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유로 영장도 없이 무고한 시민을 불법감금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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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유로 영장도 없이 무고한 시민을 불법감금한단 말이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1.1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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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김영삼 총재의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

1983년 5월 18일, 불법감금 상태에 있던 김영삼 총재가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2차 연금으로 창살 없는 감옥살이의 고통은 만 1년이 되어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전두환정권의 탄압은 극에 달해서 민주화 운동도 질식상태가 되어 뜻있는 민주인사들도 기진맥진할 무렵, 1982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김대중 씨가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전두환에게 제출하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영삼 총재는 광주항쟁 3주년을 앞두고 그동안 붓글씨 쓰기로, 성경읽기와 민주화를 위한 기도와 독서로 고통을 달랬다. 그리고 독재자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필요성을 생각하던 중 마하트마 간디의 저서를 읽다가 극심한 탄압으로 얼어붙은 민주화운동을 되살리는 방법은 ‘간디의 비폭력·무저항의 단식투쟁’이라는 암시를 받고 오랫동안 기도와 생각을 하다가 전두환에게 5개항의 조건을 내걸고 죽음을 각오한 단식을 결행하기에 이르렀다.

김영삼 총재는 자신의 회고록 2권 231쪽에서 단식을 결행하기 전에 『신약성경』의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다음 말씀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썼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마태복음 16:26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요한복음 12:25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약국문을 열려고 아파트를 나서는데 광명경찰서 정보과 형사 네 명이 승용차 한 대를 몰고 와서 아파트 현관 앞에 지키고 있다가 나를 붙들었다.

“오늘부터 노 위원장님을 댁에서 나가시지 않도록 모시고 있으라는 서장님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댁에 들어가셔서 책이나 읽고 계셔야겠습니다.”
그때 온 형사는 G, L, K, S 네 명이었는데, 이들은 민주화가 될 때까지 무슨 일만 생기면 나를 연금하려고 몰려오는 통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

“무슨 이유로 영장도 없이 경찰서장이 무고한 시민을 불법감금하라고 지시한단 말이오? 이유는 말을 해야 하지 않소?”
“저희들은 모릅니다만, 서장님에게서 위원장님을 댁에 잘 모시고 있으라는 지시만 받고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직업이 경찰관이고 우리도 처자식하고 먹고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장님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는 ‘또 중앙에서 무슨 일이 생겼구나’ 생각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이민우 회장 댁에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저 노병구입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침부터 정보과 형사 네 명이 와서 이유도 모르고 다만 경찰서장의 명령으로 저를 연금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파트 현관에 차를 대고 지키고 있습니다.”

“김영삼 총재가 오늘부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다고 선언하고 지금 상도동 자택에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어요. 산악회 간부들이 모두 연금조치를 당한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보고를 받고 있으니 집에서도 서로 긴밀히 연락들을 하도록 해요.”

그래서 내가 김영삼 총재의 단식 사실을 형사들에게 알리고 그런 일로 시민을 괴롭히는 경찰의 부당성을 지적했지만 그들은 절벽과도 같았다.

우리는 서로 연락을 취하며 모두 연금상태에서라도 김영삼 총재와 동조해 단식을 하기로 했는데, 그때 가택에서 연금당한 채 단식에 참가한 사람이 58명이었다고 한다. 전두환의 야만적인 탄압 아래서 우리나라의 신문방송은 김영삼 총재의 단식투쟁을 한 자도 보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국, 일본 등을 중심으로 한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나서자, 며칠이 지나서야 ‘최근의 정세흐름’이니 ‘재야인사의 식사사건’이니 하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뜻 모를 보도를 했다.

국민들은 이를 보고 듣고 더욱 궁금히 여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까지 연금 중이던 민주산악회 회원들이 전화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김영삼 총재의 단식사실을 알리거나, 연금에서 빠진 동지들이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연금사실을 등사해 왜정 때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 암암리에 돌려 구전으로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단식에 즈음한 5개항의 요구|
김영삼 총재는 “민주화투쟁은 생명을 건 투쟁이어야 하며, 생명을 건 투쟁만이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나의 생명을 바쳐 이 나라 민주화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나의 국민에 대한 최후의 봉사라고 생각한다”고 전제한 뒤, 5개항을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1. 독재정치를 거부하고 민주정치의 확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구속된 학생, 종교인, 지식인, 근로자 등을 민주화 선언과 함께 전원 석방하여야 한다.

