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래 제일 큰 정치적 연합 조직 태동
양 김 분열로 통일 조직으로 성공하지 못해
시작은 좋았으나…끝은 흐지부지로 평가 돼
지역갈등·이념 갈등 극복 과제 한계로 남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촉구 김영삼(YS) 단식투쟁, 민주산악회 전국단위 조직 정비, 신민당 창당과 12대 선거 혁명, 선명 야당의 부활로 인한 전두환 패권 정당의 붕괴, 미문화원 점거 사건 무료 변론 등 학생운동 지원, 학원안정법 입법 저지 운동, 제도와 재야를 아우른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 구성,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산실, 5공 체제하의 땡전 뉴스에 대한 시청료 거부와 자유언론투쟁, 구치소 내 고문폭행 저지 운동, 부천 성고문사건 진상규명 대책위, 1천만 개헌 서명운동, 4·13 호헌조치 당일 통일민주당 창당 및 6월항쟁 전열 정비, 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 폭로, 국민추도회 발기, 범대중연합전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족, 6·10 국민대회, 명동성당 농성투쟁, 직선제 개헌운동 전국 확산, 전두환-김영삼 6·24 회담, 6·26 국민대행진, 이윽고 6·29 선언 받아내고 직선제 개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설립 등…
1984년 5월 18일 YS와 상도동계를 필두로 김대중(DJ) 동교동계가 결합해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발족한 정치결사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이 같은 격동의 대장정 한 가운데 있었다.
민추협의 일원으로서 현대사의 일대기를 굵직한 사건별로 기록해 정리한 이가 있으니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 차관(이하 김도현)이다. YS계를 대표해 민추협에서 상임운영위원, 민추협 기관지 <민주통신> 주간, 기획홍보실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이 시기 소장한 비망기록 유인물 등을 2003년과 2008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민추협 기획대표로서 국본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유보·이명식(민통련), 이명준(천주교), 황인성(개신교) 등과 함께 각계 민주화운동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정리한 <6월항쟁과 국본>도 펴냈다. 귀중한 사료다. 그가 직접 집필한 부분은 6월항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민추협에 관해서였다.
해당 글에서 김도현이 주목한 것 중 하나는 개헌투쟁이 곧 87 직선제 체제를 이룬 민주화운동이었고, 그 길에 민추협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개헌투쟁은 민주화운동을 이념투쟁에서 현실적 정치투쟁으로 전환 시켰다. 그 현실적 정치투쟁은 정치권-민추협-신민당의 몫이었다. 민추협과 신민당은 개헌서명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1986년 2월 24일 전국 시도에서 ‘개헌서명운동지부’ 결성대회와 현판식을 갖고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광주·대전·청주·경남으로 확대해 나갔다. 대회는 2·12 총선 때와 맞먹는 또는 능가하는 대중적 열기와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눌렸던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가 분출된 것이다. 여기에 학생, 노동운동권의 적극적 동참이 가세했다. 정치권은 크게 고무됐다. 운동권 또한 이러한 운집한 대중집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선전 확장의 기회로 삼았다. 온갖 유인물, 깃발, 연설이 난무했다. 이런 분위기는 갈수록 더욱 고조돼 폭발점으로까지 치달았다.”
-김도현, <6월항쟁과 민추협> 중-
1. 87 개헌의 주역
“쉬운 말로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자’는 구호를 썼어요. 동장에서부터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찍겠다는 거 아닙니까? 가슴에 와닿는 소리죠. 내각책임제 하면 와닿습니까? 뭔지 잘 몰라요. 노선 투쟁하던 사람들도 이 말 앞에서는 할 말이 없는 거라. 군말이 없는 거예요. ‘단,’ 이런 조건을 다는 것도 안 통한다 이거야. ‘야, 단을 붙이는 것은 그 다음에 얘기할 문제고.’… 안 그래요?”
