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통치는 다르다… YS는 통합의 리더십”
“YS, 지역 패권 정당 리더로 모는 것 옳지 않아”
“3당 합당 없으면 군정 종식도 정권교체도 없어”
“권력욕 둘 다 같지만, 통 큰 양보한 것은 YS…”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故김영삼(YS) 전 대통령 서거 6주기를 앞두고 있다. <시사오늘>은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군정을 끝내고 문민정부를 열기까지 민주주의 꽃을 정착시킨 그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이번엔 지역주의 정치를 해왔다는 오해와 진실에 주목해 봤다. 과연 맞을까. 이달 4일 김형준 명지대 교수를 만났다. YS 재조명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만남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 사무실에서 가졌다.
1. 지역주의 정치인가?
- 지난번 ‘선거와 통치는 다르다’고 했잖습니까. 인상 깊었습니다.
“아, 네.”
김 교수는 지난 7월 여의도에서 ‘7인의 대통령’ 세미나 중 YS 세션을 맡았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전략이 있다. ‘우리가 남인가.’ 14대 대선. YS는 낙승했다. 190만 표차였다. 영남과 수도권 등 거의 전 지역에서 우세했다.
호남에서만 압도적 열세였다. 결과를 두고 ‘비호남 vs 호남’이라는 지역 대립이 심화된 선거였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선거는 선거일 뿐 통치 때는 통합 행보에 나섰다. 그것을 평가하며 나온 말이다. 지역주의에 대한 오해와 진실부터 물어봤다.
-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지역주의 안에 가두더라고요.
“지역주의라는 게 대한민국의 굉장히 오래된 병폐로 얘기돼왔잖아요. 1987년도 대선 때 3김이 출마하면서 일종의 패권 정당 체제처럼 된 측면은 있죠.”
김 교수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해 대선, 양김은 분열했다. 지역할거가 뚜렷해진 채 치러졌다. TK(대구·경북)는 민정당의 노태우, PK(부산·경남)는 통일민주당의 YS, 호남은 평화민주당의 김대중(DJ), 충청은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JP)로 나뉘었다.
- 이듬해 13대 총선에서는 지역주의가 더 뚜렷해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됐죠. 야당 정당의 합이 집권당인 민정당보다 높았잖아요. 자연스럽게 각 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들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어요. 현상적으로는 지역주의 정당 체제가 고착된 면이 있고요.”
김 교수는 거듭 지적했다.
- YS 경우는 말이죠. 지역주의 안으로 끌려 들어간 것 같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만.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YS를 지나치게 지역 패권 정당 체제의 원인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한 평가는 아니라고 봐요.”
뒤이어,
“엄밀하게 얘기하면 지역주의는 박정희와 DJ가 붙었던 1971년 대선을 기원으로 봐야지요. 그때를 기점으로 영남이 모든 정치권력의 중심이 됐다는 게 통설이잖아요.”
박정희와 DJ가 맞붙은 7대 대선에서였다. 어떻게 지역감정이 조장됐는지 관련 기사의 대목을 살펴본다.
“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측은 선거의 달인으로 불리던 ‘엄창록’을 캠프로 끌어들였다. 엄창록은 ‘김대중에게 승리하려면 지역감정을 자극하라’는 메시지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에게 전달했다. 4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영남지역에 대대적인 전단지가 뿌려졌다. 내용은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였다. 이런 괴문서가 나돌자 영남인들의 표심은 ‘박정희’를 향했다.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약 100만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영남에서 박정희는 김대중보다 약 170만 표를 더 받았다. 반면 김대중은 호남에서 박정희보다 약 70만 표가 앞섰다. 결국, 표차를 계산해 보면 박정희는 지역감정을 자극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다.”
- 2010년 <시사오늘> 기사 ‘지역주의의 시작과 끝은’ 중-
2. 호남 포위론
-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3김 정치를 망국적 지역 병폐의 주범으로 묶어두려는 평가가 더 일반화된 듯합니다.
“하지만 아니죠.”
김 교수는 동의할 수 없다며 설명에 들어갔다.
“87년 이후로 4당 체제가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큰 틀에서 보면 일종의 단편적인 거예요. 민주화운동에 결집했던 응집력이 점차 사라지면서 각자의 집권 기반을 마련하며 나온 거잖아요. 이걸 마치 지역주의를 활용해서 집권하려 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라고 볼 수 없어요.”
- 1990년 3당 합당(노태우 민정당+YS 통일민주당+ JP 공화당)으로 호남을 포위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97년 DJ와 JP 연대는 영남을 포위한 거 아닌가요. 똑같은 거잖아요.”
