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 민주정부3기 성공 향한 다짐
87년 대선과 2000년 총선, 2002년 대선으로 가는 ‘길’
세 번의 선거, 세 번의 인연, 세 번의 노무현을 말하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글 김영배 / 정리 윤진석 기자, 한설희 기자]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이다.
김대중(DJ) 국민의정부, 노무현 참여정부, 문재인 정부 모두 한반도 봄의 주역들이다. 민주정부 1‧2‧3기 모두 고되고 어렵지만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의 강을 건너기 위해 저마다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징검다리를 놓았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이던 나는 정상회담 현장의 책임을 맡아 유례없을 순간을 함께했다. 반세기 만에 분단의 경계선을 넘으며 동트는 평화의 여명을 열어간 그날의 가슴 벅차고 뜨겁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민주정부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87체제가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올해가 6월 항쟁 33주년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감회가 새로워진다. 그동안 나는 참여정부 이후 두 번의 성북구청장을 역임하고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다. 21대 4‧15 총선에서는 성북구갑에 출마해 처음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177석 거대 정당의 일원으로서 국회 개원을 앞두고는 민주정부 3기의 성공을 바랐다. 작은 밀알의 사명을 품고 나도 그 길에 일조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가 꿈꿨던 여정의 길. 출발선은 어디일까. 기준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노무현 없는 노무현 시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그 끝에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난달 26일 여의도 국회를 찾아온 기자들에게 ‘세 번의 선거, 세 번의 인연, 세 번의 노무현’에 대해 들려줬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1주년을 기리기 위해 경남 봉하 마을에 내려갔다 온 지 며칠 뒤였다. 여운이 가시지 않던 차,
- 87년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인연인지요.
“만난 게 아니고 정확히는 제가 본 거죠.”
첫 질문을 받고는 소소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노 대통령에 대해 풀어놨다. 인터뷰 30여 분간이 노 대통령으로 시작해 노 대통령으로 끝났다. 다음 일정 차 서둘러 마쳐야 했지만 나름으로 민주정부 과정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87년으로 거슬러 이야기는 시작된다.
1. 첫 번째 선거
87년 12월, 대선 가는 길
87년 그해 나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86학번이었다.
스물한 살,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학생운동을 했다. 때는 6월 10일, 그날은 전두환 정권이 장충동 체육관에서 후계자를 지명한 날이었다. 독재 정권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국민의 명령을 거슬러 4‧3호헌 조치를 강행했다. 그 절차에 따라 6월 10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고 간접 선거 방식으로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같은 날(6월 10일) 이에 저항하는 대규모 집회가 광범위하게 열렸다. 故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들끓던 민심이 체육관 선거 강행을 목도하며 폭발에 이르렀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주관 하에 범대중적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YS‧DJ(김영삼‧김대중)계 중심의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등 제도권,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시민단체, 전대협(전국학생대표자협의회) 등 학생운동, 천주교 정의사회구현제단 등 종교계가 모여 하나로 힘을 규합했다. 시민들의 결합은 화룡점정이었다. 넥타이 부대를 비롯해 비폭력 저항운동 상징인 꽃을 건네며 시가행진을 응원하는 어머니들까지, 거리를 뒤흔든 함성과 열망이 군사독재 정권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했다. 기에 눌린 전두환 정권은 마침내 백기를 흔들었다. 6월 29일 노태우 지명을 철회한 전두환 정권은 하는 수 없이 국민의 직선제 명을 받들었다. 여세를 몰아 개헌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국민 투표를 거쳐 87헌법 체제가 완성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2월 19일 13대 대선은 양김 단일화 실패로 인해 4자 대결(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로 각축전을 벌였다. ‘내 손으로 뽑는 첫 번째 선거’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민적 관심이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부정선거가 광범위하게 이뤄질 것을 우려하는 시각이 팽배했다.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처럼 관권 선거, 금권 선거로 치달을 수 있다는 불안들이 많았다.