그가 들려줄 민추협 이야기. 만남은 지난 8월 12일 강서구 까치산 그의 사무실에서 가졌다. 옛 책방을 방문한 것처럼 사방이 빼곡한 책 냄새로 가득하다.
“요즘은 기억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고 있어요.”
덧붙이기를 6·29 선언을 둘러싼 ‘전두환-노태우’ 주장도 엇갈리고 있다며 기억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오래전 일도 아닌데 엇갈리는 경우가 있더라고.”
흥미로워하는 눈빛. 1943년생으로 올해 79세다. 홍조 띤 얼굴에 정정한 풍채다. 안동 사투리일까 싶게 경상도 억양이 묻어난다.
“가만있자.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 민추협이 주도해 6월항쟁을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킨 과정에 대해 말했는데요.
“아 맞아요.”
- 흔히 보면 6·10 항쟁을 평가할 때 학생운동권 전대협 출신의 586세대가 주역으로 회자되지 않습니까. 근데 제가 보기엔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시위한 것이 과연 성공의 결정타였느냐 하는 겁니다. 제도권 안에서의 투쟁으로 인해 6월항쟁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 중심에는 민추협이 있었고 말이죠.
“대중의 6월항쟁 참여는 말하자면 대중이 동원된 운동인데 말이죠.”
침을 삼켰다.
“민추협이 이를 대중화시킨 거예요.”
예로 1987년 1월 결성한 ‘故 박종철 국민추도회’를 들었다. 그는 이 명칭을 처음 제안한 당사자다.
“내가 아니었으면 아마 민족장 이랬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한국, 국민이란 말을 거의 안 썼어요. 내 경우는 보통 사람들이 다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데모하는 것도 직장인 퇴근 시간에 맞췄어요. 그때 하게 되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도 집에 가려고 나올 거 아니에요. 옆에 서 걸으면 데모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또 기분 내키면 동참하고 말이지.”
2. 대중운동 확산 기여
- 자동차 경적도 울리고 그랬잖습니까.
“그렇지. ‘6·10 때 밤 10시에 불 끄자’는 것도 실제 호응이 대단하더라고. 아파트 전체가 꺼지기도 했어요.”
말하는 기색에 뿌듯함이 느껴졌다.
“6월항쟁 때, 전 국민이 참여하게 된 데에는 홍보전이 중요했어요. 6월 10일 국민대행진을 하려 해도 대중이 동원되려면 매스컴 보도도 중요해요.”
특히 그럴 때는 유력 정치인의 일성이 중요했다.
“죽으나 사나 YS가 한마디 해야 그게 신문에 나는 거야.”
뭔가가 생각났는지,
“어떤 사람은 동물적 감각이 있다고 그랬는데, 그런 점에서 YS는 아주 탁월한 분이었어요. 그건 DJ보다 나아요.”
- 어떤 점 말인가요.
“신문에 나려면 말이요. 국민추도회를 ‘한다’ 소리만 계속하면 안 되거든? 어제 ‘한다’고 한 걸 오늘 또 보도해 줄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 ‘정세가 이상해서 다시 검토 좀 해야겠다’, ‘숙고 중’이라는 등 그런 식으로 계속 다른 기사가 나가게 하는 거예요. 그 방면은 YS가 전문가였지.”
껄껄껄 웃었다.
“대중과 함께하려면 딴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통 사람의 말을 해야 해요. 재야운동권에서는 학술적 용어도 있고 혁명적 용어도 있는데, 나는 그걸 보통 사람 말로 바꾸죠. 아프다, 슬프다, 눈물이 나온다 등. 통곡했다, 절망했다, 이런 말은 잘 안 쓴다고요.”
그 무렵 민추협 중심으로 배포된 중요한 문건은 김도현의 손을 거쳐 갔다는 전언이다.
“어떤 글은 지금 봐도 잘 쓴 게 있어요. 다시 읽어보니까 눈물이 나려는 게 있어요.”
