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죽음의 진실②>장준하 죽음의 재구성, 결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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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죽음의 진실②>장준하 죽음의 재구성, 결론은?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2.09.12 1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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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암살이요 학살이요 비열한 암살이요, 학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시사오늘(사진제공=장준하 기념사업회)
장준하 죽음은 의문 투성이다. 많은 이들은 정치적 암살이라고 입을 모은다. 심증도 있고 물증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밝힐 수가 없다.

지난 8월 1일 묘지 이장에 앞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장준하 선생의 유골. 이미 죽어버린 그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다만, 그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들, 혹은 그 시대를 모른 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마지막 남아 있는 유골로서 말을 걸고 있다. 어쩌면 죽은 지 37년이 된 지금  장 선생의 유골이 밝혀진 건 신의 한 수였는지도 모르겠다. 유신은 지나갔고 당시보다 과학은 발전됐다.

취재 결과 <시사오늘>은 3가지 가설을 유추해봤다. 먼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실족사'라는 가설이다.  장 선생이 추락하는 걸 유일하게 봤다는 김용환 씨 진술대로 그는 정말 실족사 한 걸까.

문제는 조사할 때마다 일관성이 없는 김 씨의 진술 흐름대로 따라가면 답이 안 나온다는 것. 장비를 갖춘 전문 산악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려워 하는 곳을 구두를 신은 채 한달음에 내려왔다는 그의 말을 믿게 되면 미스터리, 기적, 불가사의 등등이 떠오를 뿐이다. 이외에도 그를 둘러싼 의문점들은 수없이 많이 나와 있다. 따라서 이 가설은 폐기하도록 한다.

"텐트 안에서 암살됐다?"

윤재걸 전 동아일보 기자는 장준하 의문사를 최초 장문의 기사로 내보낸 이다. 지난 9일 통화에서 그는 "장준하는 정치적 모살을 당한 것이 맞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은 것일까.

당시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의 취재를 한 그가 내린 유추는 "텐트에서 암살됐을 가능성 높다"고 했다. 김용환 씨는 약사봉 계곡 입구에 도착해 장 선생이 올라갔다는 정상 쪽으로 갔고, 10분쯤 뒤따라갔더니 군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장 선생을 발견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윤 기자 말로는 김 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결과 군인들이 있던 그 장소에는 텐트가 있었다고 한다.

"(김용환과 직접 만나 인터뷰 하기 위해 8번 가량 통화를 하면서 알아낸 바로는) 김용환 말로는 장준하 선생이 사람이 좋아서, 군인들이 2~3명 있는 것을 봤대요. 아, 선생님 커피 한잔 하시라고…그런데 텐트 안에 들어갔다는 말만 나오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는 얘기는 안 나와요. 그게 아주 의문 나는 대목이에요."

ⓒ시사오늘(사진 제공=장준하 기념사업회)
- 월간조선에서는 김 씨는 텐트를 보지 못했다, 이랬다고 반박하던데요.

"아니, 기자가 취재원이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기사에 씁니까."

김 씨는 장 선생이 벼랑 쪽으로 하산하다가 장 선생이 벼랑 아래로 추락했다고 진술했다. 윤 기자는 단적으로 이 부분에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취재할 당시 실족사했다는 곳을 보고 장 선생이 누워있던 자리를 봤더니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가 아닌 모랫바닥이에요. 의문점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우리가 확인해 봤는데 장준하 선생 귀 뒷부분에 드라이버 비슷한 것으로 뚫어버린 흔적이 있었어요. 귀 뒤가 급소거든.

귀 뒷구멍에만 피가 흥건히 나왔어요. 실족사 한 사람이 다른 덴 별 상처도 없는 데 다치기도 어려운 귀 뒤쪽의 급소가 대체 왜 뚫린 걸까. 나뭇가지가 뚫었다고 생각해도 말이 안 되고…. 그 당시는 드라이버로 쑤신 게 아닌가, 그런 유추가 들었죠. 타살된 게 맞다면 (암살요원들이) 텐트 안에서 주삿바늘로 죽인 다음 시체를 현장으로 데려간 게 아닌가 싶어요."

