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서거 6주기] YS는 왜 DJ와 통합을 갈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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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서거 6주기] YS는 왜 DJ와 통합을 갈망했을까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1.11.12 14: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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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군정종식 위해 DJ와의 야권통합 우선시했던 흔적 많아
5·18 명예 되찾아주고 전두환·노태우 구속시켰던 것도 YS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YS는 오랜 기간 지역주의자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사실 YS는 DJ와의 야권 통합을 우선시했던 인물이었다. ⓒ시사오늘 김유종
YS는 오랜 기간 지역주의자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사실 YS는 DJ와의 야권 통합을 우선시했던 인물이었다. ⓒ시사오늘 김유종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은 특정 시대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정의했다. 쿤에 따르면, 한 번 정립된 패러다임은 당대에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해석하는 ‘설명 틀’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아지면, 그 패러다임은 수명을 다하고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된다.

여기 낡은 정치적 패러다임 하나가 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지역주의자’라는 패러다임이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 YS가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주의 정치인이었으며, ‘3당 합당’이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이 호남을, 국민의힘이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주의 정당이 된 원인도 YS의 3당 합당에서 찾는다.

그러나 YS의 행보를 돌아보면, 지역주의자라는 규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발견된다. 쿤의 말대로라면, 이제는 생명력을 다한 지역주의자 패러다임과 작별을 고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이에 <시사오늘>은 YS 서거 6주기를 맞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지역주의자 프레임의 허구성을 증명하고, ‘반(反)군정주의자’로서의 YS를 조명해 봤다.

 

“동교동 측 요구 수용? YS는 석두”


YS와 DJ는 제13대 대선 단일화를 위해 협상을 계속했지만, 끝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연합뉴스
YS와 DJ는 제13대 대선 단일화를 위해 협상을 계속했지만, 끝내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연합뉴스

1987년 6월 29일 오전 9시.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 자리에서 노태우는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래 26년 동안 군부(軍部)의 손에 들어갔던 주권(主權)이 국민들에게로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에 ‘진정한 봄’이 찾아오자, 국민들의 시선은 YS와 DJ에게로 쏠렸다. 정치적 성향과 지지 기반을 고려하면, 두 사람이 모두 대선에 나서는 것은 곧 노태우의 승리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들의 단일화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DJ는 YS가 서독 방문 때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되면 후보로 지지할 것”이라고 발언한 것을 내세워 양보를 요구한 반면, YS는 DJ가 1986년 11월 발표한 “직선제가 수용되면 불출마할 것”이라는 약속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YS와 DJ는 9월 14일부터 29일까지 여러 차례 회동을 열어 단일화 논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보름 동안 지속된 양자의 만남은 서로간의 입장 차를 확인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특히 통일민주당 내 지분구조가 문제였다. 당시 민주당의 전국 92개 지구당 가운데 창당지구당은 56곳이었는데, 그 중 30곳이 YS 쪽, 26곳이 DJ 쪽이었다. 이에 동교동 측은 상도동계가 창당지구당을 많이 갖고 있으니 미창당지구당 36곳 중 23곳을 동교동계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상도동 측은 18곳씩 50 대 50으로 나눠 임명해야 한다고 맞섰다.