낡은 종이를 꺼내더니 “보세요.” 몇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소리 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故 박종철 추도회에 마음을 모아 다짐합니다. 우리는 박 군의 죽음이 우리와 우리 후세를 대신한 것을 깨닫고 고문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박 군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든 국민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싸울 것입니다.”
그는 국민추도회 발기를 앞두고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이 시대의 가장 참혹하고, 그러나 고귀한 죽음 앞에서 비통과 분노의 열흘을 보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졌다) 故 박종철 군의 육신은 변변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언강 눈보라 속에 차마 못 보낼 먼 길로 날렸지만, 그 죽음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그의 넋을 위로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이 오늘 자유와 진실을 찾으려는 우리 모두를 대신한 것이며, 이 비통과 분노가 온 세계의 인간적 양심의 발로라면, 그의 넋을 위로하는 자리는 그의 죽음을 사주하고 가담한 압제자와 하수인을 제외한 온 국민이 참여하고 세계의 양심이 지켜보는 자리여야 할 것이다.”
- 김도현, 국민추도회 발기를 앞둔 글 중-
3. YS-전두환 6·24 회동
국민추도회는 몇 개월이 지나 6·26 국민대행진으로 확산됐다. 앞서 6·24 김영삼-전두환 회동이 있었다. 다시 또 전국적 시위가 활화산이 돼 번지느냐, 4·13 호헌 조치가 철회되고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지는가의 갈림길에 처해 있었다.
- 회동 후 YS가 협상 결렬이라 한 것을 두고 전략적 행보라는 평가가 있는데요, 당시 얘기 좀 해주시죠.
“거기서 YS라는 분의 우수한 점이 드러나요. 영수회담을 하러 가서는 시간을 끄는 거예요. 전두환이 12시까지만 얘기하자고 하면 ‘이것보다 급한 게 어딨습니까. 밥 먹고 밤새도록 합시다.’ 그 말에 뭐라 하겠어. 두 시간 세 시간 연장이 된 거야.”
- 즉석에서 성과도 있지 않았습니까?
“DJ가 가택연금 중인데, ‘지금 당장 전화 걸어서 물러가라 하쇼’ , 그 말에 전두환이 ‘좋다’고 철수시켰지.”
- 협상 결렬은 어떻게 나온 건지요.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YS가 나와서는 ‘오늘 전두환과의 영수회담은 결렬됐습니다’하는 거예요.”
- 다들 깜짝 놀랐겠습니다.
“‘전두환이 내 말을 안 들었다’라는 뜻을 복잡하게 설명하는 대신 짧게 ‘결렬’이라고 하는데, 아주 쇼킹한 거요. 그 말은 그분이 생각한 건데 그런 표현을 잘해요. 기가 막힌 표현이지.”
직후 보도된 일간지 등에 따르면 ‘암초 결렬 선언에 우려와 실망’, ‘휘청거리는 폭풍 정국’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돼 있다. 이후 6월항쟁의 불길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그게 6월항쟁의 폭발력을 만든 거예요. 사람들이 ‘전두환이가 말이야. 회동하러 갔는데 잘해보지도 않고 판을 깼다’면서 비판을 해댔지. 그 덕에 6월 26일 국민대행진을 힘차게 강행할 수 있었던 거예요.”
- YS는 명분을 쌓으려고 한 걸까요.
“그것보다 정치하는 YS 입장에서 개헌이라는 성과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 테지. 내가 담판을 지어서 했다, 안 돼도 그만이고 말이오.”
4. 양 김 단일화 결렬
전두환 정권은 국민 저항에 밀려 6·29 선언을 발표했다. 드디어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게 됐다. 하지만 그해 치러진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 김(YS-DJ) 간 단일화 갈등이라는 복병이 터졌다. 대화는 87 단일화 당시로 흘러갔다.
“한번은 노태우나 군부 동향을 잘 아는 현소환(연합통신 사장 역임)이 내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 그 사람도 YS를 좋아하는데 ‘당신이 YS와 가까우니까 진심으로 DJ한테 내 양보하겠소 하라고 해 보쇼.’ 자기가 보기에는 YS가 양보해도 DJ가 받지 못한다는 거야. 대신 진심으로 해야 한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진짜 YS한테 그랬어요.”