‘이번 선거만큼은 공정하게 치르자.’ 공정선거 감시단이 대규모로 꾸려졌다. 부재자 투표가 있었지만 귀향 운동이 전개됐다. 집에 가서 투표하고, 웬만하면 공정선거 감시도 하자, 선거 당일 야당(YS 통일민주당, DJ 평화민주당)으로부터 추천받아 투개표 감시단으로 등록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전대협 차원에서는 서울을 4개 지부별로 나눠 감시단을 조직했다. 고려대는 동부지부였다. 나도 참여했다. 대선을 하루 이틀 앞두고 고향별로 버스를 나눠 탔다. 내 고향은 부산이었다. 고려대 앞에서 4대가 대기했다. 다른 학교 학우들과 함께 모여 버스에 올라탔다. 부산 지역 인솔은 내가 맡았다. 버스가 부산대 운동장에 도착하자 환영식과 함께 국본 주관의 집회가 열렸다. ‘이번 선거만큼은 공정하게 치르자.’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한 명이 연단에 올라왔다. 웬만하면 인사말을 짧게 하던데, 이 양반은 아니었다. 좀처럼 내려가지를 않았다.
“저 사람 뭐냐?”
“노무현이래.”
처음으로 노무현(이하 노통) 대통령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당시 노통은 부산 국본 상임위원장이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신문 지면을 통해 더러 노무현 변호사라는 이름을 접하긴 했다. 실물은 처음이었다. (<시사오늘>설명 : 이 시기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대우노동자 이석규 씨의 사인을 규명 운동하다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고 있던 때였다.)
노통은 이날 40여 분간 연설을 이어나갔다. 겨울이라 너무 추웠다. 서울서 내려와 부모님 계신 집도 가야 했다. 좋은 말인 건 알겠는데 ‘심하네, 심해’ 투덜댔다. 내심으로는 ‘좀 대단한 사람이네’, 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노통의 첫 모습이다.
2. 두 번째 선거,
2000년 16대 총선으로 가는 길
두 번째 기억은 노통이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운영했을 때로 올라간다. 88년 13대 총선에서 부산동구에 출마해 당선된 노통은 92년 재선 도전에 실패한 뒤 93년 9월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이하 실무연구소)를 열게 된다. 참여시대를 여는 지방자치 분권과 자율을 토대로 시민이 주인 되는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 노통의 꿈이었다. 지방자치 선거는 박정희 쿠데타 이후 단절돼오다 87년 6월 항쟁과 문민정부를 거치며 부활하기에 이른다. DJ의 역할도 컸다. 지방자치제 전면 도입을 촉구하며 90년 10월 단식투쟁에 돌입한 DJ는 이듬해 실시하기로 약속받고 난 뒤에야 단식을 멈췄다. 그에 따라 서울시의회 같은 기초광역시의회 선거가 91년 처음 실시될 수 있었다. 단체장 선거는 노태우 정권이 미뤄온 탓에 못하다 YS 문민정부인 95년 6‧27 첫 전국 동시지방자치 선거를 통해 부활했다.
나는 제1회 지선을 치른 것을 계기로 진영호 성북구청장의 비서관을 맡고 있었다. 지자체에 몸담다 보니 도움도 받고 공부도 필요해 실무연구소와는 자연스레 왕래할 일이 생겼다. 정치인이 열었다는 것부터가 특이한데다 굉장히 진보적이라 여겼다. 소장은 김병준 (국민대)교수가 맡고 있었다. 강원도지사를 지내다 21대 국회에 입성한 이광재 의원도 그곳에 있었다. 같은 대학 선후배이자 학생운동을 하며 알고지낸 안희정‧여택수 선배도 함께했다. 특히 여 선배와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내게 노통은 괜찮은 정치인, 청문회 스타 정도였다. 88년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 청문회에서 노통은 정경유착 장본인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의로 국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그러던 중 내게도 강렬함으로 다가온 계기가 생겨났다. 이 얘기를 하려면 노통의 선거 도전기부터 전해야 한다. YS와 함께하다, 삼당 합당에 반대하며 소수 야당 의원으로 남은 노통은 이후 줄곧 낙선의 길을 걸었다. 95년 부산시장에 출마했을 때도 낙선, 이듬해 서울 종로에 도전해서도 낙선을 하며 92년 때까지 연거푸 3번을 떨어졌다. 그러던 노통이 6년 만에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98년 종로 재보선에 출마해 당선되면서다.
짧은 임기를 마치고 얼마 안 있어 다시 2000년 16대 총선을 맞이했다.
‘종로에 나가겠지.’
