:25
저기...이런 건 왜 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