- YS는 뭐라던가요.
“얼굴이 딱 굳더라고. 그 뒤부터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거예요. YS와 거리가 생겼죠. 맞는 말이다 싶어서 한 말이지만, 그분한테는 정치 생사나 일생이 걸려 있는 문제 아니오.”
YS한테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민주정당인데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싶어요. 경선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따지고 보면 옳은 건 아니죠.”
- 그런데도 YS는 단일화 막판에 DJ 요구를 다 받아줬잖아요.
“그랬지.”
- 87년 10월 단일화 협상의 난제 중 하나가 통일민주당의 미창당지구당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였던 걸로 압니다. 상도동에서는 36곳의 미창당지구당을 18곳씩 50대 50으로 나누자고 하는데, 동교동에서는 더 많이 내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결국, YS가 ‘좋다, 알았다’면서 동교동계 안을 수용했고 말입니다. 그렇게 ‘경선하자’ 한 건데, DJ가 안 받은 거고요.
“DJ는 알았던 거예요.”
- 무엇을 말입니까.
“DJ는 YS 능력을 알아요. 미창당지구당을 다 줘도 YS가 당 안에서 DJ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당겨올 수 있다 이거야. 대신 당 밖은 다르다고 판단한 거지요. 자신을 지지하는 재야세력이 있으니까 틀림없이 된다고 본 거죠.”
통일민주당이 대선 후보경선을 치르기 위해서는 미창당지구당 36곳의 조직책을 임명해야 했다. 상도동 측 김동영 의원은 18곳씩 50 대 50으로 나눠 임명하자고 제안했고, DJ로부터 전권을 받고 나선 동교동 측 이용희 의원은 상도동계가 창당지구당을 많이 갖고 있으니 23곳을 동교동계에 달라고 맞섰다.
양측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이에 YS는 후보경선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10월 22일 외교구락부에서 DJ와 만나 동교동 측 제시안을 전격 수용했다. 이를 두고 상도동계 내부에서는 “김영삼이 결국 후보를 양보했구나”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DJ는 YS의 수용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을 깨고 나가 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노태우-YS-김종필(JP)’과 본인이 출마하면 노태우, YS가 영남권 표를 나누고, JP가 충청권 표를 가져가면, 자신이 호남권 몰표와 유권자 수가 많은 서울·경기권에서 많은 표를 얻어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른바 4자 필승론이었다. 하지만 DJ의 대선 전략은 실패했다. 13대 대선은 노태우의 승리로 돌아갔다.
“민추협과 신민당을 만들 때도 말이오. 미국서 망명해 있던 DJ는 동교동계 가신들의 가담을 반대했소. 자기가 없는 동안에 YS한테 전부 먹힌다 이거야.”
DJ가 소극적이었던 점은 후농(後農) 김상현 전 민주당 의원과의 생전 인터뷰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후농은 동교동계를 대표해 YS와 함께 민추협 발족과 신민당 창당을 주도해 온 인물이다.
“김 전 대통령(DJ)은 민추협 구성에 반대했습니다.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앞장’서야 민주세력이 활성화된다고 여겼지만, 미국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YS 하고 손잡지 마라’며 저를 말렸습니다. (신민당 창당 때도) 그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인권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연구소에 몸담고 있던 심기석 동지를 밀사로 한국에 보냈습니다. 심기석 동지와 평창동에 있는 어느 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김홍일도 같이 왔더군요. 그때 김홍일은 의원이 아니었습니다. ‘DJ가 신당에 반대한다’며 ‘신당에 참여하면 절교를 선언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2009년 <시사오늘> 김상현 인터뷰 중-
5. 유시무종(有始無終)의 한계
- 민추협의 역사적 의미, 한계에 대해서 짚어주죠.
