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민주화 이후 지향점 상실
실용(實用) 바탕둔 국정좌표 재설정을
한반도 평화정착 전기 마련돼야
에너지 결집할 정치 리더십 통합 관건
OECD 꼴찌 된 한국...'경제 추락'이 본질
구조개혁에 국가 명운, 체질 혁신 이뤄야
포퓰리즘 넘어 미래 보는 책임감을
국민, 깨어 있어야 나라 바로 선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경자년(庚子年)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10년의 첫해이기도 하다.
정치, 외교, 국방, 경제 가운데 어느 하나도 순탄하게 보이지 않는 비감한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새로운 10년을 낙관하기에는 복합위기의 충격파가 너무 커 보인다. 당면한 과제들을 어느 하나 풀지 못한 채 또 한 해를 넘겨버린 탓이다.
산업은 조로증을 넘어 노쇠화에 접어들었고, 책임과 의무가 실종된 민주주의는 방향을 상실했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위기인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 그에 대한 국민적 합의조차 없다. 난국을 헤쳐나가려면 온 국민이 똘똘 뭉쳐도 시원찮을 판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념과 세대, 계층갈등이 심각한 상황이다.
좀처럼 새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립과 갈등, 분열의 골이 크고 깊어서일 것이다. 국가적 과제들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포퓰리즘 정책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 대처하려면 기초체력이 튼튼해야 하는데 사회 전반의 활력이 뚝 떨어졌다.
산업화·민주화 이후 다음 단계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국가의 정향(定向)이 없으니 ‘중진국 함정’을 탈피할 단합된 힘이 생길 리 없다.
제조업은 한국 경제를 성장시키고 지탱한 주춧돌이었다. 1970~1980년대 토대를 쌓은 중화학·반도체·자동차산업이 양적·질적 팽창을 거듭한 덕분에 우리 경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조업의 몰락은 경제의 기초가 무너진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되는 국면이다. 한·중·일 3국 중 가장 빨리 제조업 도태에 직면할 나라가 한국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승자 독식 세계 경제전쟁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더 가볍고 빨라져야 한다. 그럼에도, 국민 대다수는 문 정부가 거둔 경제 성과를 체감하기는커녕 경제 실패로 인한 혹독한 추위로 미증유의 고통을 받고 있다.
이제는, 시련과 역경을 극복해 내야 역사에 단단한 매듭을 지을 수 있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새로운 각오로 국정의 대전환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선·후진국 중대 기로
올해는 6·25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민족의 분단과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극복하는 의미 있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살리는 한편 흐트러진 사회적 공감대를 회복하는 과제가 중요하다.
세계 경제는 이미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올라탔다. 4차 산업혁명이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는 중이고, 반세기 넘게 이어진 자유무역 질서를 보호주의가 대체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뚜렷하게 나타난 한국 경제의 침몰 조짐은 변화의 흐름에서 뒤처져 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경고음이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독일 등 주요 선진국, 어떡하든 선두그룹에 진입하려는 신흥국가들의 노력은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이런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과감한 정책 혁신이 필요한 때다.
대한민국은 이제, 갈림길에 섰다. 선진국 문턱에서 추락한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길로 갈 것인가, 마지막 고비를 넘어 안착한 구미 선진국의 길로 갈 것인가 중대 기로다.
반세기 전 한국 경제 성장률은 연 10%에 이르렀다. 지금은 2%대를 지키기도 버겁다. 이대로 가면 10년 후 잠재성장률은 1%대로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1인당 소득 3만달러대에서 주저앉고 말 것인가. 아니면 소득 5만달러대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그 답은 우리가 과연 혁신의 빅뱅을 일으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역사 속 평가 나오도록 해야
혁신의 주역은 역시 기업일 수밖에 없다. 초유의 구조적 복합 위기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 민간 주도의 경제 활력 메커니즘을 복원시키는 길뿐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걸맞은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다.
