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한 발자국 위로 200만 개의 발자국이 포개졌다. 선두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있었다. 그들은 비가 온 뒤 질펀한 땅 위, 알록달록한 낙엽과 하얗고 깨끗한 눈, 그리고 흐드러지게 핀 꽃잎 위에, 무수히 많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들의 모든 걸음은 ‘민주화’란 정상(頂上)을 향하던 길이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아홉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민주산악회의 태동부터 해체까지의 이야기다.
이번 회고사는 민주산악회(이하 민산) 회원들의 증언도 참고해 재구성했다.
1980.05.17.~1981.04.30.
그들은 왜 산에 올랐을까
록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은 심드렁한 듯 노래했다.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뭐 하러 힘들게 높이 오를까. 어차피 내려올 걸 알면서도 뭐 하러 그렇게 높이 오를까”라고.
여섯 청년들의 ‘등산을 왜 할까’란 노래는, 1980년대 당시 기자들이 김영삼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을 김영삼의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민주산악회의 산행은 단순한 운동이나 건강 차원의 산행이 아니었다. 독재의 암흑기에 산행(山行)은 유일하게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민주화투쟁의 방편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17쪽.
그의 답변을 이해하기 위해선, 1980년대로 시계를 돌려야 한다.
1980~1981년은 민주주의가 움츠러든 시기였다. 서울의 봄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막을 내렸고, 다시 찾아온 겨울은 혹독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18일 0시를 기준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때 5‧17시국수습방안에 따라 김대중‧김종필이 체포‧연행됐으며, 김영삼은 가택 연금됐다.
(서울의 봄②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010)
김대중은 17일 오후 10시, 남산의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혔다. 조사 명분은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었다.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은 그는 2년간 수감됐다. 그가 세상 밖을 나갈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안기부의 미국행 제안 때문이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①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770)
전두환 정권이 나의 미국행을 서두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정치인 탄압과 민주 세력을 말살하는 철권 통치로 국내외의 역풍을 맞았다. 여기에 장영자‧이철희 어음 사기 사건과 같은 대형 악재가 터지자 나를 석방시켜 대내외적 이미지를 반전시키려 했던 것이다. 또한 나에 대한 국제 사회의 석방 압력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452~453쪽.
이로써 김대중은 1982년 12월부터 2년 3개월 동안 미국에서 머물게 됐다. 그는 150회의 연설을 통해 재미 교포와 세계 언론에 한국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김종필은 17일 심야, 보안사 서빙고 분실(국군보안사 대공처 수사단)로 끌려갔다. 체포‧연행의 명분은 부패와 부정축재 조사였다. 계엄사는 6월 18일, 김종필이 216억 4648만원을 부정축재 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46일이 지나고 보안사를 나와 집으로 왔지만, 사실상 가택연금이 시작됐다.
1980년 7월 2일 오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간 지 46일 만에 청구동 집으로 돌아왔다. 보안사의 국방색 브리사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100명도 넘는 기자들이 골목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아내와 아들 진, 딸 예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맞아줬다. 그날부터 집 앞에는 경찰 초소가 세워져 주야24시간 나와 가족뿐 아니라 모든 출입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골목 양쪽 끝에도 보안사 요원들이 차량을 세워놓고 잠복하고 있었다. 사실상 가택연금, 칩거생활이 시작됐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권, 114쪽.
정치활동금지법으로 10월 27일에는 공화당이 해산됐으며, 당 재산은 몰수됐다. 이후 김종필은 1983~1986년, 4년 4개월 동안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났다.
3김(金)의 정치 활동을 막은 장본인, 전두환의 입장은 무엇일까. 그는 이 시기를 △10‧26 이후 3김의 정권욕에 따른 폭주 △경제난 △학생 시위 △북한 위협 △노동계 투쟁 등에 따른 위기상황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그가 결정한 5‧17 조치는 ‘어느 누구라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쨌든 5.17시국수습방안과 국보위의 개혁조치들에 관한 한 그 정치적, 역사적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 그것은 내가 주도해서 한 일이니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해봐야 면할 수도 없겠지만, 이를 회피할 생각은 없다. (중략) 내가 아닌 다른 그 어느 누가 그 자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했다 하더라도, 당시의 시국 상황과 시대적 소명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면 결국 내가 선택했던 결정, 내가 실행했던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라가 혼란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서, 훗날 어떤 책임을 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위기를 돌파해나가기 위한 일들을 앞장서서 하는 것이 공직자가 취할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 전두환 회고록 <혼돈의 시대(1979-1980)> 2권, 556~557쪽.