“민추협은 어떻든 건국 이래 제일 큰 정치적 연합 조직이자 통일운동 조직이었어요. 일제강점기 때는 신간회라는 조직이 그런 역할이었고, 광복 후에는 백범이 만들려다가 안 됐죠. 좌우 대립으로 안 돼 왔던 건데, 민추협이 이를 깨고 통일 조직을 만들었던 거예요. 그 점에서는 의미가 있죠. 하지만 시작은 좋더라도 끝을 잘 맺지 못해 유시무종(有始無終)으로 남고 말았어요. 성과를 남기지 못한 채 오늘날의 이념 갈등과 지역갈등으로 이어져 버렸어요.”
- 원인은 뭘까요.
“YS와 DJ 모두 서로를 높게 평가했어요. 그러나 대권은 자기가 나서야 한다고 본 거지.”
양 김의 권력 의지로 풀이될 수도 있겠다.
“양 김은 자신의 대통령 당선이야말로 민주 정부의 탄생이요 민주화 실현이라고 주장했고, 양 계파의 구성원들도 이것을 신념화하고 있었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수없이 다짐한 단결과 ‘다시는 우매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란 되풀이된 맹세도 태생적 한계인 양 김의 ‘양분 분점 조직’이란 체질을 바꾸지 못했다. 민추협은 결국 두 개의 조직, 그 태생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 조직 구성원들도 이러한 재분열을 막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도 않았다. 결국은 양 김의 원심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 김도현, <6월항쟁과 민추협> 중-
“두 사람의 욕심이 원심력이라면, 내부에서는 구심력이 돼 대부분이 휩쓸려갔어요. 측근과 가신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가산주의(家産主義) 집단이었던 거예요. 보스한테 충성하면, 보스는 그것에 대한 보상을 주는 개념 말이죠. 정당도 가산주의죠. 보스가 이렇게 하자고 하면 하게 돼 있잖아요?”
6. 민주통신 주간
화제를 돌렸다.
- 1985년 민추협에 가담해 YS계가 되잖아요. 어떻게 합류하게 된 건가요.
“YS 비서실장이던 김덕룡이 내 친구예요. 12대 총선이 끝난 뒤인데, 나를 보자고 해서 봤더니 ‘우리를 도와 달라’ 그러더라고.”
김중태·현승일과 함께 6·3 시위에 앞장서며 박정희 정권에 맞선 서울대 문리대 3인방에 속했던 김도현은 1981년 11대 총선을 앞두고 김정남 추천으로 민한당서 성동구 공천을 받았다. 김덕룡도 6·3세대 주역 중 한 명. 김도현과 김덕룡 등 모두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제적됐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졸업을 하게 된다.
<영남일보>를 다니다 1980년 8월 강제 해직당한 후 서울의 봄 당시 홍사덕·최혜성과 김덕룡의 권유로 김영삼 낙원동 캠프에서 일한 적도 있다. 하지만 전두환의 등장으로 후일을 기약하고 해체하고 만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는 장준하·백기완과 막역한 사이였다. 이 때문에 11대 총선 공천을 받을 당시 신군부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보부가 1973년 말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가 ‘개헌 100만 서명운동’을 주도할 때 김도현이 동참했던 것을 이유로 공천을 받으면 안 된다며 민한당에 압력을 가한 것. 하지만 김도현은 민한당 지도부 신상우의 적극적인 노력에 간신히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낙선했고, 그러던 차 김덕룡으로부터 제의를 받은 것이었다.
“그래 도와주자. 그 뒤 뭘 할지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좋다. 그렇게 하자. 민추협 갈게.’ 그랬더니 YS를 만나자고 해요. 전에 한두 번 본 적은 있지만, 만났더니, YS가‘김 동지’라고 그래요. 이 분이 초면인데도 친근감이 있어요. ‘김 동지가 우릴 도와줘요. 신문이 아주 중요한데 말이오. 기관지를 만들고 있으니까 주간을 좀 하세요.’ 난 신문도 만들었고 하니까, 그러겠다고 했지요.”