노통의 행보를 가늠하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종로에 재도전하면 현역 프리미엄도 있으니 당선되기가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웬걸. 이 양반의 선택은 달랐다. 종로가 아닌 부산북강서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설마, 설마 내려갈까 했는데 진짜 내려간 거였다. 이게 뭐지? 쉬운 길 놔두고 왜? 나뿐만 아니라 실무연구소에 몸담던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였다. 힘이 돼줘야겠다, 밀어줘야겠다, 내 고향이 부산이니 나도 내려가자. 북강서에 내려가 그의 선거를 돕자.
아직도 북강서 체육관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노통의 모습이 생생하다.
“호남에서도 콩이면 부산서도 콩입니다. 부산서도 팥이면 호남에서도 팥입니다. 그게 어떻게 다릅니까. 나는 오히려 부산 시민들이 나만 도와준다면 호남 표를 가져올 자신이 있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영호남 이렇게 갈라지면 안 됩니다…!”
전율이 휘몰아쳤다. 명연설에 체육관 안이 환호의 도가니였다. 대단한 열기였다. 기세대로라면 이기는 선거였다. 나는 정말이지 이기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노무현은 광주 노씨’라는 등 상대 측에서 노골적으로 지역주의 감정을 조장했다. 결국 졌고 나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한편으로 부산 말로 치면 ‘쪽팔렸다.’
‘바보 노무현’
종로에 그냥 나갔다면 붙었을 텐데, 왜 북강 서에 나와서는…. 정말 ‘바보 노무현’이 따로 없었다. (<시사오늘>설명 : 훗날 이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은 그를 상징하는 대표 호칭이 된다.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도전하고 실패해도 또 도전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노무현’을 상징하는 노란색 상의 저금통을 모아 십시일반 후원하는 캠페인이 생겨났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정치적 팬덤 현상이 진영 내 일각에서 신드롬처럼 일어났다.)
3. 세 번째 선거,
2002년 16대 대선 가는 길
노통 입장에서 나를 구체적으로 안 것은 DJ 국민의정부에서 치러진 2002년 16대 대선에서였다. 노통은 그해 4월 28일 새천년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내 국민경선에서 승리하며 대선후보가 됐지만 ‘YS 시계사건’ 이후로 상승세였던 인기는 꺾이고 말았다. (<시사오늘>설명 : 구시대 척결을 외쳐 인기를 모았던 노 후보는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후 민주세력 간의 대통합을 강조하며 YS의 상도동 자택을 찾았다. YS는 노 후보를 정치권에 발탁한 장본인이었다. 통일민주당 시절 YS로부터 받은 시계를 손목에 차고 온 노 후보는 YS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하지만 이는 호남 등 민주당 지지층의 외면을 불러왔다.)
당시 노통은 여당 후보임에도 야당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이어 정몽준 국민통합 21후보에도 밀리며 3위로 떨어질 정도로 급락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한 여파도 컸다. (DJ의 아들들인 김홍업-김홍걸을 둘러싼 비리가 불거지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민주당은 서울에서 단 한 석도 못 건지고 전패했다. 경기도에서도 박살나고 호남과 제주 등에서만 일부 얻을 정도로 전멸하다시피 한 선거였다. 노통은 당내 ‘대선후보 책임론’까지 일면서 사면초가의 처지로 내몰렸다.
지방행정 연구 분야의 미국 유학길을 마치고 그해 7~8월 경 귀국한 내가 볼 때는 적잖이 답답한 마음이었다. 당 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경쟁했던 김근태 후보든, 노무현 후보든 모두 민주화 운동 세력 아닌가, 적어도 우리들은 권력만 좆는 모리배처럼 돼서는 안 되지 않나, 설사 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통성을 갖는 길이다, 제대로 된 수권야당으로 당을 정비해야 할 땐데 왜 집안싸움만 하나, 본선에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합법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이 당시의 내 주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선배들을 찾아가며 주장한 게 ‘노무현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자’ 는 얘기였다. 하지만 내 존재감은 미비한 수준이었다. ‘넌 뭘 몰라. 1년 반이나 해외 나갔다 온 놈이 뭘 알아’ 핀잔을 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김근태 계인) 이인영‧김현수 선배 만나고 안희정 선배 만나고 등등등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좌절하고 있던 찰나, 대선을 2~3개월 여 앞둔 9월 말이었을 거다. 386 국회의원 일부가 ‘노무현 캠프’에 들어가면서 분위기는 반전되기에 이르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당을 바로 세우자’라는 움직임이 전개된 것이다. 합류한 386 인사들을 보면 ‘이인영‧우상호‧임종석‧오영식’ 등으로 잘 아는 선배들이었다.
