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김영삼과 박정희의 영수회담 비화
김영삼 총재는 산에 올라가 그 정상에서 산행식을 할 때 “산에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지 못하면 등산이 아니다. 따라서 산에 오를 때는 내려갈 때의 안전을 대비하면서 올라가야 한다.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어렵다”고 자주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산은 우리에게 무한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10·26 이후 어느 자리에서 김영삼 총재는 지난날 신민당 총재 시절(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가진 여야 영수회담의 비화를 들려줬다. 김영삼은 박정희를 만나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민주회복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김 총재님, 저 창 밖을 보십시오. 지금 이 넓은 청와대 뜰의 쓸쓸한 모습이 마치 깊은 산중의 절간 같지 않습니까.”
“마누라는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누라도 없는 이곳에서 어린 자식들만 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 내가 무슨 욕심이 더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 김 총재님께 굳게 약속을 하려고 하는데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나이와 사나이의 명예를 걸고 비밀로 해주십시오.”
“말씀을 해 보십시오.”
“나도 절간 같은 이곳에 더 이상 미련이 없습니다.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내가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알려지면 권력 지향적인 ‘똥파리’(당시 박정희의 주변과 소위 공화당 실세들을 지칭)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요동을 칠 것입니다. 이런 가능성도 막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며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민주화는 꼭 해놓고 물러나겠습니다.”
“김 총재께서 지금 나가시더라도 민주화에 대한 우리 두 사람의 이 약속은 발표하지 마시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로 약속을 하십시다.”
눈물을 글썽이며 사정하는 박정희의 태도가 측은하기도 하고 진지해 보여서 김영삼 총재는,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하고 나와서 민주화 방침을 뺀 영수회담 합의사항 발표를 했다. 이로 인해 신민당내 비주류나 많은 국민들이 얻은 것이 없다고 김영삼 총재를 비판을 했는데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의 민주화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지만 허사였다고 말하면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그때 언제까지 하겠다는 시한을 정하지 않고 나온 것이 실수였다. 그러나 눈물을 글썽이며 마누라도 총에 맞아 죽고 어린 아이들만 데리고 그 넓은 청와대 안에서 혼자 사는 고독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태도가 너무도 진지해 보여, 그만….”
박정희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아예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나. 김영삼 총재도 눈물을 글썽이며 민주화를 자기가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그 진지한 태도를 믿었다고 했는데 나도 그때의 박정희는 진정이었다고 믿고 싶다. 그때의 박정희는 결코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만두고 영광스러운 퇴진을 하려고, 사나이의 자존심까지 걸고 김영삼 총재에게 다짐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영수회담 후 그간의 일을 회상하다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못된 짓을 심하게 했고 부정부패 또한 상상을 초월해 권좌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들 모두는 감옥으로 갈 것이라고 판단해, 그나마 하나님이 준 마지막 호기를 스스로 버리고 비극의 길을 자초한 것이다. 박정희의 진심어린 진지한 자세도 그때 한번으로 끝이 났다.
몇 만이고 탱크로 쓸어버리면 됩니다
박정희는 “강압만으로는 어렵다”는 김재규와 “기왕 내친 김에 탱크를 동원하여 몇 만 명이라도 쓸어버리면 된다”고 주장하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틈바구니에서 차지철의 편을 들다가 10·26의 비운을 만난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입’ 역할을 했던 김성진이 자신이 목격한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기록한 <박정희를 말한다> (삶과 꿈)를 통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개혁정치, 그리고 과잉충성>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에서 “박 대통령의 비민주적인 부분에는 그 대부분이 박 대통령 본인보다는 이후락·박종규 차지철 김재규 등 2인자 자리를 노리던 군인출신 권력자들의 과잉충성에서 빚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도 차지철이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정희의 충신다운 말이다. 김성진을 비롯해서 그의 측근인 남덕우 전 총리도 박정희의 독재는 “나타난 현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박정희의 책임이라기보다도 아부꾼들의 충성 경쟁에서 나온 결과라고 말한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회고록 <5·16과 10·26…>을 출간했다. 이만섭 의장은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의 직접적인 동기는 박 전 대통령, 김 전 부장, 차지철 전 대통령 경호실장 3자간의 미묘한 갈등관계”라고 말하고, 김재규 전 부장은 비교적 합리적이었지만 차지철 전 실장은 강경 일변도였다고 말하고 차지철 실장이 박정희의 신임을 더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김 전부장이 ‘차 전 실장을 없애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결과적으로 10·26이 왔다고 말한다. 김성진이나 남덕우, 이만섭 의장의 견해를 다 진실이라고 보아도 결과는 같다. 박정희는 그들 3자간에도 차지철의 생각을 신뢰했고, 합리적이고 진실한 김재규의 시국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성진, 남덕우, 이만섭의 주장처럼 박정희의 실추가 아첨꾼들의 미묘한 갈등관계라고 하지만, 박정희의 잘못된 국가관과 욕심 그리고 그의 삐뚤어진 가치관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자기 출세를 위해 이용하고 누려보려고 한 것뿐이다. 차지철도 박정희의 생각을 더 빨리 읽고 그에 맞추어 충성한 것뿐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취향과 생리에 어울리는 사람만을 골라 썼고, 그들은 박정희가 의도한대로 충성경쟁을 한 것뿐인데 누구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말인가. 그들 중에서도 박정희는 차지철의 충성을 더 사랑했다.