- 근데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도 주간을 맡았잖아요.
“내가 주간을 하다가 통일민주당이 만들어졌거든요. 나는 당보 주간으로 갔고 서청원 씨가 <민주통신> 주간을 하게 됐죠.”
- 후임이네요.
“아주 사람이 좋아요. 친화성이 있고 말이죠.”
- 당시 재미난 일화 좀 들려주시죠.
“글쎄요. 난 비화 같은 게 잘 없는 사람인데, 아무튼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민추협이 투지는 대단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나는 그 안에서 논리 같은 걸 뒷받침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매주 정세 보고서를 짤막하게 올렸어요. 동지들과 ‘민추논단’이라고 해서 경제, 노동문제 등 이론 강좌도 하고 말이죠. 그때는 대변인이 없을 때인데, DJ가 귀국한 뒤에는 철저히 상도동, 동교동 동수로 배분했지요. 대변인 조직도 따로 구성해서 동교동계를 대표해 한광옥 대변인이 맡아서 했고요.”
7. 재야와의 가교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는 듯했다. 그의 눈가 뒤로 주마등처럼 여러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좀 지나면서는 재야, 종교계와 함께 연대투쟁을 했지요.”
6월항쟁 당시 국본 참여를 말하고 있었다. 김도현은 민추협을 대표해 국본 결성에 참여했다. 민통련의 성유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명준, 개신교 황인성과 함께 연대 틀을 조성하고 국본 결성 과정에서 실무적인 역할을 주도적으로 맡았다.
“다들 아는 친구들이어서 친했어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이미 DJ는 문익환 목사, 이해찬 등 재야와 깊게 연결이 돼 있었어요. YS는 그쪽과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 나보고 (재야와의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한 거지. 나는 정당 쪽보다는 재야가 편했어요. 정당 사람들은 김덕룡이가 어떻더라, 최형우가 어떻더라 하는데, 나는 사람 얘기에 대해 별 흥미가 없었거든. 그래서 재야 관계를 주로 했지요.”
- DJ와는 어땠나요.
“DJ가 상당히 좋아해 줬어요. 이희호 여사의 조카가 나와는 고등학교 동기인데, 그분이 DJ와 신뢰가 깊었어요. 나를 좋게 봤는지 공부도 잘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DJ한테 많이 말해줬던 것 같아요. 고맙지.”
- 근데 왜 동교동 쪽으로 안 갔나요.
“YS 쪽이 맘이 편해요. 김덕룡이 대학 친구고, YS도 문리대 선후배고 말이오.”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는지 다시 호탕한 웃음부터 터졌다.
“YS가 언론 덕을 많이 본 것도 문리대 출신 기자들이 많아서일 수 있어요. 일곱 여섯 개 신문사의 정치부장 내지는 선임기자가 문리대 친구들이었어요. 이 사람들이 YS를 좋아했어요. YS 말이 토막토막 단어만 있지, 문장이 안 될 때가 많았어요. 그럼 기자들이 알아서 문장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하하.”
-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것도 있을까요?
“YS 그분이 사람을 편하게 대해 주는 게 있어요. 술값 일화를 들면 이상합니다만, YS가 돈을 많이 쓰는 것도 아니에요. 나중에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DJ 쪽 단위가 더 크다는 거야. 예컨대 YS가 10만 원 20만 원 쓰면 DJ는 100만 원 쓴다는 거예요. 지나놓고 하는 얘기지만, 돈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죠.”
- 또 다른 일화는요?
“한 번은 YS가 불러요. 오전 11시 반쯤 돼서 ‘김 주간. 점심 약속 따로 없지?’ 그러고는 차를 타고 무교동쪽으로 가요. 수은회관 옆 중국음식점이 있는데, 거기 갔어요. 자장면은 아니고 요새 돈으로 만 원인가, 만 오천 원인가 하는 음식을 먹는데, 우리끼리 ‘무슨 중요한 얘기가 있나 봐’ 했지요.”