1981년 3월, 전두환은 3김의 저항 없이 무사히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그 결과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여당인 가운데, 관제(官製) 야당 민주한국당(민한당)과 국민당이 제1‧2야당이 됐다.
김영삼은 1981년 4월을 끝으로, 1차 가택연금이 끝났다. 그는 1년간의 연금을 ‘분노의 1년’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자서전 <나의 정치 비망록>에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꽃봉오리가 무참히 짓밟힌데 대한 분노는 정말 삭이기 어려웠다”고 후술돼있다.
1981.06.09.~1992.12.18.
그들은 민주주의를 꿈꿨다
1981년 5월, 김영삼은 1년 만에 무장한 전투경찰로 둘러싸인 상도동 집을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연금 이후에도 온전히 정치 활동을 하지 못했다. 홍인길은 그때의 상황을 짧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땐 사람 모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산으로 가는 방법뿐이었죠.”
살벌한 분위기 속, 사람들이 모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그의 설명이었다. 아래는 김덕룡의 당시 상황에 대한 회고다.
“YS가 연금에서 풀렸지만 그렇다고 밖에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사무실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뭔가 활동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았습니다. 때마침 ‘등산을 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어서, 명륜동 김동영 의원 집에 모여서 시작했습니다.”
신용선(故 김동영 전 의원 보좌관)은 출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민산은 김동영 의원의 명륜동 한옥 자택 사랑방에서 태동했습니다. 정치 규제에 묶인 후, 항상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 속에 살았던 김 의원이 화(火)를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지인 몇 분이 산에나 다니면서 마음을 달래자고 해 인근 북한산 등을 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의원이 마침 연금이 해제된 YS에게 산에 가자고 권유했고, 자연스럽게 김덕룡 홍인길 최기선 등 YS 비서진들도 동참하게 됐습니다. 한두 사람이 동참하다 점점 참여 인원이 많아졌습니다.”
민산의 태동을 두고 여러 설(說)이 있다. 거산산악회, 경민산악회 등 시초 논란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김영삼의 첫 산행은 6월 9일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안기부가 민산 회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려졌다. 이에 대한 김덕룡의 회고다.
“첫 등반 날짜가 6월 9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83년도에 저하고 몇 사람이 안기부에 끌려가 48시간이 넘는 조사를 받으면서입니다. 요원들이 우리가 간 날이 6월 9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몰랐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 생일을 찾아준 거죠. 우리는 기억도 못했고, 기록도 안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항시 잡혀갈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던 엄혹한 시절이었기에, 민산의 날짜별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언제, 어떤 산행을 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민산 회원들의 오랜 기억의 조각을 모아 재구성하는 방법뿐이다.
정치활동 피 규제자들이 한두 명 모이다가, 민산의 회원은 2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조를 편성하고, 조별 책임자를 뽑았다. 아래는 김기수의 당시 상황 설명이다.
“시간이 지나 백두산, 지리산, 태백산, 금강산 조로 나뉘었습니다. YS와 홍인길, 제가 백두산 조였고, 고향이 거창인 김동영 전 장관이 지리산 조를, 고향이 강릉인 김명륜 전 의원이 금강산 조를, 최형우 전 의원은 태백산 조를 맡았습니다.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산 이름을 따서 조 이름을 지은 겁니다.”
민산의 조직이 더 커지면서 전국 단위로 지부를 만들고, 임원들은 교육을 받았다. 이외에도 회칙, 선언문, 회가까지 만들어지는 등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하지만 이들의 자금 마련 만큼은 자율적으로 진행됐다.
“산행을 하다가 잠시 쉴 때 머리에서 모자를 벗습니다. 그러곤 그 모자를 돌리는 거죠. 그러면 국회의원 한 사람들은 1~5만 원을 넣고, 어떤 사람들은 몇 천 원을 넣었습니다. 대신 동전은 무거워지니까 안 넣었습니다. 그러니 최소 천 원 이상은 낸 것이죠. 자발적으로 모아서 했습니다.”