차지철이 박정희의 생각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비위를 잘 맞춘 것뿐이다. 잘못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차지철에게 돌리는 것은 박정희를 소신 없는 비굴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핫바지가 아니다.
여기 독립 운동에 평생을 바치고 나라를 세웠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고 3·15 부정선거를 해 4·19로 국부의 자리에서 하야했다. 그의 하야를 아쉬워한 국민들이 “이승만은 잘 했는데 이기붕 등 참모들의 아첨이 이승만을 무너뜨렸다”고 원망하며 가슴 아파한 사람이 많았다.
언론에 3선개헌설이 떠돌고 있을 때 젊은 국회의원 김영삼이 김철안 김상도 의원과 함께 이기붕을 따라 경무대에 갔다. 대기실에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들어왔다. 열혈 청년 김영삼 의원이 “박사님, 3선 개헌을 해서는 안 됩니다. 3선 개헌만 안하시면 박사님은 위대한 국부로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고 했다.
순간 이박사의 안면 근육이 실룩거리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이기붕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김영삼의 직언 때문에 한참 당황하다가 볼멘소리로 쏘아 붙였다.
“김 의원, 왜 그런 말씀을 드려.”
당시는 사람들이 이 박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던 때였다. 언론에 3선개헌설이 보도되기 시작했지만, 나는 처음에는 주변사람들의 문제라고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모가 그렇게 유도해도 결국 최종결정은 지도자 자신의 판단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잘못된 독재자의 책임을 억지로 미화하기 위해, 그의 참모에게 덮어씌우는 ‘참모 유죄론’은 이제 그만하자. 면면히 이어갈 역사와 후진들을 위해 이런 유치한 변명은 이제 끝내자. 제대로 된 인격자에게는 개나 돼지 같은 사람이 설 자리는 없다.
그 주변이 개나 돼지 같은 집단만 모였었다면, 박정희 또한 그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을 말로 변명한다고 달라지는가. 총선거 결과로 보나 당시의 국내 정세로 보나 18년 동안 쌓이고 쌓인 부정부패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게 되었고, 그리고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무고하게 희생시켜 그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니, 이쯤에서 정치를 그만 두고 싶어도, 정말 자기 손으로 민주화를 해 놓고 물러나고 싶어도, 그때는 이미 그 동안 저질러 놓은 일들이 무성한 잡초로 변해 내려갈 길을 막아 버렸다.
권좌에서 물러나는 순간 줄줄이 묶여 감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박정희는 ‘차라리 민주화를 목숨 걸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사람은 김영삼 하나뿐이니 김영삼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쉽겠다’고 생각해, 김영삼 제거에 혈안이 되었다가 결국 자신이 만든 덫에 걸려 멸망한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의 10·26은 더 불쌍하고 한심하다. 박정희의 군정시절 선량한 한 사람이 억울하게 당한 기록을 싣는다.
5적시 작가 김지하 시인이 당한 기록 게재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지만, 그는 수감생활 중 정신착란을 겪었다. 기나긴 독방생활의 후유증이었다. 육영수 여사의 저격범 문세광이 거쳐 간 방으로 모니터가 설치돼있어 24시간 감시당했다. 1979년 여름 그는 참선을 시작했다. 꼭 100일째 되는 날 박정희가 사망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직후 그의 마음속에서 세 마디의 말이 줄지어 풍선처럼 떠올랐다.
첫째 풍선은 “인생무상”, 둘째 풍선은 “안녕히 가십시오”, 셋째 풍선은 “나도 따라갑니다”였다. 김지하 시인이 한일회담 반대시위 주모자로 몰려 도피중일 때는 그의 부모가 대신 잡혀갔다. 그에 따르면 박 정권과 싸운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지만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전기고문 끝에 ‘반병신’이 됐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일을 못하게 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박정희를 쓰러뜨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박정희는 ‘원수’였다.
박정희가 죽은 지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 사마중달을 쫓아낸 죽은 공명처럼 ‘여전히 한국정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것은 국민의 잘못된 정치문화에서 비롯된 것을 어쩌랴. 모두가 박정희를 잘못 알아서 말이다. 박정희 ’과대포장’ 때문에 말이다.
재심청구 4명중 2명 사망 법원 이례적 사과문 발표
『간첩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일가가 29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부산지법 형사6부(부장판사 최철환)는 21일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간첩 혐의 등으로 기소돼 각각 징역 3~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신귀영씨(74·부산 기장군) 등 재심청구인 4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009년 8월 22일 동아일보, 「고문조작 ‘간첩 일가’ 29년만에 무죄」부산=조용희 기자
다 끝난 인생에게 지금 와서 무죄선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무죄가 유죄로 만들어지고 또 그 유죄가 무죄로 판시되는 상황이 줄을 서고 있다. ‘정의는 이긴다’, ‘사필귀정’이라는데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내린 정치재판으로 억울한 판정을 받은 피고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는 사람도 부상의 고통 속에 청춘은 늙어 황혼에 들어섰는데 무죄가 선고되고, 재판을 잘못한 판사들이 법정에서 사과는 했지만 그 당사자들에게 무슨 실익이 있고,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결코 남의 일일 수가 없다. 국민은 똑바로 보아야한다. 고의로 그런 재판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판사에게도 문제가 크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체제를 만든 박정희와 전두환을 동정하거나 찬양하는 말을 민주국가의 국민이라면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잘못도 문제지만 그 치하에서 적은 이득을 얻기 위해 군사독재를 받들고 산 국민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하고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