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업체서 조합에 '감 놔라 배 놔라'…시공업체 선정도 제멋대로
"리모델링 규제 완화·절차 간소화하되, 계약관계는 보다 엄격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1. 서울 북부 지역의 한 아파트에서 리모델링을 추진하기 위해 조합 설립을 주도하고 있는 A씨는 얼마 전 한 정비사업전문관리업체(정비업체)와 계약을 체결했다. 조합 설립을 위해 필요한 동의서부터 조합 설립 인가 관련 행정 업무, 나아가 시공사와의 계약까지 모든 걸 용역에 맡기는 내용의 계약이었다. 하지만 계약 체결 후 정비업체는 '배째라' 식으로 일관했고, 동의서를 받는 것과 행정 업무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것까지 모두 A씨가 책임을 져야 했다.
#2. 지방 광역시의 한 B아파트 리모델링조합은 보다 좋은 시공사를 선정하기 위해 대형 정비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해당 정비업체는 조합원들이 원하는 건설사가 아닌 다른 업체에게 시공권을 줄 것을 조합에 부당하게 강요했고, 조합 이사회와 운영진이 이에 반발하자, 자신들은 손을 떼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또한 자신들과 계약을 파기할 경우 각종 비용들을 추가적으로 부담할 수밖에 없다며 훼방하기 시작했다. B아파트 리모델링조합은 울며 겨자먹기로 정비업체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3. 국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 중견건설사 C업체는 최근 한 리모델링 정비업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까지도 아니지만 지방의 한 아파트 리모델링 추진위원회와 가계약 방식으로 이미 시공권을 따냈는데, 중간에 정비업체가 개입해 다른 건설사를 거론하면서 수주 자체가 무산될 지경에 놓였던 것이다. 심지어 해당 아파트 리모델링 추진위원회도 정비업체와 한통속이었다. 결국 C사는 정비업체에게 별도의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해당 사업을 수주해야 했다.
26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문재인 정부의 재건축·재개발사업 규제 여파로 아파트 리모델링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정비사업전문관리업체(정비업체)의 갑질 횡포가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대적으로 '을'의 신분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 일감이 늘자, '싫으면 배째라' 식으로 조합과 시공사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리모델링협회,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등이 공개한 자료를 살펴보면 국내 리모델링 시장은 지난해 30조 원에서 오는 2030년까지 44조 원 규모로 대폭 성장할 전망이다. 리모델링 기술의 발전, 정부 차원의 리모델링 활성화 정책, 리모델링에 대한 의식 개선 등 영향으로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리모델링을 추진 중이 수도권 지역 내 아파트는 2019년 말 37개 단지에서 2020년 말 기준 61개 단지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이는 현 정권 들어 재건축·재개발사업이 규제된 데 따른 풍선효과라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실제로 리모델링은 재건축사업과 달리 임대주택 공급, 기부채납 의무가 없으며, 초과 이익환수 대상도 아니다. 특히 서울의 경우 박원순 체제에서 엿보였던 리모델링 사업 규제 강화 움직임도 오세훈 체제로 전환된 이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재건축·재개발 시장이 위축된 반면, 아파트 리모델링 일감은 급증하자 대형 건설사들도 리모델링 시장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 현대건설, DL이앤씨(DL E&C, 구 대림산업), GS건설, 대우건설 등이 대표적인 예다.
시장 환경이 이렇게 바뀌다 보니, 앞서 열거한 사례들과 같이 정비사업전문관리업체(정비업체)들의 콧대가 부쩍 높아졌다는 후문이다. 굳이 영업활동을 펼치지 않더라도 전국 각지 여러 단지에서 조합을 설립해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싶다는 제안을 먼저 정비업체에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호황을 맞은 정비업체로서는 '갈 데가 여기밖에 없냐'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게 당연한 실정이다.
앞선 사례1에 소개된 A씨는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조합에서 초반에 가장 중요한 건 각 세대 동의서를 받는 일인데, 처음에 계약할 때는 정비업체에서 동의서를 받아주겠다고 했다가 도장을 찍자 180도로 바뀌더라"며 "우리보고 알아서 동의서를 받고 조합 설립 인가가 난 뒤에야 업무를 수행하겠다고 했다. 아니면 그냥 접겠다더라. 수십억 원을 받았으면서 이딴 식으로 일을 하는 걸 보니, 열불이 터진다"고 토로했다.
또한 정비업체에서 특정 건설사와 사전에 결탁해 조합에 시공사 선정을 강요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건축·재개발사업에 비해 리모델링은 수익성이 떨어지기에 건설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우가 드물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되도록 수의계약 방식으로 수주하려는 업체들이 대다수인 만큼, 정비용역업체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사례2의 B씨도 "수억 원을 주고 계약했다. 조합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할 것이고, 조합의 의지대로 시공사를 선정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비업체가 뒤통수를 쳤다"며 "우리랑 계약하기 전에 이미 특정 건설사랑 얘기가 다 됐다고 한다. 그 업체랑 계약을 안 하면 사업이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고 했다. 이게 무슨 용역업체냐. 갑 오브 갑 아니냐"고 지적했다.
아예 정비업체에서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단지에 자기 사람을 위원장으로 심고, 건설업체를 압박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례3에서 소개된 단지 내 리모델링 추진위의 한 관계자는 "우리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지도 않은 한 집주인이 갑자기 리모델링을 추진하겠다고 하더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동의서를 제출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형 정비용역업체에서 심은 사람이었다"며 "설명회랍시고 개최했는데 건설사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리모델링 조합장, 정비업체, 건설사가 짬짜미로 해먹은 뒤였다. 아예 판을 엎고 처음부터 진행하지 않는 이상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 A씨는 "새로운 서울시장으로 오세훈 시장이 당선되면서 수도권 지역 재건축·재개발사업에 다시 훈풍이 불고 있다. 또한 리모델링에 대한 규제는 언제 강화가 되더라도 신기하지 않은 추세"라며 "정비업체들이 이 같은 환경을 악용하고 있다. '그래서 리모델링 안 할래?'라는 식으로 조합과 입주민을 되레 압박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아파트 리모델링에도 재건축·재개발사업처럼 도정법(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이 적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규제 완화, 절차 간소화에만 초점이 맞춰진 작금의 리모델링 관련 입법 시도에서 벗어나서 조합원들에겐 당근을 주되, 관련 업체들에 대한 규제는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회에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에 대한 특별법이 발의된지 오래다. 그런데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며 "리모델링 사업에 있어서 조합원들의 입지와 권한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재건축·재개발사업에 쓰이는 도정법에 준하는 수준의 엄격한 기준들이 정비업체, 설계업체, 시공사 등에 적용돼야 한다. 지금 리모델링 시장이 돌아가는 걸 보면 3~5년 뒤에 상당한 사회적 이슈와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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