- 그렇네요.
“YS가 세운 목적을 봐야죠. 어떻게든 문민정부로 전환 시키려는 것이 원래 목표였습니다. 과정 속 하나의 부산물로서 호남이 배제된 것이지, 제외부터 하고 나서 정권을 잡았다? 정확한 해석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결과론적으로야 호남이 배제됐지만, 합당의 배경만 보면 군부 통치를 종식 시키려는 관점에서 봐야죠.”
- 그렇지만 3당 합당 결과에 더 무게를 두는 시각이 많잖아요.
“아니 그러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한 것은 잘못된 거 아니에요.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거잖아요. 역성혁명이라고 하더라도 600년간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 가려고 한 것을 부정할 수 있나요.”
- 3당 합당이 야합이라는 평가는요.
“16대 대선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를 보세요. 노 후보는 반(反)기업을 얘기하고, 정 후보는 기업을 대표하는 자였어요. 어떻게 두 사람이 손을 잡을 수 있나요.”
그러면서 김 교수는 말을 이어갔다.
“3당 합당도 마찬가지죠. 단순하게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일종의 야합을 한 거라고 얘기한다면 다른 연대들도 나와서는 안 되는 거예요.”
야합이라는 말이 YS를 폄하하는 뜻에서 쓰였다는 점을 꼬집는 듯했다.
“물론 민주화와 반민주화 세력이 결합한 거니 박수받을 일은 아니죠. 다만, 더 긍정적인 결과가 많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 하잖아요.”
- 그 관점에서 본다면요.
“다차원적으로 봐야죠.”
침을 삼켰다.
“YS는 3당 합당을 통해 문민정부를 열고 과거의 잘못된 부분들에 대해 종식하는 여러 조치를 했어요.”
대표적인 게 하나회 청산이다.
“다시는 군인들이 정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잖아요. 친일 잔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로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일,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피해자 보상에 나선 것도 정권을 잡고서 최초로 한 일이었죠.”
- 3당 합당을 안 했으면 군정 종식이 안 됐다고 보는 건가요.
“안됐다고 봅니다.”
잘라 말했다.
-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다시 분열됐을 거예요.”
- 분열이라면?
“지역 정치로 돌아가는 거지요. 항상 대치돼 있기에, 87 대선을 보듯 30%대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노태우가 36.6%, YS가 28%, DJ가 27%, JP가 8.1% 인가했을 거예요. 이 구조가 쉽게 안 깨지게 되는 거죠. 그럼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군부가 나타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 때문에 YS가 구국의 결단을 내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는 거죠.”
- 혹자는 노태우가 DJ와 합당을 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도 하잖아요.
“노태우 최측근인 박철언은 김원기 씨와 같이 실제 그런 시도를 했었어요. 첫 번째는 영호남이라고 하는 통합에 대한 명분으로, 두 번째는 권력을 잡고 난 뒤 헤어져도 깨끗하게 헤어질 수 있다고 본 거였어요. 실은 굉장히 전략적인 건데도 노 대통령이 안 받아준 거예요.”
내부의 반발 때문이었다.
“민정당에서도 어떻게 DJ랑 같이 할 수 있냐. 그러면 차기 대권은 YS한테 갈 거다. 결국, YS가 이길 거다. 종국엔 자기들은 완전히 사라질 거다. 여하튼 나중에는 3당 합당으로, 서로들 전략적 판단을 한 거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어떻게 됐냐는 거죠. 이런 것들을 간과한 상태에서 몇 가지 결과만 갖고 해석하는 것은 반쪽짜리 평가라고밖에 할 수 없지요.”
3. 권력욕과 대통령병?
이번엔 이 질문을 던졌다.
- 3당 합당에 앞서 말이죠. YS는 1988년 3월 상도동계의 반대에도, DJ 평민당에서 요구한 소선거구제를 전격 수용했잖아요. 그러면서까지 야권 통합에 나선 거지요. 결국, 호남과 합치려 한 건데, 마지막 도장만 찍으면 되는 서교호텔에서 이를 무산시킨 건 동교동계였고요.
“그렇죠.”
- 나중에는 중평유보(DJ가 YS와의 당초 합의를 깨고, 노태우 정부의 중간평가 실시를 유보해 YS와 틀어진 일) 이것이 결정적 원인이 돼 3당 합당으로 이어진 거고 말입니다. 결과만 놓고 호남 포위라고 비판받는 건 과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평가를 할 때는 좀 더 균형 잡히고 포괄적으로 봐야 하는 거예요. 단순히 3당 합당은 야합이고, 호남을 배제하는 것으로 갔다고 하는 건 큰 그림을 못 보고 얘기하는 것과 같아요. 정치적인 목표를 설정해 놓고 성취되는 과정에서 여러 전략이 있을 수 있는 건데 한 측면만 보고 평가하기 어렵죠.”
