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생명 담보로 ‘호주머니 챙기기’의 교과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 강정화 기자]
최근 원전 납품비리를 수사한 검찰이 한국수력원자력(사장 김균섭, 이하 한수원) 본사 처장급 직원을 비롯, 납품업체 대표, 브로커 등 관련자 47명을 무더기 기소했다.
지난 10일 울산지검 특별수사부(부장검사 김관정)은 원전납품 비리와 관련, 처장급 2명을 포함, 한수원 본사 직원 6명, 현장직원 16명을 구속기소 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금품을 살포한 협력업체 대표 7명, 한수원 본사 고위간부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브로커 2명도 구속기소 했다.
소액 금품수수와 직무상 취득한 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 상납 등 비리사실이 확인된 직원 12명은 한수원 측에 통보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지난해 10월 부산지검 동부지청이 고리2발전소 납품비리 수사를 진행하자 심리적 부담을 느낀 동료직원이 자살했음에도 계속적으로 금품을 받아 오다 적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입건된 한수원 직원 23명의 총 수수금액은 약 22억2700만 원으로 1인당 평균 9870만 원을 받아 챙겼다고 검찰은 밝혔다. 한수원의 납품 비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단순히 금액이 큰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맞바꾼 대가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다.
원전 부품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형태의 비리가 벌어져 한수원 직원들이 원전 안전성은 뒷전이고 뇌물 챙기기에만 전념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한편 검찰의 원전 납품비리 수사는 지난해 9월 모 은행 주차장에서 거액의 현금을 음료수 박스에 담아 포장하는 것을 보았다는 한 시민의 제보로 시작됐다. 제보자의 전화 제보를 바탕으로 시작돼 올해 3월 브로커가 구속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검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업무의 보안성과 특수성으로 인해 그동안 접근하기 어려웠던 주요 국가기간시설인 원전 관계자들의 구조적 비리가 확인된 사건이다"며 "유착관계가 특정 지역, 특정 발전소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특수부 소속 검사를 모두 투입,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한수원, 상상초월하는 납품비리 집단
원전납품 비리는 일선 발전소 현장 직원에서부터 본사 처장, 협력업체 관계자, 브로커까지 다양한 계층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한수원 본사 처장 A씨는 감사실장 근무시절 협력업체 2곳으로부터 모두 7000만 원을 받은데 이어 협력업체 등록과 입찰을 담당한 본사 직원들에게까지 금품을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한수원 본사의 일선 발전소에 대한 통제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구조였음이 확인됐다.
특히 한수원은 발주금액 10억 원 이상 또는 전 발전소를 상대로 하는 주요 입찰의 경우가 허다하다. 이 경우 한수원 본사를 거쳐야 하는 점이나 납품하기 위해서는 한수원 본사에 협력업체로 등록해야 하는 구조 등이 브로커의 개입을 가능케 하고 비리가 한수원 고위직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입찰업체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한수원 본사로부터 경영ㆍ품질ㆍ기술검사를 거쳐야 하고, 이후 한수원이 발주하는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수요예측을 통한 입찰 준비가 필수적이다.
브로커들은 이런 점을 노려 컨설팅을 빙자해 직접 금품을 받고 한수원 직원들을 상대로 골프, 향응, 금품 제공 등 로비를 대신했다.
모 원전 2발전소의 경우 팀 전체가 금품수수에 연루될 정도로 조직적인 비리가 이뤄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재납품과 관련, 편의를 제공하거나, 원전내 부품을 빼돌려 특정업체로 하여금 복제품을 생산토록 해 금품을 수수했다.
또 한수원 직원들은 납품가격이 부풀려진 사실을 알고도 돈을 받고 묵인하거나, 관련 업체를 운영하고, 이를 묵인해주는 대가로 금품을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났다. 입찰자격 제한을 피하기 위해 친인척이나 직원 명의로 새로 법인을 설립해 한수원과 거래를 계속했다.
B씨는 원전계측제어시스템 개발업체로부터 적정가보다 2억 원을 더 부풀린 13억5000만 원의 견적을 받고도 이를 묵인하는 대가로 8000만 원을 받았다. 이후 이 같이 부풀려진 견적이 표준 가격으로 인정돼, 해당 기술은 다른 발전소에도 부풀려진 가격으로 납품해 막대한 부당이익을 얻었으며 이는 원전의 유지, 보수비용 증가를 초래하기도 했다.
B씨는 앞서 2010년 전기팀 원자력파트 과장으로 근무하던 동료가 처의 명의로 공사인력을 공급하는 L회사를 설립, 한수원 공사에 인력을 공급한 점을 묵인한 혐의도 받고 있다.
또 본인과 친분이 있는 M업체 대표에게 원전에 보관 중이던 수입산 밀봉유니트를 불법적으로 반출, 복제품을 생산, 납품하게 했다. 그 대가로 8000만 원을 수수했다.
전기팀 과장 C씨의 경우 친척 명의로 한수원 협력업체를 설립해 운영, 수십 억의 매출을 올려 온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C씨가 한수원 밖에서는 최고급 대형승용차를 타면서도 한수원 안에서는 경차를 이용하는 등 개인사업을 하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다고 설명했다.