사실상 대선 후보 경선 승패와 직결되는 양측의 줄다리기는 한 달여 동안 계속됐다. 그렇게 교착 상태가 이어지던 10월 22일, YS는 외교구락부에서 DJ를 만나 동교동 측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하고 경선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상도동 측에서는 ‘YS가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는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YS는 DJ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만이 단일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심의석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YS와 DJ가 외교구락부에서 만나고 있을 때 민주산악회 경기도 광명 지부 창립대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김동영, 최형우, 노병구, 김덕룡 등 YS를 제외한 상도동 핵심이 다 있었는데, YS가 DJ에게 한 제안이 알려지자 ‘김영삼은 석두(石頭)’라는 탄식과 함께 소란이 일 정도였다. 그만큼 YS에게 불리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DJ는 의외의 반응을 내놨다. “이제 때가 늦은 감이 있다. 양측이 경선할 때는 지금 같은 정보공작 정치 하에서 위험과 불미스런 사태가 우려된다.” 그러나 다수 증언에 따르면, 당시 DJ는 ‘4자 필승론’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4자 필승론이란 노태우(대구·경북), 김영삼(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모두 출마해 각자 자기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DJ 본인이 당선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결국 DJ는 10월 28일, 대선 출마와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언하며 민주당을 탈당한다. 그리고 노태우와 YS, DJ, JP(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나서면서 지역주의 구도로 치러진 제13대 대선은 노태우의 당선으로 끝을 맺었다. 이 대목에서 ‘지역주의자’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YS는 왜 자신에게 불리한 제안을 수용하면서까지 ‘호남 출신 후보’인 DJ와의 통합을 추진했을까. 정말 YS는 지역주의자였을까.

 

“군정 종식하려면 DJ 요구 수용해야”


DJ는 소선거구제 도입을 야권 통합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연합뉴스
DJ는 소선거구제 도입을 야권 통합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연합뉴스

YS와 DJ의 독자 출마는 제13대 대선에서 노태우의 당선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결국 YS는 대선이 끝난 후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룩하지 못한 부덕의 소치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으며, 깊이 자성하고 사과드린다”는 내용의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곧바로 4개월 후에 있을 제13대 총선을 위한 야권 단일화 작업에 돌입했다.

1988년 2월 8일. YS는 야권 통합을 위한 총재직 사퇴를 발표했다. ‘조건 없는 야권 통합’을 위해서는 자신이 물러나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YS의 사퇴와 함께,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의 통합 협상에는 속도가 붙었다. 양당은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야권 통합기구 합동회의를 갖고 총선 전 양당을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거구제’가 문제였다. ‘무조건 통합’을 주장한 민주당과 달리, 평민당은 ‘소선거구제 합의 후 통합’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호남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평민당은 소선거구제를 도입할 경우 제1야당으로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전국구 정당’이었던 민주당은 중선거구제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민주당과 평민당은 다시 한 번 팽팽한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선거구제에 대한 이견으로 야권 통합이 무산 위기에 놓이자, 또 다시 YS가 나섰다. 총재직 사퇴 후 설악산, 속리산 등을 오르며 잠행하던 YS는 DJ를 만나 소선거구제 수용 의사를 밝혔다. YS의 ‘오른팔’이었던 김덕룡이 “소선거구제를 받으면 우리가 제2야당으로 추락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군정을 종식하려면 야권 통합을 해야 한다’는 YS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당시 ‘소선거구제로 총선을 치를 경우 민주당이 평민당에 뒤처져 원내 3당으로 추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YS의 차남 김현철은 과거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당시 여론조사를 하면 민주당은 중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게 유리했고 평민당은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게 유리했다. 그런데 DJ가 소선거구제로 바꾸지 않으면 선거를 보이콧하겠다고까지 하니까 YS가 양보를 했던 것”이라며 “YS가 불리한 걸 알면서도 양보를 했던 이유는 야권 통합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통합 협상 최종안에 도장을 찍기로 한 3월 19일, 회동 장소였던 서울 마포구 서교호텔에 느닷없이 평민당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에 대해 최형우는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에 “양당의 협상 대표들이 만장일치로 합당 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기대에 들떠 있었는데, 웬일인지 DJ의 서명을 받으러 간 평민당 대표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며 “뒤늦게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들의 낯빛이 별로 밝지 않았다. DJ가 끝내 우리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썼다.

서교호텔에서 벌어진 소요(騷擾) 사건으로 민주당과 평민당의 통합 협상은 중단됐다. 그리고 김덕룡과 김현철 등이 우려했던 대로, 소선거구제 하에서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은 총 70석을 얻으며 원내 제2당으로 올라섰다. 민주당은 59석에 그치며 원내 제3당으로 떨어졌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 YS는 왜 원내 제3당으로 추락할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호남 기반 정당’인 평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했을까. 정말 YS는 지역주의자였을까.