- 그렇다면, DJ는 왜 자꾸 분열의 정치를 하려 한 걸까요.
“무슨 말이죠?”
- YS와 결합하기보다 계속 독자노선을 하려 했잖아요.
“그건 말이죠.”
단적으로 87년 대선을 들 수 있다. 통일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던 시절, DJ는 미창당 지구당 요구를 받아들여 양보한 YS와의 경선 합의를 깨고 4자 필승론을 내세워 딴살림(평민당)을 차려 나갔다. 영남표를 노태우와 YS가 양분하고, 충청을 JP가 독식하면 호남과 서울·수도권의 지지를 받는 본인이 대통령에 된다는 논리였다.
“큰 틀에서 보면, 정말 군부 종식을 생각했다면, 당연히 DJ는 YS와 후보 단일화를 했었어야죠.”
김 교수도 아쉬운 모습이었다. “DJ는 왜 그랬을까요.” 그는 고도의 전략적 판단이 깔려있다고 봤다.
- 어떤 셈법인가요.
“1985년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2대 총선을 통해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켰잖습니까. 87년 5월에는 통일민주당을 만들어요. YS와 DJ가 정확하게 반반씩 가져갔지요. 이후 87년도 6월항쟁 있고, 그해 10월 결국은 당이 갈라졌지만 말이에요.”
- 그러니까 왜냐는 거죠.
“DJ로서는 이렇게 생각을 한 것이죠. ‘만약에 87년 대통령에 YS가 된다면, 내가 다음에 될 수 있을까’를 본 거죠. 자기가 나이도 더 많은데 보장이 없는 거예요.”
그는 정대철의 얘기를 들어 1920년대 생인 DJ와 YS는 세 살 차이가 나는 게 정설이라고 했다.
“DJ가 볼 때는, YS보다 노태우가 대통령 되는 게 정치를 할 때 힘이 더 생길 거라고 보지 않았을까요.”
- 그럴까요.
“만약 그렇지 않고, 통일민주당에 계속 남은 상태에서 YS가 대통령이 됐다면, 그 당은 다 상도동계 당이 되는 거잖아요. 특히 동교동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후농 김상현도 YS와 손을 잡았고 말이에요.”
YS와의 후보 단일화 약속을 깬 DJ에 명분이 없다고 본 후농은 평민당으로 가지 않고 통일민주당에 남았다.
“DJ로서는 여러모로 불안감들이 있었을 테죠. 독자적 생존전략으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 근데 4자 필승론 자체가 너무 지역주의에 기댔던 거 아닌가요.
“그렇죠. 아이러니하게도 호남이라고 하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니까요. 근데 그건 YS와 노태우도 마찬가지고요.”
- 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YS가 DJ 요구인 소선거구제를 연결고리로 합당하자고 합의했던 것들이 있잖아요.
“YS는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 네?
“88년 13대 총선을 거쳐 통일민주당이 제2야당으로 전락했잖아요. 그때 YS가 지역구를 나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지역(부산 서구)에 매몰되다 보니,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으니까요. 반면에 DJ는 평민당 전국구 11번을 받고, 전국적 선거를 치를 수 있었지요.”
- 후회될 일이었겠네요.
“YS 패착이었죠. 그의 생각에서는 87년 대선 때 자기가 DJ보다 득표를 많이 받았으니까 제1야당이 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거예요. 하지만 서울에 호남 분들이 워낙 많은 걸 간과한 거죠.”
YS 입장에서는, 소선거구제를 고리로 총선 전 합당을 추진한 일부터 합당이 무산된 후 치른 선거에서 전략 판단으로 제2야당으로 추락한 것은 뼈아플 수 있는 대목이다.
- 궁금한 것은 이건데요, 그럼 그때도 DJ 속마음은 전혀 합당할 생각이 없었다고 봐야 할까요.
“역시나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서였겠죠.”
수긍도 부정도 안 했다.
- 당시 군정 종식에 대한 열망이 어마어마한데, 이를 저버린 듯한 DJ 태도가 비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정치를 규범적 측면에서만 볼 수 있나요.”
반문을 제기했다.
“YS는 비겁한 면모가 없을까요. 그런 관점으로 보지 말고, 미래 지향적으로 평가해야죠.”
- 반대로 YS가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고 DJ에 양보했으면 되지 않았겠느냐는 시각도 있더라고요.