그러나, 믿을 만한 위기 돌파의 리더십이 없다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장 큰 위기로 보인다. 국가의 방향타인 정치는 아예 ‘문제 그 자체’가 돼버렸다. 문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에도 기업인들은 제외됐다.
갈등 조정의 리더십도 잃었다. 각 정파는 4월 총선과 2년 후 대선 때 이념과 계층, 지역, 세대 갈등을 한껏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정치의 확립은 우리에게 밀어닥칠 대내외적 도전과 위기 때문에 그만큼 더 절실하다. 제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어도 거뜬하게 극복해 온 역사를 이제는 이어가야만 한다. 먼 훗날 2020년에 지은 매듭이 유난히 튼실했다는 역사 속 평가가 나오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모든 분야 업그레이드 관건
사실, 우리 앞에 닥칠 도전과 위협의 강도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한반도 정세는 다시 갈림길에 섰다. 북·미 비핵화 협상 중단과 북한의 도발 위협으로 어지럽고 불확실하다. 활력을 잃어가는 경제는 더 암울하다.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인력 감소와 청년실업 등 구조적 문제는 악화일로다. 올해 총선과 맞물려 진행될 정치권 지각변동은 예측불허다.
이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너무도 분명하다. 미국 유럽 등이 도달한 ‘선진화’ 단계다. 그러려면 정치부터 경제 행정 사회 교육 문화 노동 등 모든 분야가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국정을 통할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이 막중하다. 올해는 집권 4년 차인 문 대통령이 레임덕 없이 일할 수 있는 마지막 해다. 조국 사태와 청와대 감찰 무마·선거 개입 의혹 사건은 좁은 인재풀과 친문 위주의 ‘끼리끼리 문화’로는 더 이상 국정 운영이 어렵다는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청와대와 여당이 조국 일가 비리와 ‘울산시장 하명수사·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수사 과정에서 보인 반(反)법치주의 행태는 다시는 되풀이해선 안 된다.
구조적 악재 동시다발
새로운 10년은 격변의 시대가 될 것이다. 위기는 쓰나미처럼 밀어닥칠 것이다. 10년 안에 석유산업과 자동차산업 등은 존망 기로에 서게 된다.
지금대로라면 동북아시아 3국 가운데 가장 빨리 제조업 도태에 직면할 나라가 한국이다. 이 흐름을 되돌릴 유일한 방법은 우리 제조업에 4차 산업혁명의 갑옷을 입히는 것 뿐이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것이 경제 활력의 회복이다. 투자 감소는 미래 기대를 접는 것과도 같다. 미·중 무역전쟁, 일본 수출규제 등 대외악재 이전에 기업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게 진짜 문제다.
기업의 생산·투자는 위축되고 있으며, 수출도 계속 내리막길이다. 대외적인 여건이 악화되는 탓이겠지만, 우리 내부의 정책 폐해도 심각하다. 기업 활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와 친노조 정책이 문제다.
지난해 10대 그룹 영업이익은 1년 새 반 토막 났고, 기업들은 국내 투자를 중단한 채 속속 해외로 투자처를 옮기고 있다. 생산인구 감소와 산업 경쟁력 저하, 디플레이션의 공포 등 어느 하나만으로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구조적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다가오는 양상이다.
경제단체장들의 신년 회견에는 절박함과 위기위식이 짙게 배어 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간담회 도중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 경제에 미래가 없다는 작심비판이었다.