민산은 매주 목요일 산을 올랐다. 일정은 비슷했다. 정상에 도착하면 김영삼은 회원들과 함께 민주 회복을 위해 기도한 뒤, 점심으로 버너에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각자가 가져온 쌀과 김치를 곁들였다. 아래는 최형우가 묘사한 식사 시간의 한 일화다.
“산에 올라가서 식사를 하면 각자가 반찬을 내놓는데 그야말로 뷔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YS가 식사를 하는데 혼자서만 먹고 옆 사람들에게 먹어보라는 말을 안 합디다. 그래서 내가 '총재님, 옆에 사람들에게도 먹어보라고 하소' 이렇게 얘기하니까 YS가 그냥 '허허허' 하고 웃어요. 그 다음 번 산행에 YS가 불고기 해 와가지고는 '내가 최형우에게 한 방 먹었다'면서 나눠먹으라고 합디다.”
조직을 확대하던 민산의 발목을 잡은 건 또 한 번의 불법 연금이었다. 김영삼은 1982년 6월 1일부로 2차 연금이 시작됐다. 연금의 사유는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 내용이 정치활동 금지조치를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이 나를 ‘2차 연금’했던 사실상의 이유는 민주산악회를 중심으로 한 나의 활동이 본격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1차 연금이 해제된 직후부터 끈질기게 동지들의 모임을 주선했다. 그 결과 민주산악회가 주도한 1981년 망년회에는 전직의원 30여 명을 비롯하여 5백여 명의 동지들이 모이기에 이르렀다. 5‧17 이후 최초로 가진 이 공개모임에서 나는 “우리는 결코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24쪽.
전두환은 김영삼의 2차 연금으로 민주주의를 다시금 움츠러들게 하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이 된 민산은 1983년 김영삼 단식 투쟁과 함께 했으며,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탄생시킨 모태가 됐다. 이후 민추협은 1985년 신한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돼 돌풍을 일으켰다.
(민추협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143)
(신민당 창당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671)
‘민주주의 포기할 수 없었던’ 민산, 민주주의의 불쏘시개 되다
민산은 사그라질 것만 같았던 1980년대 민주주의 불씨를 되살렸다. 그런 동시에 2만여 명의 조직과 세(勢)는 1992년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에도 일조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의 수족과 같은 민산을 직접 잘라냈다. 노태우의 월계수회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영삼의 단호한 해체 명령에 민산 회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래는 박경옥의 회고다.
“왜 안 서운했겠어요. 인간적으로 서운했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진심을 담아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근데 그분의 뜻을 이해해요.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시킨 거죠. 이분의 진심을 알아요. 옳은 정치인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금 비록 어렵게 살고 있어도 참을 수 있는 거예요.”
다른 회원들 역시 인간적인 서운함을 내비치면서도, 해체는 옳았다고 인정했다. 이렇듯 민산 회원들은 민주주의의 불쏘시개 역할을 자처했다. 이들이 지켜낸 민주주의에 대한 작은 열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1987년 거대한 민주주의의 횃불이 타오를 수 있었다.
민주산악회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아래는 결코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민산 회원들이 주는 마지막 메시지다.
김영삼 “민주산악회의 역사는 곧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대한 민주화투쟁의 산 역사”
김덕룡 “야당이 없던 시절, 야당의 역할을 한 정치적 결사체”
박경옥 “독재로부터 항거해오던 민주화 운동의 처음과 끝이자, 군부통치를 종식시킨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발점”
박태권 “민주화 운동의 큰 집이고, 본거지이자 요람”
서청원 “민주화 운동의 본류이자 본산”
이성춘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인 산행”
이장우 “문민화라는 거대한 물결을 만든 동지적 결합”
최형우 “민주화의 원동력이자,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밑거름”
※ 민산 회원들의 자세한 인터뷰(2013년 김덕룡 최형우, 2012년 김기수 박태권 서청원 신용선 홍인길, 2011년 박경옥 이성춘 이장우)는 <시사오늘> ‘民山되짚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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