“YS가 양보했으면 오히려 더 상식에 어긋나는 거 아닐까요.”
정당정치의 속성을 말하는 듯했다.
- YS 역시 군정 종식 의지보다 권력욕이 더 높았다는 비판이 있어요. 양김 모두 대통령병 비난이 있었고 말이죠.
“권력욕이 없었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어요. YS, DJ 모두 마찬가지죠. 그렇지만 통 큰 양보를 했고, 또 할 수 있는 사람은 YS였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권력욕이야 둘 다 똑같지만, 단일화 국면에서의 통 큰 정치는 YS가 돋보였다는 평가다.
“큰 틀에서 보면 두 지도자 모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끌어올린 거목이지요. 그렇지만, 대한민국 운이 참 좋았던 게 DJ보다 YS가 먼저 대통령을 했다는 거예요.”
- 그건 왜죠.
“만약 DJ가 먼저 했으면 군부가 가만히 있었겠어요? 어떤 걸 할지 몰랐을 테니까요.”
- 풍문 상 떠돌았던 기억은 납니다.
“전두환이가 뭘 못 하겠어요. 광주학살까지 했던 자인데. (민정당으로부터 이념적 공격을 받던) DJ로 정권이 넘어갔다? 두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YS 가 문민정부를 통해 완충적 역할을 했으니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고 봐요.”
- 그랬을까요.
“네.”
단언했다.
“그랬으니 DJ가 YS 다음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거예요. YS가 DJ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중지시킨 것도 굉장한 큰 결단을 한 거였어요. 어찌 보면, 보이지 않게 40년 동안 민주화 세력들이 동고동락했던 것을 보여준 거죠.”
- 상도동계, 동교동계 모두 서로들 ‘깐부’라며 챙겨줬던 일화도 많지요.
“그렇지요. DJ 역시 대통령 되고 나서 YS에 대한 공격을 거의 안 했잖아요.”
4. 민주주의 초석과 통치 철학
어느덧 수평적 정권교체를 무려 네 번 이룬 나라가 됐다.
“전무후무한 일이죠.”
- 대한민국도 저력이 있네요.
“미국의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그런 말을 했어요. 어떠한 나라도 수평적으로 정권교체가 두 번 되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가 된다.”
한 템포 쉬고,
“초석을 누가 만들었느냐.”
김 교수가 환기했다.
“나는 100퍼센트 YS가 만들었다고 봐요. 3당 합당이라는 엄청난 비난을 받음에도, 그것을 통해 틀을 마련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이 정도의 정치적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거 아니겠어요. 결국은 YS가 우리한테 준 가장 큰 것이 뭐냐. 행동하는 용기에요. 신군부에 맞서 23일간의 단식 투쟁을 했다든지….”
‘민주화 대장정을 완성한 주역은 YS.’
평소 김 교수의 지론이 묻어났다.
“그나마 서거 후 재조명을 받고 있어 다행이에요.”
뭔가 생각났는지,
“처음엔 다들 깜짝 놀랐잖아요.”
- 뭘 말인가요.
“YS 업적에 관해서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도 놀라웠지만, 문민정부 재임 시절 금융실명제, 초고속 정보통신 기반의 세계화 추진, OECD 가입, 공직자 재산 공개 법제화 등도 재발견됐다.
“집권 후반기 IMF가 터져서 그렇지, 전에는 90% 넘는 역대 최고 지지율을 기록했잖아요. 통찰력이 대단한 분이었어요.”
그러면서 김 교수는 되물었다.
“YS가 국민한테 사랑받은 이유가 뭔지 알아요?”
- 뭔가요.
“‘국민을 이긴 정부는 없다.’”
자주 한 말이었다고 한다.
“국민과 가장 많이 소통한 대통령이 YS였어요. 선거 때 국민 눈높이에 안 맞는 사람이 등용되면 바로 경질해버렸잖아요.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즉각 파면시켰어요.”
역대 가장 많이 사과한 대통령도 YS였다.
“지금껏 그런 대통령이 있나요. 전 정부나 현재나 사과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실패한 대통령이 되는 거예요.”
자연스레 YS 통치 철학으로 옮겨갔다.
- YS가 반독재 투쟁을 위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 당시 동교동계와 50대 50으로 지분을 나누려 했고, 미국에 가서 JP까지 설득해 끌어들이려 했다고 하더라고요.