 

5·18 명예 회복하고 전·노 구속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킨 것도 YS였다. ⓒ연합뉴스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킨 것도 YS였다. ⓒ연합뉴스

김덕룡은 과거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YS의 목표는 언제나 단 하나, 군정 종식이었다. DJ와 손을 잡으려 했던 것도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보면, DJ와의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YS가 3당 합당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야권 통합은 군정 종식으로 가는 수단이었지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DJ와의 야권 통합을 통한 군정 종식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YS는 결국 3당 합당이라는 차선(次善)책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DJ의 ‘4자 필승론’ 구도에서 DJ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손을 잡은 3당 합당은 호남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많은 사람들이 YS를 지역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배경이다.

그러나 3당 합당이 ‘결과적으로’ 지역주의를 고착화·악성화시켰을지언정, YS가 ‘지역’을 정치적 판단 기준으로 삼거나 국정 운영 과정에서 특정 지역을 배제하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렸던 광주 시민들의 명예를 되찾아주고, 출신 지역을 막론하고 군부독재 세력을 축출하는 ‘반(反)군정주의자’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실제로 YS는 대통령이 된 후 ‘역사 바로 세우기 관련 특별 담화’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면서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라고 선언했다. ‘폭동’이나 ‘사태’ 등의 부정적 단어로 불렸던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것이다.

또 YS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1979년 12·12 쿠데타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정지하도록 했다. 신군부세력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해서였다. 또 광주에 국립 5·18 민주묘지가 조성되고 5월 18일을 기념일로 지정해 정부가 공식적인 행사를 시작한 것도 YS 때부터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도 문민정부 시절이었다. 전두환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노태우는 대구에서 나고 자란 ‘영남 정치인’들이다. 지역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YS가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키는 것은 정치적 기반을 통째로 흔드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YS는 두 사람을 단죄하면서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정세운 시사평론가는 <시사오늘>과 만난 자리에서 “YS가 지역주의자라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터무니없는 프레임”이라며 “애초에 YS는 호남 출신인 DJ와 야권 통합을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된 뒤에도 역사 바로 세우기로 5·18의 진실을 밝히고 전두환·노태우라는 영남 출신 대통령들을 처벌했는데 어떻게 지역주의자라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면서 “YS가 갈등·분열이 아닌 대화·포용의 인물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YS는 오랜 기간 지역주의자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사실 YS는 DJ와의 야권 통합을 우선시했던 인물이었다. ⓒ시사오늘 김유종
YS는 지역주의자였을까 아니면 반군정주의자였을까. ⓒ시사오늘 김유종

3당 합당 이전, YS는 DJ와의 야권 통합으로 군정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심지어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발족 당시에는 DJ의 반대에도 동교동계를 설득해 민추협에 참여시키고 지분을 5대5로 나눴던 적도 있었다. 나아가 공화당 측 인사였던 김창근과 박찬종을 민추협에 끌어들였으며, 미국에 체류 중이던 JP에게까지 사람을 보내 민주화 연대투쟁에 나서 달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지역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민주화를 매개로 반(反)군부 세력의 통합을 추구했던 인물이 YS였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에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군부세력을 축출했으며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켰다. 이런 이유로 5·18 관련 단체들은 5·18 특별법 제정 20주년을 맞은 지난 2015년 YS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공로패를 차남 현철 씨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지역주의자 YS’ 패러다임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이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질 시간이다. YS는 지역주의자였을까 아니면 반(反)군정주의자였을까.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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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9단 2021-11-12 16:24:03
김영삼, 당신이 그립습니다. 3김을 지역주의자라고 하는 얘기는 틀렸습니다. 김영삼은 호남을 포함해 전 국민을 사랑한 지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