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갈이의 배신… “사람은 절반이 바뀌는데 정치는 실종돼”
물갈이의 함정… “거수기로 전락하는 물고기들”
물갈이의 목적을 찾아서… “물고기에게 자유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지난 11월 기자와 만난 한 중진 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관례처럼 떠오른 ‘물갈이론(인적 쇄신론)’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물갈이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세계 정치사에서 우리나라만큼 ‘물갈이론’이 자주 등장하는 나라가 없어요. 매번 선거마다 용퇴론, 물갈이론 외치잖아요. 정작 한국 정치 물갈이 비율(초선의원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최근 5번의 총선 물갈이율 평균을 내봤더니, 48%로 절반 수준이더라고요. 문제는 이렇게 물갈이를 했는데 정치가 더 좋아졌냐는 거죠. 오히려 더 갑갑해진 것 아니에요?”
물론 이는 정치신인에게 제 자리를 뺏길까 두려워하는 탐욕에서 비롯된 발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정치권 물갈이는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언론 또한 각 정당의 물갈이 비율을 경쟁적으로 비교해왔다. 어느 당은 50%, 그에 맞선 당은 60%, 경마 중계하듯 숫자로 환산해 끊임없이 정당별 순위를 매겼다. 물갈이를 많이 할수록 당연히 정치개혁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간주해온 것이다.
물갈이 신화의 탄생… “바꿔야 이긴다”
87년 민주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의 초선의원 비율은 평균 50%로 상당히 높은 편을 자랑해 왔다. 가장 낮은 16대 국회가 40.7%, 가장 높은 17대 국회는 62.9%에 달했다. 반면 우리나라 정치제도 형성에 영향을 준 미국의 경우, 역대 총선에서 하원 의원의 약 5~9%만 교체되며, 재선 성공률은 90%에 달한다.
한국 국회는 4년마다 절반의 인원이 교체됐다. 정치권의 세대교체는 ‘시대적 요구’ 때문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론 정당이 결심해야 후보가 바뀐다. 결국 정당이 4년마다 스스로 인적 쇄신을 선택했던 것이다. 지난 9월, 공천관리위원장을 역임했던 원로 정치인에게 물갈이를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그래야 선거를 이기니까. 결과를 놓고 보면 그래요.”
이처럼 ‘바꿔야 승리한다’는 신화, 소위 ‘물갈이 법칙’은 1996년 제15대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혁신공천’에서 시작됐다. YS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의 공천을 진두지휘하면서 ‘여당의 무덤’으로 불리는 집권 4년차 총선에서 139석을 얻었다. 여기엔 ‘모래시계 검사’로 인지도가 높았던 홍준표, 벤처기업가 이찬진 등을 영입했던 ‘인적 쇄신’이 한몫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도 YS에 맞서 대기업 임원 출신의 정세균, TK출신 여성 판사 추미애, 386 운동권 등 인재를 대거 영입해 노쇠한 이미지를 벗어 차기 대권을 노릴 수 있었다.
양김 시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오세훈, 원희룡, 임태희 등 신진 인사들을 영입했고 133석(48.7%)을 얻어 115석(42.1%)을 얻은 새천년민주당에 앞섰다.
‘노무현 탄핵 열풍’을 타고 열린우리당이 압승했던 17대 국회에선 초선 비율이 무려 71.1%에 달했고, 2012년 19대 총선에선 ‘박근혜 비대위’가 김종인, 이상돈, 이준석, 손수조, 이자스민 등 파격적 인재영입 및 47.1%의 물갈이를 이뤄내면서 152석의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최근의 20대 총선 역시 33.3%의 물갈이 비율을 내세운 민주당이 23.8% 교체율을 보인 새누리당에게 압승했다.
