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불량 레미콘과 팝콘, 그리고 플랫폼의 책임·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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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불량 레미콘과 팝콘, 그리고 플랫폼의 책임·의무
  • 박근홍 기자
  • 승인 2020.11.27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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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과 세븐일레븐, 고영욱과 성신양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최근 룰라 출신 고영욱이 온오프라인상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는 일이 있었다. 그는 지난 12일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이렇게 다시 인사를 드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9년 가까이 단절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살아있는 한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없기에 이제는 조심스레 세상과 소통하며 살고자 한다"는 내용의 글을 게시하며 연예계 복귀를 암시했다.

하지만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단 하루 만에 사라졌다. 고영욱이 스스로 계정을 폐쇄한 건 아니었다. 인스타그램의 자정작용에 따른 결과였다. 인스타그램은 '유죄 판결을 받은 성범죄자는 인스타그램을 사용할 수 없다. 사용자가 성범죄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즉시 계정을 비활성화한다'고 안내하고 있다. 고영욱은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산 뒤 2015년 출소했다.

얼마 전 길을 걷다가 잠시 편의점을 들렀다. 날이 춥고, 속이 허해서 따뜻한 두유를 집어 계산대로 향하면서 매대를 슬쩍 봤는데 시멘트 포대처럼 생긴 물건이 보였다. '요즘에는 편의점에서도 시멘트를 소용량으로 파는구나'하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다. 시멘트 포대가 아니라 '천마표시멘트 팝콘'이라는 과자였다. 천마표시멘트 팝콘은 편의점 세븐일레븐과 시멘트업체 성신양회가 협업해 내놓은 복고 콘셉트 상품으로, 최근 유통업계에 자리잡은 이색 콜라보레이션 트렌드를 적용한 게 특징인 과자다. 

성신양회가 유통업체와 협업해 이색 상품을 내놓은 건 팝콘뿐만이 아니다. 지난 여름에는 포엑스알이라는 패션업체와 손잡고 '천마표시멘트 가방'을 판매해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멘트업체가 유통가와의 콜라보로 도모할 수 있는 건 뭘까. B2B사업을 영위하는 회사가 B2C사업을 영위하는 회사와 협업하는 이유는 통상적으로 인지도 제고, 그리고 기업 이미지 개선이다. 아마 성신양회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성신양회는 불량 레미콘을 납품한 혐의(건설기술진흥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지난해 말 유죄 판결을 받은 업체다. 성신양회는 값비싼 시멘트 함량을 줄이는 대신 단가가 저렴한 혼화재 비중을 늘린 불량 레미콘을 현대건설, GS건설, 대우건설, HDC현대산업개발, 신영, 양우건설 등 건설업체의 270개 건축현장에 공급해 900억 원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성신양회에 내려진 벌은 고작 벌금 2000만 원이었다. 범죄를 저질러 900억 원을 벌고 2000만 원에 퉁친 셈이다. 해당 사건에 연루된 성신양회 임직원들도 집행유예로 풀려나 사실상 면죄부를 받았다.

고영욱(왼쪽 위)은 인스타그램(오른쪽 위)이라는 플랫폼을 사용했고, 성신양회는 세븐일레븐(오른쪽 밑)이라는 플랫폼을 사용해 '천마표시메트 팝콘'(왼쪽 밑)을 선보였다 ⓒ 뉴시스, 각 社 제공
고영욱(왼쪽 위)은 인스타그램(오른쪽 위)이라는 플랫폼을 사용했고, 성신양회는 세븐일레븐(오른쪽 밑)이라는 플랫폼을 사용해 '천마표시메트 팝콘'(왼쪽 밑)을 선보였다 ⓒ 뉴시스, 각 社 제공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 입장에서는 세상이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거나 잊어주길 바랄 것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SNS 계정을 만든 고영욱, 콜라보 제품을 만든 성신양회, 그들의 입장에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심리이기에. 하지만 고영욱과 성신양회의 끝은 달랐다. 고영욱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야 했고, 성신양회는 소비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으며 이미지 회복에 성공하는 분위기다.

두 범죄자(개인, 법인)의 결정적인 차이는 '플랫폼'이었다. 이들은 빛으로 나오기 위해 각기 다른 플랫폼을 사용했다. 전자는 인스타그램이라는 SNS을, 후자는 최근 다양한 업종과의 협업으로 만능 플랫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소비채널 편의점을 각각 플랫폼으로 택했다. 인스타그램은 고영욱이라는 플랫폼 이용자를 범죄자라는 이유로 밀어낸 반면, 세븐일레븐은 성신양회라는 범죄자를 플랫폼 이용자로 적극 수용했다. 실제로 세븐일레븐 측은 "천마표시멘트 팝콘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간단히 맥주와 즐기기 좋은 상품이다. 앞으로도 재미 요소를 접목한 협업 상품을 지속해서 출시할 예정"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플랫폼 사업자는 아무리 많은 상품을 유통해도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경우가 없다. 어느 개인이 인스타그램을 이용해 물건을 판매했는데 그 물건에 하자가 있다면,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건 인스타그램이 아니라 판매자다. 어느 회사가 편의점을 통해 상품을 판매했는데 그 상품이 불량품이라면, 이에 대한 책임은 편의점이 아니라 판매업체에 있는 것이다. 플랫폼은 그저 중간에서 수수료만 챙긴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하지만 이제 시대는 플랫폼 사업자에게도 보다 많은 책임과 의무를 요구한다. 코로나19 등 영향으로 비대면 마케팅 시장이 확대된 데다, 특정 플랫폼의 미필적 고의로 인해 잘못된 상품과 정보가 소비자들에게 전달되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플랫폼은 자멸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플랫폼들이 살아남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9월 한 학술심포지엄에 참석해 "플랫폼 사업자의 역할, 지위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겠다. 또한 시장 모니터링이나 자율준수 캠페인 등 다양한 시책을 펼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단편적인 일로 모든 걸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고영욱과 성신양회 사안에 있어서는, 인스타그램은 플랫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 자정기능을 발휘해 누리꾼들의 신뢰를 얻은 반면, 세븐일레븐은 책임과 의무에 대한 고민이 없는 전통적인 플랫폼 사업자 위치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누가 플랫폼 시장에서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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