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진 날은 당연히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30여 년에 걸친 군사독재 정권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이 땅에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1993년 2월 25일의 문민정부 수립도 건국에 버금가는 제2의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삼(YS) 대통령과 우리도 이런 각오로 국정에 임했다. 즉, 30여 년간 쌓여온 군사정치 문화의 적폐를 청산하고, 각종 개혁 조치를 통해 나라를 근본부터 바꾸겠다는 각오를 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이런 결의를 담아 제2의 건국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셨는데, 93년 8일 16일 임정 요인 다섯 분의 유해를 봉환하면서 발표한 특별 담화문에서 제2의 건국을 이룩해 나가자고 당부하셨고, 1994년 대통령 취임 후 첫 신년 휘호로 ‘제2의 건국’을 쓰셨다.
국가사회 전반을 근본부터 개혁하는 제2의 건국은 몇가지 분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역사바로세우기이다.
역사바로세우기는 30여 년의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는 동안 굴절되거나 왜곡된 우리 역사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크게는 일제 잔재 청산, 민주화운동 재정립, 5·18, 12·12 단죄의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일제 잔재 청산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부터 시작됐다. 문민정부 출범 당시 위안부 문제가 한일간 최대 외교 현안이었고 대응 방안을 놓고 우리 사회도 다양한 논란이 이어졌다.
취임 직후인 93년 3월 13일, 김 대통령은 ‘물질적 보상은 요구하지 않을테니 일본은 반인륜적 범죄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와 인류 앞에 사죄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우위를 확고하게 세운 매우 뜻깊은 선언이었다. 마침내 그해 8월 4일 일본은 처음으로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고, 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총리가 일본의 식민 지배에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도 일제 잔재 청산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그때까지도 일본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앞을 버티고 서있었다. 1993년 8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조선총독부 청사를 해체하라고 지시했고, 1995년 8월 15일 청사 철거를 시작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정궁 경복궁이 광화문 거리에서 훤히 보이는 오늘날의 모습을 되찾게 됐다.
‘애국선열의 유해 봉환’은 93년 8월 3일, 상해 임시정부 박은식, 노백린, 김인전, 신규식, 안태국 다섯 분의 유해가 상해를 떠나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문민정부 이전까지 고국으로 모셔온 독립운동가의 유해는 총 23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 이후 유해 봉환 사업이 본격화되어 재임 5년 동안 총 30위가 고국 땅에 안장됐다.
민주화 운동의 재정립은 정권 차원의 역사 전쟁이었다. 김 대통령은 1993년 4월 19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수유리 4·19 묘역을 참배하고 "4·19혁명은 부정부패와 불의에 대항해 정의 사회를 구현하려는 위대한 혁명이었다”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이어 1995년 4월 4·19 묘역을 국립묘지로 성역화하였고 그해 7월 4·19 희생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도록 했다.
1993년 5월에는 김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 13주년을 맞이하여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문민정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민주 정부다”고 공식 천명했다. 이로써 우리 현대사의 큰 비극이자 아픔이었던 80년 광주 5·18은 우리 역사에 민주화 운동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이후 95년 12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졌다. 97년 4월 5·18을 국가 법정기념일로 지정해 정부가 공식적인 행사를 주관하게 됐다. 5월에는 5·18묘역의 성역화 사업을 완공하였다.
93년 6월 10일에는 6월 항쟁 6주년을 맞아 김 대통령은‘6월 항쟁을 명예혁명’으로 규정, 명료하게 재평가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러한 일련의 행보를 통해서 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해 우리 역사 속에 온전하게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역사바로세우기의 정점은 ‘12·12 군사반란의 주역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단죄’였다.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을 폭로가 있었고, 김 대통령은 즉각 철저한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검찰 수사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 부정축재 사실이 드러나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학살자 단죄 요구로 이어졌다. 11월 24일 김 대통령은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검찰은 특별수사부를 설치해 12·12와 5·18에 대한 전면 재수사에 들어갔다.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기 징역,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이 중형이 확정됐다. 이로써 불법적인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반드시 처벌된다는 역사 바로세우기의 상징적인 전범을 세웠다.