4차산업 시대, 정책 틀 바꿔야
외환위기 때와 달리 지금은 외부 충격보다 내부 갈등, 체력 저하가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벽에 갇힐 수 있다는 우려를 해소해야만 한다. 기업과 자영업자 등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좌절과 절박함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기업활동 규제는 너무도 심각하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환경·안전 규제들이 추가되면서 기업 대표이사가 되는 순간 2200여개 형사처벌 법규 대상이 된다. 국민연금까지 경영 간섭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무소불위 강성 노조는 기업 이사회 장악을 시도하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 세계 경제의 흐름을 보면 경제계의 목소리를 엄살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미·중 무역전쟁의 이면에는 단순한 무역역조 개선 보다는 4차 산업 시대 경제 패권 다툼의 의미가 더 짙게 깔려 있다. 두 나라가 서로 물꼬의 방향을 자국 쪽으로 유리하게 틀어놓기 위해 상대국을 어렵게 하고, 견제하려는 것이 미·중 무역전쟁의 본질이라는 지적은 이제 낯설지 않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차원이 다른 게임을 해야 한다. 굴뚝과 조립 라인의 시대는 저물었다. 공장식 교육체제는 수명을 다했다. 산업, 교육, 고용, 복지정책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기업이 정치에 발목 잡힌다"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해야만 비로소 한국 경제가 회생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실패 반복되면 회복 난망(難望)
속도감 있는 규제개혁에 과감히 나서야 한다. 낡은 규제의 보호를 받으며 변화에 저항하는 기득권의 손을 놓고 과학ᆞ기술의 변화에 혁신으로 화답해야 한다.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를 위한 노사 간 합의를 적극 중재하는 게 필요하다.
잡히지 않는 부동산 문제를 비롯해 출산율 감소와 노령화에 따른 대책들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그동안 최우등생 소리를 듣던 우리나라의 올해 명목성장률은 1.4%에 그쳐 36개 회원국 중 34위로까지 밀려날 전망이다.
미국(4.1%), 영국(3.4%), 독일(2.5%)은 물론이고 일본(1.6%)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일본에 추월당한 것은 1962년 이후 처음이라고 하니 한국 경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케 한다.
올해도 실패가 되풀이되면 더 이상의 경제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 새해에는 정부가 어느 때보다 민간 부문 활력 높이기에 적극 나서야 한다. 아직도 가시적 결과가 없는 신성장동력 발굴 육성에 힘을 쏟고, 제조업 분야의 구조조정과 스마트팩토리 등 첨단화 추진, 서비스산업 경쟁력 제고 등이 그것이다.
국내외 현안마다 보다 정교한 로드맵을 수립하고 대화와 소통, 양보와 타협으로 국정 난맥상을 풀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정치 파행, '위기' 돌파 못해
그런 점에서, 정치는 실로 문제다. 가히 절망적이다. 사회적 논란을 타협과 설득으로 조정해야 하는 정치권이 오히려 사회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정치는 여야 간 대화ᆞ협상의 실종으로 대결적 쟁투만 난무하게 했다. 강경 대응만 고집한 제1 야당도 문제지만, 그들을 포용 못하고 독주한 여권 책임이 더 크다. 지난해 연말에 목도한 국회의 모습은 정치와 법치주의를 의심케 했다. 갈등과 분열, 질시와 반목을 재확인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집권 세력은 전 정부와 야당 탓을 하며 적폐 몰이를 그치지 않는다. 반대 진영은 정부의 실정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부추기는 데 여념이 없다. 모두가 책임을 부인하고 남 탓만 하면 위기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정치파행 흐름속에 기득권을 지키려 혁신을 거부하는 거대 노조와 관료 조직, 이익집단에 끌려가기만 하는 리더십으로는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4월 15일 치러진다.
문재인 정부의 중간평가적 의미와 차기 대선의 전초전 성격이 짙다. 여의도 지형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문 정부의 집권 후반기 정국 주도권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제정당은 진영의 논리와 세력에 기댈 것이며, 그에 비례해 극단의 정치가 더욱 첨예화할 가능성이 높다.
총선이 지난해보다 더 극심한 대립과 분열의 촉매제가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정치권은 이를 사전 차단하고 대립과 분열을 막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역 의원을 뽑지 않겠다’는 답변이 42.6%로 다수였다. 이는 여당뿐 아니라 야당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대적 책무가 그렇듯 비전을 실현해 보일 수 있는 자질·능력을 헤아리는 표심, 선택이 요구된다.
21대 총선, 낡은 정치 청산 전환점 돼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우여곡절 끝에 도입해 놨더니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만들겠다는 '꼼수'가 동원되는 게 우리 정치판의 낯뜨거운 현실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과정인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유다.