2. 정치활동규제법에 묶여 있는 모든 정치인과 민주시민의 정치활동을 보장하여야 한다.

3. 정치적인 이유로 학원과 직장으로부터 추방당한 교수, 학생, 근로자 등을 복직시키고, 유신정권 이래의 정치탄압으로 인하여 공임권(公任權)에 제약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전면적인 복권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4.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언론통폐합 조치를 백지화하고, 유신정권 이래 타의로 실직된 언론인들이 언론계에 명예롭게 복귀토록 하며, 민간방송국의 설립을 자유화하고 기독교방송국의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

5. 현재의 헌법은 5·17 이전에 이미 국민적으로 합의되었던 대통령 직선(直選)의 국민적 염원을 배반한 것이며,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유보조항을 두고 있어 사실상 유신독재 체제와 다를 바 없는 독재 헌법인 바, 현행의 헌법은 지체 없이 개정되어야 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이 확인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유신시대 이래의 반민주악법의 민주적 정비와 아울러 특히 소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한 반민주악법, 예컨대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언론기본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국가보안법, 국회법,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선거법, 노동조합법 등은 폐지 내지 원상회복되어야 하며, 이들 법률은 제정 및 개정과 더불어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무효임을 확인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이 당면 과제를 밝히면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국민 여러분께 이 글을 드리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좌절보다는 희망을, 체념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이 난국을 극복해주실 것을 믿고 또 바라면서 나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아무리 보도통제를 하고 연금을 해도 김영삼 총재의 단식소식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자 전두환정권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단식 1주일 만인 5월 25일, 김영삼 총재를 강제로 서울대학병원에 이송해서 입원을 시키고 나서야 나와 여러 동지들의 연금을 풀고 경찰은 철수했다.

강제로 입원을 시킨 뒤 식사를 시키려고 별 수단을 다 동원해도 본인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의사들을 시켜 영양주사를 놓으려고 해도 본인이 거부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급기야는 권익현 의원을 시켜 김영삼 총재에게 “세계 어디든지 나가서 편안하게 사시는 것이 어떻겠느냐?”면서 외국으로 나간다면 그곳에서 살 집은 몰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의 돈도 넉넉하게 보내주겠다는 유혹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 총재는 민주화 이외의 어떤 제안도 거부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가칭 민주국민협의회의 결성과 시국선언|
이민우 회장과 민주산악회 회원 그리고 재야인사 101명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모두 서명했다. 민주국민협의회(가칭)의 신민당 및 재야 정치인 101명은(전직 국회의원 32명 포함)은 김영삼 총재가 제시한 5개항의 민주화요구를 전폭 지지하고, 민주화의 확대추진을 위해 이 땅의 민주세력 및 양심세력과 함께 범국민 민주화추진 단체를 결성키로 하며, 김 총재의 단식 중단을 호소하는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이 서명하였다.
 
<서명자 명단>
이민우, 박영록, 조윤영, 이기택, 정헌주, 김정두, 황낙주, 이중재, 노승환, 박용만, 최형우, 김동영, 조연하, 김록영, 이종남, 홍영기, 김상현, 박종율, 박태종, 김명윤, 김상진, 송원영, 박찬, 문부식, 정대철, 정재원, 황명수, 김영배, 김창환, 이우태, 조규완, 김동욱, 함기환, 명화섭, 윤혁표, 김태룡, 오정보, 김봉조, 김덕룡, 최영호, 오성룡, 홍사임, 박희부, 이진탁, 고수문, 김기수, 탁형춘, 이계봉, 염장호, 이익균, 김병환, 최기선, 조익현, 홍종일, 강두흠, 허금환, 양실, 마초득, 신철근, 권혁충, 전홍기, 정재인, 윤규현, 상덕식, 정선식, 주춘심, 김영술, 민면식, 홍인길, 임판금, 강신영, 김영수, 신용석, 신용선, 박정태, 양희봉, 허병호, 김용덕, 송재호, 박정무, 백영기, 윤대희, 오정석, 이동희, 김장곤, 이의선, 노경진, 이무부, 김현기, 이문광, 성승표, 이성춘, 권만성, 김용각, 김진억, 채수호, 심수원, 노병구, 문정수, 장학노, 박영석
 
<시국선언>
우리는 김영삼 총재의 생명을 건 단식투쟁과 최근의 학원사태 등을 지켜보면서 이 나라가 실로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조국의 현실이 오늘의 상황에 이르게 된 데 대하여 정치인으로서 그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에게 사죄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

현 정권은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국민의 민주적 열망의 구체적 표현의 형태로서 나타난 10·26 사태의 교훈과 의미를 짓밟고, 나아가 민주헌정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외면, 유린한 채 5·17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강압에 의해 구축된 군사독재체제를 이른바 제5공화국이라 이름하여 출범하였다.