‘잘됐다.’
나도 따라 후보 선대위로 합류했다. 당시 후보의 비서실장으로는 신계륜 의원이 임명됐는데, 나는 후보 비서실장을 보좌하는 역할로 결합했다. 운이 좋게도 후보 비서실장의 보좌관이니 늘 노통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9월 말부터 12월까지 대선 기간 동안 함께 다닌 것이다.
그러나 노통이 본격적으로 나를 알게 된 것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11월 초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면서다. (<시사오늘>설명 : 후보단일화 협상은 11월 3일 노 후보가 정 후보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노 후보는 서울국민참여운동본부 발대식에서 “이회창 후보를 두려워하는 많은 국민들이 '단일화 안하고 이기겠냐' 이렇게 걱정하고 있다”며 단일화에 나설 수밖에 없음을 피력했다. 이후 정 후보도 제안을 받아들여 7일 협상단이 구성됐고, tv토론과 국민경선 여론조사 방식 등을 둘러싼 후보단일화 협상 논의가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1차 협상 팀장은 김한길 당시 선거캠프 미디어본부장이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2차 협상은 신계륜 후보 비서실장이 맡았다. 정몽준 후보 측에서는 민창기 당시 국민통합21 홍보팀장이 나섰다. 통합21 협상단에는 김민석 당시 총괄선대본부장도 속해 있었다. (<시사오늘> 보충 설명 : 양측의 협상은 합의내용 유출 논란 등으로 교착 상태에 놓이다, 후보등록일인 27, 28일을 일주일여 앞두고 새롭게 협상단을 꾸리게 됐다. 노 후보 측에서는 신계륜‧김한길‧홍석기 등이, 정 후보 측에서는 민창기‧김민석‧김행 등으로 구성됐다. 당시 선대위 대변인은 민주당은 이낙연 의원, 국민통합21은 김행 현 위키트리 부회장.)
2차 협상단을 중심으로 11월 25일 후보 단일화 발표를 목표로 일주일간의 협상에 들어갔다. 재협상은 스위트 그랜드호텔에서 3일을, 나머지 3일간은 강남구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서 진행했다.
2차 협상 과정의 실무는 나와 김경수 당시 선대본부 전략기획국 부국장이 도맡았다. 호텔에 갇혀있다시피 한 협상단을 위해 우리 둘이서 먹을 것도 공수해오고 담배도 사다주고 연락책 연결부터 보안 등 여러 실무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노통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 내심 신계륜 비서실장이 노통에게 중간보고를 하는 과정을 듣다 굉장히 놀란 게 있었다.
“아니, 신 실장님한테 다 위임했잖아요. 위임했으면 그냥 신 실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왜 저한테 이런 걸 보고합니까.”
옆에서 통화하는 걸 들으니 노통은 그렇게 말하는 거였다. 정몽준 후보는 일일이 다 간섭했던 것 같은데 노통은 몇 가지 중요한 틀만 빼고는
“양심 걸고 알아서 하시면 되잖아요. 뭐할라꼬 보고합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그 모습을 보고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정말 깜짝 놀랐다.
또 하나.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게 후보단일화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였다. 그날(2002년 12월 24일) 아침에 양측은 국민여론조사에 의한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뒤 여론조사 2개 업체(리서치앤리서치, 월드리서치)를 선정했다. 이후 조사하고 발표하는 것까지 모두 당일치기로 일사천리 진행됐다.
결과를 발표할 장소는 협상단이 묶고 있던 르네상스 호텔 토파즈홀이었다. 장소가 정해지자 언론사에 전화해 발표 장소를 알리고, 혼자 어두컴컴한 방안에 앉아있었다. 그때 비장하면서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던 것 같다. 아직도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25시 정각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여론조사업체에서 결과가 담긴 봉인된 투표 보관 봉투를 들고 내게 전달하는 순간, 카메라 셔터 소리들이 한꺼번에 파파파박-- 터졌다. 머리털 나고 그렇게 많은 기자들을 처음 볼 만큼 어마어마했다. 그때 터졌던 셔터 등을 생각하면 외신은 물론 남북정상회담 수준 이상으로 왔던 것 같다. 봉인지를 받아들고 서 있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신계륜 의원한테 전달하자 정몽준 후보 측의 민창기 팀장과 함께 그 즉시 봉인지를 뜯고 발표를 시작했다. 하나는 별 차이 없어서 무효, 다른 하나는 노통이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 순간 여기저기서 와아아아--. 기자들도 와아아아아. 근데 난 기쁨에 앞서 다리에 힘이 쫙 풀리며 주저앉고 싶은 거였다.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어쩌나, 역사 앞에 뭐라 할 것인가. 물론 내 잘못인 것도 아니고, 책임자 위치인 협상단도 아니지만 실무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나. 극도의 긴장감으로 경직돼있다, 이겼다는 발표를 듣게 되자, 비로소 안도의 숨이 나오며 다리 힘이 쭉 풀린 거였다.