- 무슨 얘기던가요?
“알고 보니 경찰들 보라고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 네?
“경찰들이 감시할 거 아니에요. 김도현과 몇이 YS가 불러서 나갔다 이거야. 그때부터 경찰들은 ‘김도현 불러서 성명서 쓰려는 거 아닌가.’ 별의별 상상을 다 하는 거예요. 그분은 그런 게 탁월한 분이었어요.”
8. 민추협의 과제
인터뷰를 마치기에 앞서 개인 정치사에 대해 물어봤다.
- 정치적으로 잘 안 풀렸단 말이죠.
“나름대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지. 남의 눈이 아니라.”
‘허허’하면서 김도현이 답했다.
11대 총선부터 연거푸 총선에 출마했지만, 그때마다 낙선했다. 1992년 대선 때 YS 캠프에서 홍보 책임이던 박관용과 함께 부책임을 맡아 홍보 책임과 전략을 담당했다. YS 성명이나 연설문 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문민정부 당시 문화체육부 차관을 하게 된 것도 이때의 기여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15·16대 총선에서는 비록 고배를 마셨지만 2006년 제4회 지방선거에서는 강서구청장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명절이면 당직자들에게 으레 줘 오던 안동 고등어를 구청장 되면서도 선물로 돌린 것이 문제가 돼 당선무효형을 받았다. 스스로 봐도 정치 운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터였다.
“사람한테는 권력 의지가 있는데 말이오. 나는 그렇게 치열한 편이 못 되나 봐. 술자리 좋은 거 있고, 국회의원 좋은 게 있으면 나는 술자리 쪽을 쫓아갈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싶어요.”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환할 겸 장준하에 관해 물었다.
- 두개골 유골이 발견됐을 때 타살 의혹이 일었습니다.
“나도 그 시절 박해를 많이 받았지만, 박정희한테 겁을 안 낸 사람은 장준하와 윤보선밖에 없어요. 장준하는 정말 겁이 없었어. 젊어서 미군 특수 훈련을 받은 분이에요. 윤보선·함석헌·백낙준·이범석 이런 분들이 원로인데 장준하를 신뢰했어요. 그분만이 재야와 정치권을 아우를 수 있었지.”
또 이 말도 했다.
“요즘 학자들이 박정희 성과를 얘기하는데, 자그마치 17년 집권을 했어요. 미래를 위한 사례가 될 수 없어요. 누가 17년 독재를 합니까. 박정희를 배우라고 하는데 어떻게 배웁니까. 17년 집권하게 합니까, 노동운동 못 하게 합니까. 언론 보도 못 나가게 합니까. 성과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건이 전혀 안 되잖아요.”
이 말은 꼭 해야겠다는 듯 잠시지만 열변이 쏟아졌다. 끝으로 다시 민추협 얘기로 넘어왔다. 미처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던지며 갈무리했다.
- 지금 보면 6·10 항쟁의 공이 민추협 주역들보다 586이 독차지한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허허. 그런가요.”
- 안 그렇습니까.
“우리 때는 데모한 뒤에 취직도 하고 돈도 벌었다가 망하기도 했다가, 그러다 국회의원 비서관도 했다가 정치권에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은 너무 빨리 들어간 것 같긴 해요. 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데….”
- 故 노무현 전 대통령도 민추협 회원입니다. 이런 것은 왜 조명되지 않을까요.
“민추협 국민운동본부 부산 지역에서 개헌 활동을 많이 한 줄 알아요. 민주주의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민추협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봐요. 한계도 있지만 말이죠.”
87 민주화 체제를 만든 실질적 주역인 민추협. 어쨌든 그 공을 들춰내기에 시간은 더 필요한 듯 하다. 그것은 어쩌면 생존해 있는 민추협 주역들과 정신만큼은 계승했으면 싶은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닐까 싶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좌우명 : 꿈은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