제2의 건국이라 할 수 있는 문민정부 업적을 정치개혁 분야에서 살펴보면, 하나회 척결을 가장 큰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하나회는 80년 신군부 쿠데타를 주도한 우리 군내 막강한 사조직으로 군 핵심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집단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내외 언론과 지식인들도 문민정부가 군과 적당히 동거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취임 12일 만인 3월 8일 하나회 출신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의 전격 교체를 시작으로 5월 24일 ‘5·24 숙군’조치까지 단 석 달 만에 군복을 벗은 장군이 18명이었고, 떨어진 별만 무려 40개에 달했다.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군 개혁이었다. 이로써 군부 독재체제의 핵심 세력이자 현존하는 쿠데타 위협 세력이었던 하나회를 완전히 해체했다. 군부에 대한 문민적 통제를 완벽하게 확보하여 이 땅에서 쿠데타의 망령을 영원히 추방하였다. 우리 군대가 비로소 정권의 군대에서 국민의 군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금도 남미나 동남아시아, 중동의 수많은 나라들이 민주화 이후에 극도의 정치 불안에 빠져들거나 군부가 재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비춰볼 때, 김 대통령이 취임 직후 군부를 정치에서 완벽하게 퇴출한 것은 실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공직자 재산공개도 우리 사회 개혁의 새로운 틀을 제시한 것이다.
취임 이틀 후인 2월 27일에 문민정부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나와 내 가족의 재산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의 재산 공개는 깨끗한 정부, 깨끗한 사회를 구현하는데 대통령부터 솔선수범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자 문민 개혁의 신호탄이었다.
대통령의 재산 공개는 장·차관 등 고위 공직자, 국회의원의 재산 공개로 이어졌고, 5월 20일 ‘공직자윤리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됐다. 문민정부 개혁법안 1호였다. 김 대통령의 재산공개 선언에서 시작된 공직자윤리법은 지금도 엄격하게 시행되면서 공직사회 윤리성 강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정치개혁을 위해 제도적 틀을 바꾼 3대 정치개혁 입법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1994년 3월 15일, 김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정치개혁 관련 법률 공포안 서명식을 가졌다. 이날 공포된 법률은 통합선거법, 정치자금법 개정안, 지방자치법 개정안 등 3개 법안이다. 깨끗하고 돈 안 드는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정치개혁 목표에 맞춰진 획기적인 법안이었다.
‘통합선거법’은 선거공영제를 확대해 후보에 대한 국고지원액을 대폭 늘린 대신에 부정 선거운동에 대한 벌칙은 대폭 강화했다. 선거운동 방식도‘돈은 묶고 입은 푼다.’는 원칙을 세우고, 고비용 운동은 철저하게 제한하되 돈 안 드는 캠페인은 무제한 허용했다. 지금은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후보들의 TV토론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또한, 과거에는 정부가 정략적으로 결정하던 선거 날짜를 법정화해서 정치의 예측 가능성을 높였다. 지금 시행하고 있는 대선, 총선, 지방선거일이 그때부터 법으로 정해진 것이다.
‘정치자금법’은 정치부패의 원천이었던 정치자금의 투명성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후원회를 확대하고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늘렸다. 특히, 무기명 영수증을 통해 야당에도 안심하고 정치자금을 후원하게 한 것은 획기적인 조치였다.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헌정사상 처음으로 95년 6월에 4대 지방선거를 동시에 치르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시·도지사와 시장·군수 수백명에 대한 임면권을 포기하고,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통합선거법을 비롯한 정치개혁 3개 법안은 야당조차도 혁명적인 법으로 평가할 정도로 전향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때 마련된 깨끗한 정치, 돈 안드는 선거의 제도적 틀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법안이 공포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기존의 집권여당이 누려왔던 프리미엄을 포기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여당 내 반발이 굉장히 심했다. 수많은 여당 의원들은 ‘이러면 다음 선거를 못 치른다. YS는 대통령을 마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다 망하라는 말이냐?’면서 강력하게 항의해왔다. 차마 대통령 앞에서 항의는 못하고 나한테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나는 대통령을 대신해 기꺼이 그 화살을 감내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의식의 변화를 주문하고 설득하면서 정치개혁 입법을 적극 뒷받침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치개혁 3대 법안이 서명·공포됨에 따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제도 구축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제2의 건국이라 할 수 있는 문민정부 업적을 경제 분야에서 살펴보면, 단연 금융실명제 실시이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45분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및 비밀 보장에 관한 긴급재정명령권’을 발동한다. 개혁 중의 개혁으로 평가받았던 금융실명제가 전면 단행된 것이다.
