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절대 권력이 무너졌다. 18년간 견고하게 버티던 유신 체제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막은 금세 다시 올랐다. 공백은 영원한 권력을 꿈꾸던 또 다른 이들에 의해 쉽게 채워졌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 안가를 울리던 몇 발의 총성 이후 1980년 5월 18일, 광주 금남로를 군홧발 소리로 채우기 전까지의 시간은 총 204일이다. 유신이 무너진 한반도의 204일은 겨울에 가까운 봄이었다.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꽃망울을 터뜨리다가도, 길어진 공백기 속 사회는 불안과 혼란으로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일곱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79년과 1980년의 서울의 봄이다.
1979.10.26~27. 10‧26 사태 막후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 박정희의 유신은 김재규가 쏜 총에 종말을 맞았다. 10‧26 사태는 아래 회고사 시리즈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680)
그로부터 10분이 지난 오후 8시,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대통령 각하께서 분원에 입원하신 것 같다’는 첫 보고를 받았다. 당시 일반 전화가 흔치 않았던 탓에 보고받는 것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서거했는지 사실 확인도 쉽지 않았다.
그가 유일한 목격자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각하를 시해한 사람이 김재규인 것 같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건, 사건 발생 후 3시간 반이 지난 후였다. 그 시각 김재규는 국무위원들과 함께 비상 국무회의에 참석해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 보안사와 육본의 임시 지휘소를 오가는 사이 그리고 청와대 인근의 수십 발 총성 첩보를 듣던 그 시점에서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된 일들을 해결해야 할 책무가 보안사령관인 나에게 지워질지 모른다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략) 김계원 실장이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을 정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계엄령 선포를 의결하기 위해 소집된 비상 국무회의가 계엄 선포 사유를 밝히라는 일부 국무위원들의 요구로 좌초되자, 김 실장은 김재규의 쿠데타 기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 1권, 47~53쪽.
자정에야 전두환은 김재규 체포 작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상황이 얼마나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는지는 노태우 회고록에 잘 드러나 있다. 밤 10시,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박정희의 유고를 알리며 차지철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1979년 10월 26일, 밤 10~11시쯤이었다. 서부전선 최전방 부대인 9사단장 숙소에서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에 나갈 때면 만나고 돌아오곤 했지만 그가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특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유고가 생겼다. 범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인 것 같다.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지휘계통은 거의 마비상태다.”
전 사령관은 당부했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북한의 어떤 도발도 응징할 수 있도록 부대를 잘 장악하게.”
‘이 무슨 날벼락인가! 불과 몇 달 전에 박 대통령의 건강한 모습을 뵈었는데…. 이 무슨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228쪽.
날이 바뀌고 새벽 2시, 속개한 국무회의에서 헌법규정에 따라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하기로 의결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박정희의 유고(有故) 소식을 들은 것은 이때쯤이었다.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시각 미국에서 걸려온 지인의 전화로 사실을 알게 됐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4시 반경, 나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 수화기를 들었다. 미국에 사는 한 교포가 걸어 온 전화였다.
“총재님, 지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박대통령이 암살되었답니다.”
다급하게 전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 나는 항상 박정희가 그의 권력욕 때문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말해 왔지만, 그가 설마 그런 방식으로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박정희는 나를 제명한 지 22일 만에, 그리고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한 지 10일 만에, 그것도 자신의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이 쓴 총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당한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71~172쪽.
새벽 4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지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간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했답니다.”
바다를 건너온 소식은 새벽처럼 서늘했다. 독재자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밤 가장 믿었던 심복의 총을 맞고 생을 마감했다. 모든 독재자의 말로가 그렇듯이 그의 최후 또한 참혹했다. 부산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니, 이제 광주와 서울에서도 일어나 4‧19처럼 국민의 힘으로 박정희 독재를 종식시켜야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10‧26 사태에 대해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80쪽.
아침 7시, 중앙청 기자실에서 박정희 서거 소식이 처음 발표됐다. 국민들에게 소식이 전달됐을 땐, 사건 발생 12시간이 지난 뒤였다.
1979.11.03. 박정희 국장
11월 3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박정희 국장이 거행됐다. 전국에는 1분간 사이렌이 울렸다. 유신 체제의 종말을 반기면서도, 권력의 공백이 가져올 혼란을 우려하는 국민들의 묵념이 이어졌다.
가장 선두에서 박정희에게 맞섰던 김영삼조차 이 자리에 참석했다.
10‧26 직후 모 목사를 비롯해 박정희에게 고통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독재자에게 조의를 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미 죽은 다음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박정희를 싫어했고, 가장 선두에서 박정희의 독재에 항거했으며, 마침내 정권타도를 외쳐 온 사람이었지만, 야당의 총재로서 박정희의 빈소를 찾았고 11월 3일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71~172쪽.
김영삼은 장례식 직후 5일 기자회견을 통해 “유신헌법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며 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3개월 안에 직선제로 개헌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직선제를 주장하던 그조차 권력의 공백기에 따른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나는 권력의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사회혼란이 가중될 것을 걱정했고, 그럴 경우 예측 못할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이미 4.19 직후 허정 과도내각은 신속하게 민주당으로 정권을 이양한 바 있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민주화 요구에 부응하고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는 과도기가 길어져서는 안 되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172~173쪽.