대한상의가 이번 20대 국회의 경제분야 입법 성과에 매긴 점수는 4점 만점에 1.66점으로 ‘낙제’였다. 정치권이 위기 극복과 경제 회생에 앞장설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재계의 절규와 호소를 무겁게 받아들이기 바란다.
21대 총선은 낡은 정치 청산의 대전환점이 돼야 한다. 철저한 인적 쇄신이 그 출발점이다. 갈등과 대결이 아닌 화해와 통합을 이룰 새 인물의 수혈로 과거 정치에 종언을 고해야 한다. 아직도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수구적·극우적 사고에 젖어 있거나, 자신들만 선(善)이라는 운동권적 인식에 집착하며 대화와 타협에 걸림돌이 되는 이들은 걸러내야 한다.
이럴수록 유권자들이 4·15 총선에 적극 참여해 새로운 정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옥석을 가리는 유권자의 ‘밝은 눈’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국민이 깨어 있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 여야 정당들의 진정성 있는 노력과 다짐도 필요하다. 선거를 공명정대하게 치르겠다는 절대 명제에 대한 의지표명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정착 견인을
외교 관계도 큰 과제가 쌓여있다. 올해 한국 외교는 그 어느 해보다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어그러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제 궤도에 다시 태우는 게 가장 시급하다. 한반도 정세가 2017년의 군사적 초긴장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정부가 북한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
올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선 도전에 나서는 만큼 북핵 문제에 대한 해법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상태다. 그러나, 미국과 손발을 맞춰도 모자랄 판에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으로 한·미동맹마저 삐걱거리고 있다.
미중 패권전쟁이 심해질수록 한국은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내몰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견지해온 전략적 모호성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어렵다.
북한을 우선 순위에 둔 외교안보정책부터 손봐야 한다. 그래야 북핵 문제의 해법도, 우리 외교가 나아갈 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현재 미국·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북한·중국에 편향된 외교안보 정책을 펴고 있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말 중국 방문기간 동안 국제 제재 대상인 남북철도 연결을 강조하며 중국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래서는 북핵 해결은커녕 안보불안을 더 심화시킬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야 한다.
새해 벽두부터 스텝이 꼬인다면 한반도 안보 상황에는 먹구름이 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노골적으로 한반도 정세 개입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올 상반기 시진핑 주석의 방한이 확정된 만큼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 사드ᆞ한한령 등으로 서먹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긴요하다.
외교역량을 총동원해 북미가 한반도 평화정착의 밑돌을 놓을 수 있도록 유의미한 진전을 견인해 내야 한다.
본질은 ‘경제 추락’
새해 실질적 초점은 역시 경제다. 우리 경제는 지난해 성장엔진이 식으면서 그야말로 악전고투했다. 거덜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자·소비는 빙하기를 맞았고 수출마저 역대급으로 둔화했다. 올 1~3분기 민간소비 증가율은 2.3%로 2009년 1~3분기 이후 10년 만의 최저를 기록했다. 설비투자지수는 작년 5월부터 올 10월까지 18개월 연속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 행진했다. 소득주도성장으로 가계소득을 늘려 소비를 확대하고, 투자를 촉진하겠다던 문 정부 목표와는 정반대 결과가 나타났다. '최악' 수준 경제 지표에다 국민 대다수가 경제 악화를 체감한 2019년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실질성장률 하락 속에 소비•투자•수출입과 관련한 모든 물가지표(GDP 디플레이터)마저 급락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GDP 물가는 지난해 4·4분기(-0.1%)부터 올 3·4분기(-1.6%)까지 4분기째 후진하고 있다. 사상 처음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문 정부가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분배에 초점을 둔 정책을 펴온 결과가 무엇이던가. 그것은 바로 ‘성장 없는 분배’다. 문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3%를 넘었던 경제성장률은 이제 2%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 됐다. 성장이 안 되니 분배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당연히 소득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오로지 재정에 의존해 일자리와 분배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서 재정 건전성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지금처럼 소비·투자 위축이 다시 물가를 끌어내리는 상태가 계속되면 ‘저물가→저성장→저물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장기간 지속할 공산이 크다. 통계청이 발표한 11월 산업활동 동향이 모처럼 ‘트리플 상승’으로 나왔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다.