(<시사오늘>설명 :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 앞서 양측은 △한 후보가 단 0.1%라도 뒤지면 패배를 수용할 것과 △두 후보 중 한 후보가 이기는 것으로 나와도, 그 결과치가 최근 2주간 언론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가운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 중 최저로 나온 것에 못 미칠 경우 해당 조사를 무효화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결과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한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25일 자정 발표된 <리서치앤리서치>조사에서는 노무현 46.8%, 정몽준 42.2%인 것으로 집계됐고, 이회창 후보의 최저선인 30.4%를 넘어 유효 결과로 처리했다. 다른 조시기관인 <월드리서치>는 노 후보가 38.8%로 정 후보(37%)를 앞섰으나 이 후보의 최저선보다 미달돼 무효 처리된 것으로 나왔다.)
또 잊히지 않는 것. 단일화 협상 당시를 떠올리면 개인적으로는 후보 간 심야회동이 생생하다. 방송과 신문 전역을 타고 장안을 들썩거리게 한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노무현-정몽준’의 역사적 소주샷이었다. 두 50대 대선주자들이 만나 딱 한 잔한 것. 협상 초창기 때의 일이다. 11월 15일 전격 심야회담에 나선 두 후보는 자정이 지나서야 단일화 원칙을 합의하기에 이른다. 이후 소주샷을 하는데, 장소가 어디냐면 여의도 '거해'라는 일식집이 있던 건물 앞 포장마차였다. 지금도 회자되는 곳으로, 그 장소를 정한 게 나였다. 바로 거기서 두 후보가 소주잔으로 러브샷하는 역사적 사진이 나온 것이다. 국민들이 이를 보자, 지지율도 단숨에 치솟았다. 한방에 20%에서 40%로 올라갈 정도였다. 그 같은 역사적 사진의 배경이 된 장소를 선정한 나로서는 너무도 뿌듯했다. 지금도 제일 자랑거리 중 하나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이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후 노통을 따라 전국 유세 현장을 돌아다니고 선거를 치렀다. 참여정부가 개막해서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들어가게 됐다. (<시사오늘>설명 : 당선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유세 기간 불신 등 감정의 골이 생기면서 국민통합 21의 정몽준 대표는 선거를 하루 앞둔 12월 18일 밤 10시 30분께 노 후보에 대한 후보단일화 지지를 전격 철회하고 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나라당 이회창 캠프 측은 ‘이겼다’며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반면 파국을 맞은 노 후보 측은 초상집 분위기였다고 한다. 관련해 지난 4월 <시사오늘>과 대화한 노 후보 측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 노 후보에게 정몽준 자택에 찾아가자 제안했고, 이 여파로 수세를 반전시키는 대역풍이 일어나면서 극적 승리를 할 수 있었다는 전언이다.)
생각나는 또 하나의 소소한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청와대 정무1비서실로 막 배정돼 집기를 들이고 있을 때다. 정신없는 와중에 갑자기 노통이 내려온 거였다. 보통은 대통령이 행정관들 근무하는 사무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던데, 격의 없고 겸손한 모습의 노통은 여기서부터 달랐다. 그렇지만 막 청와대 근무를 시작한 나는 군기가 바짝 든 상태였다.
“자네, 신계륜이한테서 쫓겨났나? 껄껄껄.”