1979.11.10~24. 최규하 시국특별담화 발표
그러나 최규하는 김영삼과 생각이 달랐다. 최규하는 현행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선출된 새 대통령이 헌법 개정 후 선거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유신 헌법 개정에 대한 뜻은 함께 했지만, ‘유신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 실시’가 발목을 잡았다.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다 투옥됐던 민주청년협의회와 기독교청년협의회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을 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체육관에서 여는 대통령 선거를 막기 위해, 이들은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를 개최했다.
24일 오후 5시 경, 400여 명이 집결한 위장 결혼식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선거를 반대한다는 취지문을 낭독했다. 경찰들은 현장에서 주동자 100여 명을 붙잡았으며, 그중 14명은 고문을 당했다. 이들이 붙잡히면서도 외쳤던 말은 “유신체제 철폐, 통대보선 반대, 직선제 실시”였다.
담화는 원론적인 내용 같았지만 따져 보면 민의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매우 불길했다.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다 투옥됐던 ‘민주청년협의회(민청)’가 긴급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민청은 대학 제적생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계엄 하에서 집회를 여는 것은 불가능했다. 궁리 끝에 위장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87쪽.
한편 노태우는 이들을 ‘정부 측의 호의에 불법집회로 대답한 것’이라며 못마땅해 했다. 그는 이러한 집회를 ‘도전’으로 일컬으며 경계했다.
11월 10일 특별담화를 통해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신헌법 개정 방침을 밝혔고, 정부는 국민 화합 차원에서 시국 사건 복역자들을 대거 풀어 주었다. 정부 측의 이런 호의에 재야 세력은 불법집회로 대답했다. 11월 24일엔 소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 일어났다. 재야 인사들이 결혼식을 위장해 불법 집회를 열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특별담화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봉기를 선동했다. 국상을 당하고 비상계엄령이 퍼진 가운데 이런 도전이 일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노선과 자주국방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왔던 국군 장교단 안에서 이런 사회 분위기를 걱정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편, 231~232쪽.
최규하의 특별 담화가 발표된 날,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단 회의도 같은 날 열렸다. 이날 주요 안건은 새 대통령 선거에 당이 후보를 낼지 여부였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김종필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을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가 나라의 현안이었다. 당내 상당수 의견은 내가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신 대통령을 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때 정치의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군부도 나를 경계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으로 유신은 막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새 시대에서 페어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처삼촌인 박 대통령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그 자리에 대한 의욕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나는 “정당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과도정부의 대통령을 맡는 것은 객관성을 잃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럴 경우 여야간 피투성이 싸움이 예상되고 국민의 인식도 좋지 않을 것”이라며 대선 후보를 내지 말 것을 주장했다. 나는 이어서 “새 시대를 맞이하는 참된 싸움은 유신 체제 하의 대선이 아니라, 헌법 개정 이후의 대선에 있다. 그동안 공화당은 힘을 정비해서 진짜 대선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60~62쪽.
공화당은 이 회의를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에 후보를 출마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어 12일엔 당 총재직에는 김종필이 추대됐다.
13일 저녁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김종필은 최규하를 만났다. 그는 최규하의 현행 헌법 선거 입장에 동조하면서도, 개헌 헌법에 대해서는 김영삼과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았으니 현행 헌법으로 대선을 치르고 1년이나 1년 반 안에 헌법을 고쳐서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게 맞다. 새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한 번 중임할 수 있도록 한 제3공화국 헌법을 참조하면 힘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종필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어가는 최규하에게 실망감을 표했다.
11월 10일은 말하자면 나의 불출마와 최규하의 출마 의지가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이 의지에 따라 형성된 과도 질서는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개입하면서 짧게는 1979년 12‧12, 길게는 1980년 5‧17까지 이어지다 파괴됐다.
(중략) 시간이 흐르면서 최 대통령의 마음도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최 대통령은 나에게 “지금 정부는 과도정부가 아니다. 안보, 경제 불안정 등 헤쳐나가야 할 일이 많다”라는 말을 했다. 유신헌법에 의한 임기를 끝까지 다 채우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그럴 경우 최 대통령은 1984년까지 대통령직에 있게 된다. 최 대통령의 심경 변화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알만했다. 권력의지가 약했던 최규하가 대통령직에 목을 걸기 시작한 것은 신현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최규하에게 ‘그 욕심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고 싶었으나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최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과도정부라는 표현 대신 ‘위기관리 정부’라는 애매한 표현을 썼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63~65쪽.
1979.12.06~08. 제10대 대통령 선출
6일 오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10대 대통령 보궐선거가 열렸다. 단독 후보로 추천된 최규하는 출석한 대의원 2549명 가운데 2465표를 얻어 당선됐다. 그는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26일까지 재임할 수 있으나, 지난달 10일에 발표한 담화에 따라 빠른 기간 내 헌법 개정 및 11대 총선을 실시해야 했다.
이틀 뒤 8일, 최규하는 유신 체제를 지탱해온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다. 이에 따라 많은 정치범들이 석방 및 복권됐다. 여기엔 226일 만에 연금에서 풀려난 김대중도 있었다.
‘대행’이란 꼬리를 뗀 최 대통령은 다음 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를 12월 8일 0시를 기해 해체했다. 4년 6개월 만에 긴급조치 9호가 사라졌다. 형 집행 정지로 집에 갇혀 있던 나도 연금에서 풀려났다. 226일 만이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388~389쪽.
시절은 따뜻한 봄을 향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국을 다시 얼어붙게 할 군대 발(發)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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