문 대통령과 홍 부총리 자신은 물론 청와대와 여당 관계자들이 ‘보고 싶은’ 통계만 인용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경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고용의 양과 질 모두 뚜렷한 회복세”(문 대통령) “한국 경제가 선방하고 있다”(이호승 경제수석) 등이 대표적이다. 경제허리인 30~40대 취업자 수가 2년 넘게 동반 감소하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괴리가 큰 해석들이다.
본질은 ‘경제 추락’이다. 경제가 안 좋다 보니 정부는 어떻게든 실상을 감추려 들고, 그러다 보니 ‘꼼수 통계’나 ‘통계 분식(粉飾)’ 논란이 생기는 것이다.
현실적 공포 디플레이션 위협
일상적으로 겪는 경제현실은 더 암담하다. 속속 나오는 경제지표들은 성장둔화를 넘어 경기회복의 기대감마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경제의 허리인 40대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청년과 노인들 절대다수가 제대로 된 일자리가 부족해 단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세상이다.
물가 하락과 경기 침체가 악순환하는 디플레이션 위협이 현실적 공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체감경기를 보여주는 명목성장률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 1%대로 떨어졌다. 2017년 5.5%였던 것이 2019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까지 추락했다.
과거 한국 경제는 악재를 맞아도 곧 반등하는 복원력을 자랑했다. 오일 쇼크가 덮친 1980년 1.7%에서 이듬해 7.2%로 뛰었고, 외환 위기 때인 1998년 마이너스 5.5%로 떨어졌다가 다음 해 11.5%로 치고 올라갔다. 글로벌 금융 위기 때도 0.8%에서 곧바로 6.8%로 급등했다. 그러나 이 정부 출범 이후엔 외환 위기 같은 돌발 사태가 없었는데도 경제가 쪼그라들기만 한다.
주력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1%대 경제성장이 고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것이 시급하지만 규제개혁 작업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제조업 생산 능력은 지난해 8월부터 16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기록 중이고, 공장 가동률은 71.8%로 떨어졌다. 이러니 일자리인들 온전할 리 없다. 제조업 일자리도 20개월 연속 감소세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경기 활성화 힘 쏟아야
새해에도 국제 경제 환경은 어둡다. 제2, 제3의 무역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유럽·일본·중국 등 경쟁국들은 예외 없이 기업과 시장의 힘으로 성장 동력을 키우는 친기업·친시장의 국가 전략을 펼치고 있다. 또다시 감세 계획을 발표하는 등 기업 활력을 높이려는 각국 정부의 정책 경쟁이 새해 벽두부터 치열하다.
그러나, 우리의 민간 부문의 경제성장 기여도는 2017년 70% 후반에서 지난해 25%로 급격히 떨어졌다. 생산 투자 소비 고용 등 민간 영역 전 분야에서 IMF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여파로, 한계를 드러낸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결과였다. 정부가 새해 경제정책 방향을 경기 반등과 성장률 높이기로 설정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서민들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손에 잡히는 결과를 중시한다. 경제의 중추 격인 40대의 고용이 최대 민생 과제로 부각한 현실은 경제팀의 분발을 다그친다.
여기에다, 경기침체 등으로 한쪽에서는 ‘돈맥경화’ 현상이, 다른 한쪽에서는 부동산 시장의 유동자금 블랙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시중 유동성이 생산적인 분야로 흘러갈 수 있도록 경기 활성화에 힘을 쏟아야 한다.