혼자 막 웃는 거였다. 약간은 썰렁한, 노통 특유의 전형적인 경상도식 농담이었다. 그 웃음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4. 참여정부 後
민주정부 3기의 성공으로 가는 길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다. 노통의 모습과 그 시절 시대정신을 복기하면 국민들은 그랬던 것 같다. ‘산업화 등 경제성장은 어느 정도 이뤄졌다.’ ‘이제는 좀 더 민주화되고, 세대교체가 됐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을 비롯해 이회창 총재마저 낡은 권위주의 리더십으로 비쳤던 때다. 노통과 정 후보가 당시 높은 인기를 모았던 것도 정당 간 차이는 있겠지만 50대 젊은 리더십인데다 한 사람은 정치에서, 다른 한 사람은 경제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권위주의 청산, 민주주의 리더십의 정착이 국민 바람의 시대정신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를 연 노통은 이에 부합하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노통의 성공과 좌절의 요인 모두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높은 열망으로 시대정신이 실현되길 원했지만 강고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 역시 거세기 이를 데 없었다. 정치권은 물론 경제 세력, 재벌 체제, 언론, 검찰 등 견고한 기득권 동맹이 노통에 맞섰다. 성숙한 정치적 기반을 갖추기도 전에 거대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의 벽을 넘기에는 참여정부 힘은 미약했다. 그래서 노통이 여러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아닌가 평가한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이 점을 너무 잘 알기에 굉장히 신중하고 유능한 리더십을 구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국정운영에 있어 소위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전략적으로 잘 운영하는 이유도 참여정부의 성공과 좌절의 평가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가늠된다. 학습효과를 반추하며, 또 그 바탕위에서 노통이 남긴 미완의 꿈을 잊지 않고 실현해나가는 것이리라.
노통의 꿈, 철학은 어렵지 않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당당하게 주권자로 살아가는 것, 촛불혁명과 검찰 등 권력기관 개혁에서 알 수 있듯 만인이 평등한 법, 다 같이 잘 사는 포용국가, 이런 게 우리 시대 화두라면 그 당시 노통이 꿈꿨던 꿈들이 씨앗이 돼 뿌려지고 꽃을 피우며 자라고 있음을 민주정부 3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참여정부 당시 금융자본의 비대화, 생산적 부분이 위축되면서 비정규직이 양산된 것 등은 노통이 해결할 수 없는 신자유 주의적 세계화 흐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까지도 민주정부 3기에서 보완해나가야 하는 과제라 할 수 있겠다. 크게 보면 지금부터가 '노무현 없는 노무현 시대'가 본격화됐다고 말하고 싶다. 노통의 제자들이 장성한 정치인이 돼 정치 무대 한복판에 등장했다. 촛불혁명을 통해 ‘노무현의 꿈’이 실현될 출발점에 선 것이다.
노통이 꿈꾼 상식과 원칙의 시대,
시민의 시대는 이제부터다.
‘노무현 없는 노무현 시대의 개막!’
p.s. 김영배 의원은…
1967년 3월 8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 금정 중학교와 브니엘 고등학교를 거쳐 86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과수석으로 입학했다. 새내기 시절 5‧18광주민주화운동 자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몰랐던 진실에 눈을 뜨고 학생운동에 뛰어든다. 이후 86년 건대 항쟁 투옥, 87년 6월 항쟁, 88년 통일운동, 89년 정경대 학생회장, 91년 전대협 산하 서총련 중앙집행위 등에 가담‧활동했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한 적도 있지만 지방자치 선거 참여를 계기로 97년 만30살의 나이로 전국 최연소 성북구청장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성북구청장 선거 총책임을 맡는다. 2000년에는 지역주의 타파에 힘쓴 노무현 후보에 감동해 그의 부산북강서을 총선을 돕기도 했다. 이후 고려대 정책대학원에서 도시 및 지방행정학을 수료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정부와 행정, 국가론 등을 공부했다.
2002년 귀국 후 노무현 대선후보 캠프에 합류했고 참여정부에서는 청와대 정책조정관실과 민정비서관,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준비 당시 행사기획비서관을 역임한다. 참여정부 후에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중심으로 창당했던 국민참여당에서 정책 분야 등을 연구했고, 시민주권 사무처장, 노무현재단 기획위원, 민주당 중앙위원 등을 맡았다. 2010년 민주당 소속으로 민선5기 지방선거에서 성북구청장으로 당선된 후 2014년 민선6기 재선에 성공한다.
이후 마을공화국과 풀뿌리 연구의 경험을 살려 더불어민주당 전국자치분권민주지도자회의 상임대표, 전국자치분권개헌 추진본부 상임대표 등을 지냈다. 2018년에는 민주당 정책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거쳐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책조정비서관과 민정수석실 비서관을 지낸다. 현재는 21대 국회의원 성북구갑 국회의원이자 더불어민주당 원내부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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