1975년 조철구 박사가 작성한 장 선생에 대한 시체 검안 소견서를 보면 직접 사망의 원인은 '우측두기저부 함몰골절상으로 말미암아 두개강 내 손상으로 추정됨'이라고 적혀 있다. 또 '우측 둔부(엉덩이)상 외면에 주삿바늘 자국', '우측 상박(팔 위)외측부에 주삿바늘 자국 확인'이라고 나와 있다.

1993년 문국진 박사의 법의학적 소견을 보면, 주사 자국의 경우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주사하면 구멍이 커진다고 한다.

ⓒ시사오늘
"버스 안에서부터 암살요원들이 동행했다?"

『이날 등산은 장준하의 계획에 없었던 일이다. 매주 함께 가던 (이철우 백기완 전대열) 동지들과 쉬기로 약속했던 분이 어째서 혼자서 산에 가게 되었는가? 이 날 사고가 없었더라면 이 문제는 아무런 얘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날 산행에서 장준하는 희생되었고 그 내면을 파헤치려면 근본 원인을 따져야만 하는 것이다. 등산을 가자고 권유한 사람은 누구인가?"-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문집 <광복 50년과 장준하>에 게재된 전대열 평론집 <장준하 죽음의 진상> 중-』

1975년 8월 17일 장 선생은 김희로(시인, 현재 평화신문 부산지사 근무)와 김용환(현장 동행자) 그리고 김용덕(당시 호림 산악회장) 등과 약사봉으로 떠났다. 그는 왜 평소 같이 가던 이들과 등산하지 않은 걸까.

지난 10일 <시사오늘>과 통화 했던 장 선생의 비서였던 이철우 선생 역시 이 점을 의아해했다.

"하루 전에 (김용덕 회장)그 사람들이 전화를 해 오지 말라고 했어요. 자리가 없다고요. 같이 가는 걸로 알았는데 사람이 넘친다고 오지 못하게 해서 저는 애들 데리고 다른데 간다고 했어요."

- 장준하 선생님한테는 그런 말씀을 드렸나요.

"못 드렸지요. 장 선생님이 버스를 타면서 '이철우가 안 보입니다', 이러셨대요. 그러니까 그자들이 '자기 아이들하고 북한산에 간다고 했다'고….그랬대요.(사이) 그 산악회가 안내 산악회라고 돈을 받아요. 신문에 산악회가 쭉 나온다고요. A 산악회는 어디, 호림 산악회는 약사봉….

예를 들어 만원을 낸다면 호림 산악회에서 장 선생이나 저나 김용환 등에는 회비를 못 받는 것보다는 안 받죠. 그런데 그날은 저 보고 자리가 없고 사람이 많다고 말하니까, 제가 하는 수없이 ‘그러냐. 우리 애들 데리고 북한산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했던 거죠. 이걸 그 사람들이 기억해 뒀다, 장 선생이 버스를 타면서 이철우가 안 보인다고 하자 이철우 씨는 애들 데리고 북한산에 갔다고 말한 거예요.

그런데 의문사 규명위원회에 이 얘기를 자세히 했는데 자기들이 어떤 원칙을 세웠는지 귀담아 듣지 않더라고요. (사이) 제가 본 것은 아니지만 보름 전에 장준하 선생 사모님이 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제 얘기를 했대요. '이철우를 그 사람들이 빼먹고 가고 말이야….'"

- 선생님을 쏙 빼놓고 간 거로 봐야 하나요.

"그럼요."