그 과정이 비민주적이며 폭력적이었음은 물론, 광주사태라는 비극을 민족의 역사에 남겼고, 유신독재를 능가하는 독재의 강화를 획책하여 왔다. 민주주의는 이제 그 형체마저 없이 사라진 채, 다만 청년 학생들의 애끓는 정의의 목소리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현 정권의 출범 후 발생한 대형사고와 사건은 현 정권의 속성에서 연유한 것으로, 인명경시 풍조, 권력남용, 폭력의 만연 등 사회와 인간의 황폐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이었다. 현 정권은 오직 권력의 장악만을 목표로 하여 탄생되었고 오직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언론의 자유는 권력의 자기홍보를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며, 사법부의 독립은 요원한 꿈이 되었다. 학원은 학생을 죄인시하고 서로를 경쟁시키며 체제에 순응케 하여 규격품을 만드는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살벌한 곳이 되었다.

김영삼 총재의 단식 사실과 2개의 애절한 성명이 국내 언론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는 사실이 현 정권의 속성과 언론의 실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현 정권의 출발 과정의 잔인성과 인권탄압, 정권의 존립에 초점을 맞춘 굴욕적 외교는 민족의 존엄과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있으며 국제적 고립을 면치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조국이 처한 이 모든 현실이 현 정권의 출발 과정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에 확연하게 나타난 현 정권의 비민주적 성격과 비도덕성에 있음을 명백히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민주화만이 위기와 난국을 극복하는 첩경이라고 확신하면서 그것은 허울 좋은 구호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되고 선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김영삼 총재가 ‘국민에게 보내는 글’에서 제시한 5개항의 민주화요구가 온 국민의 한결같은 요구이며 우리의 요구임을 확인하는 바이다. 그 요구는 현 정권으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느냐를 묻는 절실하고도 겸허한 국민의 질문이요 요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김영삼 총재의 5개항의 민주화 요구를 현 정권이 지체 없이 수락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그렇지 아니 할 때 현 정권의 정당성과 정통성은 국민의 민주적 의지로 거부될 것임을 경고하면서 민주화 조치의 유예나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의 거부에서 오는 모든 책임 역시 현 정권에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김덕룡 대변인의 발표선언문
 
이렇게 선언하고 우리 모두는 김영삼 총재와 함께 동조투쟁에 들어갔다. 그 후에도 전두환은 권익현 의원을 보내 끈질기게 해외로 나갈 것을 권유하며 유혹했지만, 김영삼 총재는 이를 거부했다.

“고통받는 국민을 두고 외국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없다. 김대중을 내보내고 이제 나만 내보내면 너희들이 영원히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절대 안 된다. 하지만 나를 해외로 내보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자 권익현 의원은 반색을 하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
이러한 김 총재의 말에 권익현 의원은 아연실색하고 돌아갔다고, 김영삼 총재는 자신의 회고록 2권 265쪽에 기록하고 있다.

단식 10여 일이 넘어가면서 우리들은 김영삼 총재의 생존을 걱정하게 되었고, 김영삼 총재의 부친께서도 직접 단식중단을 권했다. 또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있는 많은 동포들까지 단식중단을 호소하고 나섰지만 김 총재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 뒤, 정치와는 거리가 먼 종교지도자이자 사상가로 국민의 신망을 높이 사고 있던 함석헌 선생과 홍남순 등 재야원로들도 동조단식에 들어가며 전두환에게 조속히 김영삼 총재의 민주화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하고 나섰다. 그때 김영삼 총재는 ‘미국에 있는 동지들에게’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지금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주변은 현정권으로부터 단식중단을 위한 조직적인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곳은 단식을 할 자유조차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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