15대 공천에서 빛난 ‘물갈이의 승리’는, 6번의 선거를 거치며 결국 필승법이 됐다. 그러다보니 각 정당은 물갈이를 수치화해 자랑하는 데만 매몰됐다. ‘정치 혁신’, ‘정당 개혁’ 등의 수단으로 등장한 물갈이지만, 그런 물갈이의 목적은 어느새 사라지고 물갈이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표가 돼 버렸다. 말 그대로 ‘물갈이’ 하기 위해 물갈이하는, 가치전도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물갈이의 배신… “사람은 절반이 바뀌는데 정치는 실종돼”
역대 공천마다 강조됐던 물갈이 비율이 정치 발전에 실제로 도움이 됐다면, 한국 정치는 진일보했어야 옳다. 그렇다면 정치권을 점령한 이 ‘물갈이 신화’는 과연 정치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까?
〈시사오늘〉이 지난 6월 국회의안정보시스템을 참고해 조사한 결과, 오히려 국회 내 ‘체증(滯症)’만 늘어난 모양새다. 법안접수건수는 점점 늘어나는 데 비해, 법안처리율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감소해왔기 때문이다.
문민정부인 제15대 국회에서 72.9%에 달했던 법률반영비율은 제16대 국회에서 62.9%, 제17대 국회에서 50.3%로 떨어진 뒤, 제18대 국회에서 44.4%로 50% 이하로 떨어졌다. 제19대 국회에선 41.6%를 기록하며 또다시 최저점을 갱신했다. 정쟁으로 인해 많은 법안이 부결되거나 폐기, 철회되고 있다는 해석이다.
국회나 정치에 대한 국민 신뢰도 역시 떨어졌다. ‘국민의 뜻’이라며 신인을 등용했는데, 국민은 국회를 점점 더 불신한다. 지난 6월 〈오마이뉴스〉의 의뢰로 리얼미터가 실시한 ‘2019 국가사회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국회(2.4%)는 검찰(3.5%), 경찰(2.2%)과 함께 ‘최저 신뢰도 3개 기관’으로 꼽히는 불명예를 안았다.
앞선 중진 의원의 말처럼 “정치가 더 갑갑해졌다”는 표현이 과장은 아닌 셈이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정치실종’이라는 단어까지 나온다. 여야 정치인들이 협상을 거부하고, 단식이나 장외 투쟁 같은 극단적 싸움에만 더욱 집중하면서 정치의 질이 떨어지고, 국민들의 정치혐오만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물갈이의 함정… “거수기로 전락하는 물고기들”
물갈이 비율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정치가 악화된다면, 그것은 이 물갈이가 무의미하거나 오히려 악영향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치하는 사람이 바뀌기는 했지만, 비슷한 사람만 반복적으로 뽑혔다거나, 그가 더 나쁜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보수당에 몸을 담고 있는 5선 의원에게 ‘물갈이 무용론’의 원인을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했다. 그는 “다섯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물갈이 목적으로 들어온 정치 신인들이 점차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는 현상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자생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저 인위적으로 물갈이를 한 거지. 특히 보수층은 물갈이를 기관이나 조직 같은 곳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 위주로 뽑아. 그 사람 면면들을 살펴보면 아주 훌륭하지. 그런데 이 사람들은 보통 조직생리에 길들여진 ‘조직 맞춤형 인간’이야.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정치를 할 정치력을 발휘하기 어렵지. 그러다보니 깃발 들라면 깃발 들고 쫓아가는 ‘딸랑이’가 되지. 지금 여야 초선의원들도 마찬가지야.”
당 지도부가 패권을 지키기 위해 조직 논리에 충성하는 인물 위주로 영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호남 출신의 한 중진 의원은 이렇게 덧붙였다.