-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김희로라고…백기완 씨 친구가 있어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왔잖아요. 김희로 씨라는 분이 장 선생 측근이거든요. 그 당시에 이 사람이 장 선생을 쫓아가야했다고요. 등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해야 했는데 이 사람이 밥때를 이유로 중간에서 밥 먹는다며 그러고…. 산악회 사람들하고 모여 앉았으니까…, 장 선생이 멀거니 쳐다보면서 '잠시 좀 갔다 오겠습니다' 산 쪽으로 가셨대요. 그러니까 김용덕이가 미안하니까 나중에 쫓아 나왔다는 거예요.

다시 얘기하면 제가 만약에 갔으면 장 선생과 5m 이상이 안 떨어지거든요. 설악산을 가든 어디를 가든 장 선생과는 안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저를 떼어놓고 간 거예요. 사람 하나 죽이는 것보다는 둘 죽이는 게 힘이 드니까.

(어쨌든)김희로 씨라는 분은 백기완 씨의 친구입니다. 밥때를 이유로 장 선생님 가는 걸 안 쫓아갔으니까…나중에 백기완 씨가 그걸 알고 귀싸대기를 때려서 김희로 씨가 그날 이후 나타나지 못한 거예요.”

ⓒ시사오늘(사진 제공=장준하 기념사업회)
- 약사봉 가길 원치 않았다고 하던데요.

"장 선생이 광복절은 국군묘지 가서 이범석 장군 성묘를 하신다고…그날이 바로 17일 아니에요. 아, 나는 임시정부 했던 분들 성묘나 하고 못 가겠다 했더니 아이, 자리를 다 만들어 놓고 회원들이 선생님이 나오시는 줄 알고 있다고 하더라는 거예요. 사모님이 다 아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그럼 가겠습니다.’…이랬대요.

호림 산악회 사람들은 옛날 구 서울운동장에서 출발했는데 선생님은 종로 6가 출발 장소로 안 나가셨고 댁 앞인 상봉동에서 출발하셨어요. 그 사람들이 약수 봉에 가려면 상봉동을 지나야 하니까. 오전 9시 30분에 상봉동 댁 앞에서 탔대요."

- 장 선생이 김용덕 회장과 김용환 씨와는 잘 알던 사이인가요.

"김용환과 호림산악회 회장하고 장준하 선생을 돕는다며 선거운동을 했대요. 그래서 김용덕 회장하고 김용환, 이 둘은 친한 사이예요.

그 당시 저는 김용환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고 별안간 선거 때 나타나서 장준하 선생한테 아부하고 그러니까…(수상해서) 지구당 부위원장이 그 사람 집을 알아보라고 해서 알아봤더니 이문동 어디에 하숙하고 있더라고요. 장 선생님은 김용환 씨를 잘 몰랐지만, 그 사람이 선거운동했다고 하니까…. 정치인들이 선거운동했다고 하면 '아, 수고했다'고 하지 않아요.”

이철우 선생은 그러면서 “김용환은 훈련받은 사람”이라며 “아주 한 건 했다”고 말했다.

“의문사위원회에서 살인미수범 조사하듯이 단호하게 했다면 진실을 말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김용환이가 조사하는 걸 지켜본 사람들 얘기로는, 간첩 훈련받은 놈들이 조사관을 데리고 놀듯이 김용환이도 헤헤거리면서 놀더래요. 조사하는 이들도 무슨 명령이 떨어졌는지 ‘그랬습니까’, ‘저랬습니까’, 참고인 조사하는 것처럼 했대요.”

2002년 진상규명위가 기록한 바로는 당시 중앙정보부 국 5과 3계장 박○식은 장준하 등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 사설 정보원(Private Personal Agent, 이하 P/A라 한다)을 고용한 바 있는데, 위 김용덕과 김용환도 장준하 관련 P/A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진상위 확인 결과 중앙정보부는 장준하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동향을 파악했다. 진상위가 입수한 1975년 3월 31일 문건은 "장준하의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여 이를 와해·봉쇄함으로써 조직 확장과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 범법 자료를 수집토록 하고 공작 필요시 보고 후 실시한다"고 나와 있다.