금융실명제 실시는 3공에서 5공, 6공 때까지 줄곧 시행을 검토했지만 경제적 충격 우려와 국민 반발 등을 이유로 실현하지 못한 국가적 개혁 과제였다. 김 대통령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이렇게 빨리, 전격적으로 시행하리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우리 경제는 지난 30년간 고도성장을 추진해오는 과정에서 비(非)실명 금융거래 관행을 유지해왔다. 그 결과 음성, 불로 소득이 만연하고, 지하경제가 비대해지면서 정상적인 나라 경제를 위협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이 심각했다. 부정 축재 자금, 부동산 투기 자금, 범죄 조직 자금 등이 가·차명 예금으로 세탁되어 유통되었고, 일부 부유층의 탈세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었다. 훗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천문학적 부정축재 자금도 가·차명으로 은닉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금융실명제는 시행 초기에 재벌 기업과 기득권층의 반발이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정치는 물론 경제와 사회 시스템 전반을 투명하게 선진화하는 패러다임의 일대 변화이자, 개혁의 시발점이 됐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정보화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틀을 구축한 것도 중요한 업적이다. 정보화 사업 추진을 위해 94년 정보통신부를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해 국가 차원의 정보화 추진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전국적으로 깔기 시작하였고, 전자정부 시스템 도입을 위한 전산화 등에 박차를 가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이를 계승 발전시켜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정보화 선도 국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사회 분야에서 근본 틀을 바꿨던 문민정부 업적도 많다. 사법개혁의 물꼬를 튼 것도 대표적인 성과였다. 당시만 해도 송사에 휘말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그만큼 변호사 수도 적었고, 서민들한테 법률서비스의 문턱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려서 누구나 저렴하게 법률서비스를 받도록 하자는 취지로 사법개혁을 추진했다. 법조계와 협상을 통해 연평균 100명이던 법조인 선발인원을 순차적으로 늘려서 2000년 이후에는 1000~2000명 수준까지 가기로 합의했다.
이후 개혁안은 조금씩 실행돼서 2009년에 첫 로스쿨이 개교했고, 지금은 25개 로스쿨이 매년 2000명 안팎의 변호사를 배출하고 있다. 1500여명의 전교조 해직교사들을 복직시키고, 민예총이나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공식적으로 등록해 문화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도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이처럼 문민정부 5년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정신을 바로세우는 역사바로세우기에서 시작해서 하나회 척결, 정치개혁 입법, 금융실명제 실시, 정보화 고속도로 구축과 같은 획기적인 제도 개혁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근본 틀을 바꾸는 수많은 업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만들어진 각종 제도들이 이어져 오면서 지금도 우리 사회를 튼튼하게 지탱하고 있다. 나는 제2의 건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지난 15일 故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9주기를 맞아 ‘제2의 건국 김영삼’을 주제로 진행된 <시사오늘> 특집 기사에 대한 상도동계 좌장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의 답문이며 전문을 게재함을 밝힙니다.

김덕룡은…
상도동계 좌장이다. 이름 영문 이니셜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별칭 DR로 유명하다. 故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서울대 선후배 사이다. 1964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시절 6·3 사태로 구속되고 제적됐을 당시 YS가 찾아와 위로해주면서 인연을 맺었다. 1970년대 상도동계에 입문했다. 반독재 투쟁 기간 네 차례 투옥됐다. YS를 가장 오랫동안 보좌한 비서실장이다. 문민정부 이후 최형우와 더불어 YS계 양대산맥을 이뤘다. 국회의원 5선을 지냈으며 초대 정무제1장관, 한나라당 부총재, 원내대표, 민화협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