“정치가 업이 아니었던, 모셔온 전문가들은 의회정치에 관한 교육 과정이 부족하기도 해요. 특히 법조인, 시민단체, 교수 출신들은 지방자치나 정당정치를 겪은 직업정치인에 비해 극단적인 성향이 있는데, 개인적 고집에 정당 논리나 이념만 그대로 주입받다 보니까 상대 당을 협상해야 하는 정치적 동지가 아닌 적으로만 보죠. 이게 지금 정국(정치실종 현상)과도 관련이 있겠죠.”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역시 지적한 부분이다. 최 교수는 지난 9일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상 수상 19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에서 “의회를 통해 성장한 정치인들이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것이 지금 정치의 근원적 문제”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물갈이를 외치며 야심차게 국회라는 어장에 들어온 물고기들이 애초에 능력 부족이었다거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앞선 5선 의원은 다음과 같이 자조했다.
“당 지도부는 그냥 물갈이를 패권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거야. 결국 그 물이 그 물이었던 거지.”
물갈이의 목적을 찾아서… “물고기가 아니라 물이 문제다”
단어 그대로 물갈이는 ‘물’, 즉 수질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각 정당들은 지금까진 물갈이가 아니라 ‘물고기 갈이’에 치중해 왔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지난 1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물갈이의 실패는 결국 공천 시스템에서 비롯된다”고 꼬집었다. 강 대표는 하향식 공천 시스템이 현재의 ‘물갈이 가치 전도 현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정치에서 20년 동안 물갈이가 등장했는데도 정치가 나아지지 않은 것은, 결국 시스템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정치 신인이 들어와도 구체제가 유지되는 한, 그들이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정치권은 정당의 지도부, 나아가봤자 비대위나 외부의 공천 심사위원들이 공천을 주도해왔습니다. 중앙당에 의해 인위적으로 사람이 바뀐다는 거죠. 그렇다보니 의원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관을 갖고 있어도, 각자의 판단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차기 공천에 불리하지 않아야 하니까요. 의원 개개인이 헌법 기관으로서 의미 있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그저 당론만 쫓아가는 겁니다.
문제는, 이들이 더 나아가서 책임성 없는 정치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거 당론이었는데?’라고 발뺌하면서 당론 뒤에 숨는 비겁한 정치, 책임감 없는 정치를 하게 된다는 거죠. 정치가 악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실제로 조국 사태에서 당론과 다른 소신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한 의원은 당직자들 사이에서 “이제 끝났다, 공천을 못 받는다”는 소문에 휩싸인 바 있다.
요약하자면, ‘물갈이’만을 위한 ‘물갈이’로 들어온 정치 신인들은 공천을 받기 위해 기존 의원들이 주도하는 당론에 충성하게 됐다. 그로 인해 의원 개개인의 책임은 사라지고, 정당 간 이념 다툼의 골만 깊어져 ‘동물 국회’가 재현됐다. 질린 국민들은 다시 “바꿔” 열풍을 소환한다. 사람을 바꾸면 국회도 바뀔 것이라고 믿어서다.
그러나 물갈이 이후 등장한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이 더 개선되었다는 증거는 부족하며, 도리어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바닥이다. 결국 ‘하향식 공천’이라는 제도 아래서, 진정한 물갈이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고 평가할 수 있는 셈이다.
강 대표는 이 같은 ‘물갈이의 함정’을 해결할 방안은 유권자나 주민이 경선 단계부터 관여할 수 있는 ‘상향식 경선 시스템’에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코커스(당원대회),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를 통해 공천 단계에서부터 유권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의사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물갈이 비율이 한 자릿수로 낮은 것입니다. 이는 책임 정치의 구현과 정국 안정성에도 도움이 됩니다.
한국사회가 지금처럼 중앙 공천을 버리지 못하면, 수준 낮은 ‘이념대결의 정치’만 지속될 것이라고 봅니다. 지도부에 밉보일 수 없어 정당의 낮은 논의 수준을 그대로 따라갈 테니까요. 촛불과 태극기의 싸움이 광장을 점령했듯, 정권이 바뀌면 또 두 세력이 그대로 맞부딪히겠죠. 이젠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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