“자주 뵈었지만, 몇 가지 철학이 있어요. 첫 번째, 권력은 나눠야 한다는 거였어요. 2008년도 한승수 국무총리가 지명되고 나서 막 공천 파동이 있었잖아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
이명박(MB) 정부 초 친박(박근혜) 공천 학살 논란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때 상도동을 갔는데 한승수 총리 지명자가 인사를 하러 왔었어요. YS가 그 얘길 하더라고. 내가 만든 정당(신한민주당)인데도 나는 50% 공천권을 DJ한테 줬다. 그러면서 MB가 40%는 박근혜한테 줘야 한다고 일갈하더라고요.”
그래야 당이 온전하다는 얘기였다.
“혼자 다 해 먹으려고 하면 되겠냐.”
그는 YS 말을 따라 했다. YS가 한 총리 지명자를 통해 MB에 전한 거였다.
“두 번째는 뭐냐면, YS는 동지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며 같이 정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 두 개가 굉장히 중요하게 와닿았어요.”
YS가 비서실장 DR(김덕룡)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일화도 보태졌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이 굉장히 치열했잖아요.”
- 네. 그랬죠.
“DR이 박근혜 쪽에 있다가, 막판에 MB 손을 들어줬어요. 접전 대결 속 DR이 갖고 있던 호남표가 MB 쪽으로 넘어가면서, 이긴 거란 말이죠.”
기여도 면에서는 결정타가 됐다는 분석이었다.
“그런데 MB가 나중에 DR 공천을 안 준 거예요.”
- 아, 그랬죠.
“거기서 YS가 굉장히 분노하더라고. 정치적 신의도 없이 장사꾼처럼 한다고 말이죠.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냉대하면 되느냐. 펄쩍 뛰었죠.”
YS의 동지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치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머리로 하는 게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것, 권력은 누리는 게 아니라 봉사하는 것. 이 세 가지를 YS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체험한 것 같아요.”
5. 민추협 정신으로
인터뷰 후반부.
YS에 비춰 김 교수가 볼 때 현 정부는 아쉬운 면모가 많은 듯했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잘못은 선거를 치르듯 통치를 한다는 거예요. 선거는 쪼개기 전략이잖아요. 한 표라도 더 많이 얻으면 되는 거니까. 통합이 필요 없어요. 하지만 대통령이 되면 그때부터는 통합으로 가야 해요.”
이와 달리 현 정부는 편 가르기만 내내 했다는 작심 비판이었다.
“YS는 통치하면서 전·노 구속 등을 통해 반대 진영을 끌어안았잖아요. DJ도 보면, 대통령 임기 초기, JP 자민련에 총리와 장관 임명권을 줬어요. 그게 뭐냐면 더불어 가자는 거잖아요.”
- 역으로 문 대통령 지지율이 30~40% 콘크리트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은 그런 내 편 정치 때문 아닐까요.
“실은 허황된 거예요.”
- 그런가요.
“정치로 볼 때, 9급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9단이라고 하는 상황인 거죠.”
인터뷰를 마칠 때가 왔다.
“YS와 DJ를 다시 읽어라”
그가 던진 화두였다.
차기 대선이 4개월 남짓 남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국민의힘은 윤석열, 국민의당은 안철수, 정의당은 심상정, (가칭)새로운물결에는 김동연 후보 등이 나왔다.
- 끝으로 조언 좀 해주죠.
“YS와 DJ를 다시 읽어라”
반복해 말했다.
“민추협 정신을 복원할 수 있느냐.”
1984년 전두환 독재에 저항한 범정치 결사체와 같은 통 큰 그릇. 한마디로 통합의 정신이었다.
“이게 우리 정치의 가장 필요한 점이라고 봐요. 민추협 그때는 YS와 DJ가 같이 했거든요. 민주화 투쟁을 함께 했잖아요. 이후로 또 갈라졌지만, 지금 우리한테 너무나 절실한 통치 철학입니다.”
안타까운 듯,
“이렇게 나라가 분열적으로 간 적이 있나요.”
김형준 교수(1957년생)는 아이오와대 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한국선거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치개혁위원회 위원,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 등을 맡았다. 명지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p.s.
못다 한 질문.
- 통일민주당 시절, 노무현이 부산 동부 후보로 나왔을 때 YS가 전폭적으로 지지했잖아요. 그런데 3당 합당 후 민자당 소속이 돼 허삼수가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니까, 충직한 군인이었다고 또 지원 유세했고 말이죠, 이걸 가지고, 말을 바꿨다고 공격하더라고요. 그런데 과연 정당 민주주의에서 가능한 일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그 말이 맞지만, 당시 YS는 민자당 대표였어요. 정당 민주주의에 관점에서는 자기 정당 사람이니까 지원해주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웃음).”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