이철우 선생 말을 들어보니 더욱 의문투성이다. 이와 관련, 한 인사는 “일반인들하고 산악회원들하고 해서 40여 명이 약사봉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고 한다면, 일반인 중에 장준하 선생을 암살하려는 행동대원 몇 명이 있었을 것”이라며 "애초부터 산행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 전에 전문 암살요원들이 암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용환 씨 경우는)유인책 정도이지 결행할 만한 인물은 못 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시사오늘(사진 제공=장준하 기념사업회.)
"장준하의 거사는 시작이다"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20일 재야인사들과 함께 박정희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전국 단위의 거사를 도모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거사였는지는 지금까지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다. 3·1 운동, 4·19 혁명 같은 거사였을까. 어찌 됐든 장 선생은 거사를 앞둔 3일 전 의문사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37년 후 장 선생의 유골은 지름 6cm의 원형 둔기로 맞은 듯한 뚜렷한 흔적과 함께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2012년…. 우연이지만 의미심장하게 발견된 장준하 선생의 유골. 어쩌면 미완성으로 남은 그의 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이제라도 거사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것은 아닌지.

취재하는 동안 엉뚱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장준하 선생의 동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지난 10일 <시사오늘>에 핏대를 세우며 호령하듯 말했다.

“이건 박정희의 학살이요 암살이요, 비겁한 학살이요, 암살입니다.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얼마나 악랄하게 사람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죽이고 해방 통일운동을 죽였느냐! 그게 이번에 드러났어요. 유신 잔당을 청산해야 할 구체적인 자료가 드러난 거예요.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 현 정권인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딸인 박근혜가 책임져야 해요. (기자에게) 박근혜 얘기를 안 물어보고 왜 계속 딴 얘기를 물어봐. 안 그래요? 박근혜가 무서워? 거듭 말하지만 장준하 선생 사건의 마지막 결론은 박정희의 끔찍한 학살이요 암살이요, 더군다나 비열한…. 젊은이, 비열하다는 말 알죠? 그래서 박근혜가 책임지고 완전히 밝혀야 해요.

박근혜가 유신은 역사에 맡기자, 그랬잖아요? 사실이 드러났는데 왜 역사에 맡겨요? (사이)이번에 사진 봤죠? 분명히 쇳덩어리 같은 걸로 딱 때려죽였다는 거…암살기술자가 죽였다는 거! 실증적인 건 밝혀졌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박근혜가 완전히 매듭을 지어라, 이 말입니다. 그때 당시의 중앙정보부 요새는 국정원이라고 그러죠? 그걸 몽땅 발칵 뒤집으면 증거가 나와요. 박근혜가 밝혀야지 누가 밝혀요."

ⓒ시사오늘(사진 제공=장준하 기념사업회.)
백 소장은 말하는 내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 말이 나온 김에 故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박정희는 왜정 때 친일파였잖아요. 이건 민족적인 배신을 한 거예요. 8·15 광복 때는 군대 안의 남로당 조직에 있다가 그걸 폭로해서 수백 명이 총살당했잖아요. 이건 인간적인 배신을 한 거예요. 거기다 이승만 정권이랑 싸워 민주화를 이룩했는데 총칼 들고 민주화의 모든 씨앗과 역사를 말살했잖아요. 이건 민주주의를 배신한 거예요. 첫째는 민족반역, 둘째는 인간반역, 셋째는 민주반역! 전세계 반역자 중 역사적으로 3대 반역을 한 이는 박정희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그가 평생을 존경했다는 장준하 선생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 어떻게 기억돼야 할까.

"그분은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의식과 행동을 발전시킨 진보적인 해방통일의 지도자예요. 위대한 진보적 지도자예요."

한편 SBS<그것이 알고 싶다>방송에 따르면 김용덕, 김희로 씨의 행방을 수소문해봤으나 알 길이 없었다. 또 주소로만 가까스로 찾아 만난 김용환 씨와는 1시간 30여 분 간 승강이를 벌였으나 37년 전 일 만큼은 극히 언급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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