전자입찰제도를 유명무실하게 하는 업체간 담합도 성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업체는 입찰공고가 나기 전부터 업체들과 담합, 형식적인 입찰절차를 거쳤으며 한수원 직원 D씨는 N업체의 경쟁사인 O사에 입찰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한수원 간부가 납품업체의 주식거래를 통해 수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은 경우도 있었다. 한수원 본사의 E 처장은 코스닥에 상장된 납품업체의 주식을 2008년 2,900원에 매수해 1년 뒤 37,000원에 매도해 약 7억 원의 시세차익을 올렸다.
E 처장이 M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가 UAE 원전 수출 발표 직후인 2010년, 1월 초순경 매도한 점에 비춰 직무상 알게된 사실을 통해 주식 매도 시기를 조절한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
이 외에도 원전 납품비리와 관련 고급리조트 일주일 숙박예약과 부부동반 골프접대 등이 이뤄졌다. 한 원전 차장의 처는 남편 승진을 위해 금 1냥을 발전소장에게 상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비리가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한수원 직원이 납품업체에 직접 상납을 요구하기도 했다. 모 발전소 G팀장은 한 업체 대표에게 "인사에 있어 도움을 받기 위해 상사에 상납해야 하니 일본 P사 골프 퍼터를 사달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 이후 발전소장에게 상납했다. 그 대가로 2년 이상 동안 사내자료인 ‘일일업무보고’ 일지를 납품 업체에게 유출했다.
한수원 관계자는 "원전이 국민의 안전과 관련된 만큼 향후 관계기관에 적극적으로 수사자료를 제공해 원전안전성 확보에 노력하겠다"며 "앞으로 한수원 직원과 납품업체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는 단서가 있는 한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말했다.
한수원 납품 비리 도대체 몸통은 누구?
한수원 납품 비리에 대한 내부의 탄식도 만만치 않다. 지난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수원 본사 관리처장 A씨가 연행됐다. A 처장은 지금까지 구속된 인사중 최고위직이다. 직원들의 충격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그동안 본사 고위 간부에 대해 수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검찰이 지목한 고위직이 A 처장인지는 아직 명확치 않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된 지난 3달이 지나도록 고위직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아 한편에서는 안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A 처장의 구속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A 처장은 구속 적부심에서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영장 전담판사는 A 처장이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있다며 영장 발부를 강행했다.
문제는 당시 A 처장이 감사실장을 역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3월 지금의 관리처장으로 옮겨왔지만 감사실에서 한수원의 내부 비리를 감찰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한수원의 또 다른 걱정은 감사실장까지 비리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가운데 비리가 그 윗선까지 연결됐을 가능성을 배제치 못한다는 점이다. 검찰은 수사중인 사건에 대해 알려줄 수 없다는 원론적 입장을 반복하고 있지만 본사 임원들에 대한 소환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얘기가 한수원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현재 한수원의 고위간부는 사장, 감사 외 5명의 본부장이다. A 처장 위로는 모두 7명의 상관이 있다.
사장은 '인사약속' 깨고 노조와도 불통
게다가 김균섭 한수원 사장도 취임하자 마자 '인사 약속'을 깨 반발을 사고 있다. 지난 6일 한수원 및 노조에 따르면 김 사장은 지난달 초 취임후 다음날부터 노조간부들과 만나 직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던 '15년 이상 기술직 사원 강제 이동'에 대한 얘기를 전달했다.
즉, 한수원은 납품비리 사건이 터지자 대국민 신뢰 회복과 비리 퇴치 차원에서 고참급 기술직 사원들의 인사 이동을 결정한 바 있다. 노조는 이 자리에서 "원전의 특수성을 고려해 원칙 없는 인사이동은 안전성에 문제를 줄 수 있고 전력 대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강제 이동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사장은 이에 "충분히 검토한 후 결정하겠다"며 유예 입장을 밝혔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다음날인 지난달 13일 전격적으로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발전업계의 관계자는 "일부에서는 신임 사장이 원전의 매커니즘을 너무 모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며 "이는 전력대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 또 다른 관계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못내고 정부의 시나리오에 맞춰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김 사장은 지식경제부의 전신격인 산업자원부 국장 등을 거쳐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신성솔라에너지 부회장 등을 거친 에너지 전문가지만 원전과 관련된 일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한수원 직원들의 납품비리에 지역 환경단체가 고리1호기 폐쇄를 강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울산환경운동연합은 지난 10일 성명을 통해 "고위직부터 말단까지 '원전 비리' 한수원 직원이 구속됐다"며 "납품비리로 얼룩진 한수원을 못 믿겠다. 고리 1호기 원자로압력용기를 재점검하라"고 요구했다.
울산환경운동연합은 "온갖 비리로 얼룩진 한수원에게 수명 다한 고리원전 1호기 재가동 결정을 믿고 맡긴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이런데도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고리 1호기 재가동을 승인한 것은 지역주민과 국민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처사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