주택시장의 안정세를 계속 유지하고 주거 안정을 이루는 것도 정부 몫이다. 아파트값 잡기도 반드시 해결의 가닥을 잡아야겠다. 평당 1억원 아파트의 등장은 대다수 국민의 허탈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하고 있다. 많은 서민을 정신적 루저로 내모는 고삐 풀린 아파트값의 고공행진은 땅으로 내려와 실물경제의 크기에 맞춰져야 한다.
성장과 분배 구조 혼란
새해엔 세계 최악의 저출산고령화 속에서 생산가능 인구(15~64세)가 작년보다 23만 명이나 줄어든다. '인구 보너스'의 시대가 끝나고 인구의 구조적 변화가 경제 활력을 쪼그라트리는 '인구 절벽(오너스)' 시대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는 공급 측면에서 생산력 축소, 수요 차원에선 소비 위축을 초래해 경제성장을 떨어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성장 엔진이 영원히 멈춰 설지도 모를 위기에 처했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게 먼저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파이가 더 늘지 않거나 되레 줄어들 때 서로 한 조각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혈안이 된다면 그 혼란은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제로섬이나 마이너스섬 게임이 아니라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만들어가는 게 위기 돌파의 리더십이다.
이와 관련,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신년사에서 우리 경제의 새해 과제를 제시하며 “단기적으로 성장세 회복을 도모하면서도 혁신성장 동력을 확충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신산업 육성, 창의적 혁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역량을 거듭 강조했다. 세계적인 패러다임 변화에 뒤처져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규제 혁파를 촉구한 경제단체장들의 신년 주문과 한은 총재의 새해 진단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세계 경제 '피크쇼크' 전망
국가 경제의 중심에는 기업이 자리한다. 대한민국의 획기적 발전사를 되돌아 봐야 한다. 기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최초의 근대식 주식회사로 꼽히는 경방이 출범한 1919년 이후 100년간 한국은 농업국가에서 경공업을 거쳐 중화학, 첨단 전자산업 국가로 도약했다. 작년 기준으로 경제 규모 세계 12위, 1인당 국민소득은 전쟁으로 폐허만 남은 1953년 67달러에서 3만2000달러로 477배나 늘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1970~1980년대 설계한 중화학·반도체·자동차산업이 양적·질적 팽창을 거듭하면서 지금 체급으로 성장했다. 한국 제조업이 그렇게 계속 커올 수 있었던 것은 글로벌 시장과 자유무역이 같이 팽창해왔기 때문이다.
선두에 섰던 대기업들의 역할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공과를 떠나 대한민국 경제의 역사는 대기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산업 진출을 천명한 도쿄선언, 포스코(옛 포항제철)의 첫 쇳물 배출, 독자개발 승용차 포니의 탄생 등이 대표적 기록이다.
이제는 그 시장이 성장 한계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경제,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총수요 답보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관찰된다. 미국 투자은행 BoA메릴린치는 2020년대가 '정점의 시대(the decade of peak)'가 될 것으로 예견한다. 10년 안에 세계 경제가 정점을 찍고 후퇴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경고다. 여기서 파생될 충격이 '피크쇼크'다.
기업인들 사기 최악
실제, 한국의 기업 상황은 심각하다. 문재인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정책 기조에 따라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제한을 추진해 비용을 늘리니 기업들은 해외로 탈출한다.
정부는 고비용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규제혁파나 노동개혁에 나서기보다 기업 활동에 족쇄를 채우는 일에 전념한다. 게다가 민노총이 제1 노총 지위를 차지하고 국민연금이 기업경영 개입을 선언한 데 대해 경제계는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30대 대기업의 경영환경을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대기업 66%는 새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1%대 또는 1% 이하로 추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30대 기업 중 올해 투자를 늘리겠다는 기업은 7곳에 그쳤고, 채용을 늘리겠다는 기업은 1곳에 불과했을 정도다.
기업을 옥죄는 규제와 민간의 투자 의욕을 떨어뜨리는 경직된 노동시장이 기업의 발목을 잡아 한국경제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업 경시는 문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에서도 나타난다. 연말 특별사면에서도 기업인은 쏙 빠졌다. 앞선 두 차례의 사면 때도 기업인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국민 통합’을 내세우면서 범죄 경중에 관계없이 유독 기업인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이해할 수 없다. 가뜩이나 경기침체로 움츠러든 기업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지는 못할망정 정부의 반기업 정서만 거듭 드러낸 모양새다.
제조업 생산 능력은 지난해 8월부터 16개월 연속 감소세로 역대 최장이다. 제조업 재고율은 116.3%로 1998년 이후 최고치 수준이다. 제조업이 끝없는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대기업들조차 비상경영이 일상이 됐다.
뒷골목 상권이 가라앉은 데 이어 도심 번화가에서도 대형 점포들이 하나둘씩 철수하는 모습이다. 중소기업들의 입장도 비슷하다. 곳곳의 지방공단이 활기를 잃어가는 데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자리가 제대로 마련될 리 없다.
대통령의 공장 방문과 같은 보여주기식 행보로 제조업이 살아날 리는 만무하다. 침체한 제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조업 주역인 기업인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대변혁 속에 미국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국가들조차 저만치 앞서가는데 국내에선 원격의료든, 바이오헬스든, 승차공유든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21세기 석유’라는 빅데이터 활용을 위한 ‘데이터 3법’도 기약이 없다. 무엇으로 기업의 사기를 끌어올릴지 답답하기만 하다.
사고의 대전환을
경제단체장들의 날 선 목소리에는 세계 경제 흐름의 새로운 변곡점을 지나는 4차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의 혁신 노력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절절히 배어 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규제개혁 입법이 막히는 걸 보면 울분이 올라 벽에다 머리를 박고 싶다”며 눈물을 보일 정도로 경제 관련 단체장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위기의식은 대단히 심각하다.
박 회장은 지난 7월 일본이 경제보복을 해올 땐 "일본은 정부 부처 간 공동작업까지 해가며 보복을 해오는데 우리는 서로 비난하기 바쁘다"며 "이제는 정치가 경제를 놓아줘야 할 때"라고 일침을 가했다.
기업에서 아무리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와도 문재인정부는 마이동풍이다. 정부는 재계의 목소리를 새겨듣고 엄중한 경제 실상을 직시해야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산업 기초체력에 해당하는 교육 경쟁력이 최근 초·중·고·대학 할 것 없이 국제평가에서 추락하고 있다. 경쟁의 주역은 기업이지만 이들이 뛸 수 있는 토양을 갖추는 것은 정부와 제도의 몫이다. 정부는 한국 제조업 르네상스를 노동개혁과 교육개혁으로 떠받쳐야 한다.
새해에는 정부나 정치권이 이같은 목소리들을 충분히 새겨듣고, 정치적 이념이나 당리당략보다는 세계 경제의 흐름에 걸맞은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미래를 보는 리더십과 실사구시(實事求是)
새로운 10년의 출발점인 올해를 더 이상의 추락을 막을 마지막 기회로 삼아야 한다.
대반등을 이루는 방법은 구조개혁뿐이다. 창의와 혁신을 억압하는 낡디낡은 규제, 구습과 구태, 기득권과 독점적 지대를 과감히 혁파하는가 여부에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다.
경제 활력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진짜 개혁에 매진하는 새해가 돼야 한다.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이 따라가던 시대는 지났다. 창의력은 말할 것도 없고 지식과 정보의 축적에서도 이미 민간은 정부를 훨씬 뛰어넘었다. 정부의 시각으로 기업들을 각종 규제와 간섭으로 묶어 버리면 한국 경제의 또 한 차례 도약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국민의 에너지를 모으고 창의성을 폭발시키며 포퓰리즘을 넘어 미래를 보는 리더십을 갖춘다면 우리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그 해답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이념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국정 전반에 실용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어떤 위기든 정면으로 맞설 때 살아날 길이 열린다. 새해 대한민국 모두의 건투를 빈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 <6공해제>, <97년 대선 최후의 승자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