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글 : 이준영 장준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장준하 기념사업회 이준영 사무국장을 만나러 간 날은 지난 6일. 장준하 선생의 죽음과 관련 풀리지 않는 의문의 실타래들, 그중에서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핵심사항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이 사무국장은 8월 16일 유골 사진 공개 후 일부 언론들이 왜곡한 내용에 대해 먼저 짚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료를 건네준 게 이 사무국장이 작성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한 브리핑>(이하 브리핑)이라는 제목의 문건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국장과의 인터뷰도 브리핑 내용의 골자에 관한 얘기였고, 그 줄기의 연장선이었다. 개중에는 오프더레코드(비보도)로 들은 얘기들 가운데 화제가 될 만한 요소들도 상당 부분 됐다. 어쨌든 기사로 옮기지 않는 것을 전제로 오간 얘기였기에, 이 부분은 차치하기로 한다.
남은 것은 장준하 의문사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이 사무국장이 강조한 사항들을 옮겨보고자 한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지면 할애 하는 대신, 이 사무국장이 작성한 브리핑 문건 중 주요 지점을 게재하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높이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 아래와 같이 주요 부분을 발췌해본다.
“김용환은 용의선상에 오른 한 명일 뿐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기 위원회는 김용환을 그의 주장에 따라 ‘목격자’로 분류하였으나, 2기 위원회는 그를 ‘동행자’로 재분류했다. 목격자는 목격자답게 진술의 일관성, 신빙성이 있어야 하고 사건을 전후한 그의 행적이 명백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진술을 거듭 뒤집거나 사건 당시 행방이 묘연하다면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스스로 용의선상에 오를 뿐이다.
그는 75년 8월 17일 사건 당시의 진술, 통일민주당의 요구로 약식 진행됐던 1988년 포천경찰서 재조사, 1차 의문사위 조사, 2차 의문사위 조사, 2004년 월간조선 인터뷰, 최근의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자신의 말을 계속 바꿔왔다. “소나무를 잡고 떨어지는 것을 봤다, 아니 보지 못했다, 다시 봤다, 다시 못 봤다”고 진술을 계속 뒤집어왔다. 떨어졌다고 하는 위치도 매번 바뀌었고, 상황에 대한 진술도 계속 뒤집었다. 즉 그의 목격진술에 일관성과 신빙성이 없다.
장준하 선생이 실족 추락사했다는 당시 검찰 공식발표는 오로지 김용환의 주장 하나에 따른 것인데, 그의 주장이 이렇듯 일관성과 신빙성이 없다면, 그는 목격자의 자격을 잃은 것이고, 그렇다면 추락사 주장 또한 근거가 없다고 봐야 한다.
“사건 직후 어디에 있었는지 밝혀야”
김용환은 사건 직후부터 다음날까지 사라졌다, 다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등 당일 행적이 전적으로 묘연하다. 경찰, 검찰, 지인 등 다수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발생 당일인 17일 16;00경 사라졌다가 18일 01;00 경 잠시 사건 현장 검안장소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또 같은 날 18;00 경에 의정부지청에 나타나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김용환의 진술은 이와 전혀 다르다. 본인은 사건 직후 자신이 포천 이동파출소에 사건을 신고했고, 밤 10시까지 지서 의자에 러닝셔츠 바람으로 앉아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 후 포천경찰서로 옮겨가 밤샘 조사를 받았고, 그곳에서 검사를 만나 다음날 오후에 의정부지청에 출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미망인 ‘김희숙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고 주장했으며, 장례식 참가 후 당진으로 내려갔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파출소 근무자와 경찰서 직원 그리고 담당검사 등 모두가 그의 신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또한, 김희숙 여사도 사건담당 서돈양 검사도 신원보증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피의자가 아닌 김용환에게 신용보증 자체가 필요 없었다는 진술이다.
김용환은 사건 직후 사람들을 불러와 시체를 절벽 아래쪽으로 함께 옮긴 후 사라졌고, 이동 지서에도 포천경찰서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벽 1시경에 이뤄진 담당검사의 사체검안 당시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났다. 이는 당시 검사와 경찰관들의 진술 그리고 현장에 있던 여러 증인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김용환은 이 장소에 다시 나타났음을 자신만 극도로 부인하고 있다.
그는 과연 사건 발생 직후 사라진 후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담당검사의 사체검안 시간에 맞춰 현장에 다시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그는 그 현장에 있었음을 왜 혼자 부인하는 것일까? 10시까지 있었다는 이동 지서는 그를 보지 못했고. 밤을 새워 조사를 받았다는 포천경찰서도 그를 조사한 적도, 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새벽 1시, 즉 그가 포천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시간에 사체검안 현장에 왔었음은 경찰 다수와 담당검사 그리고 주변인들이 일치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혼자만 부인하고 있다.
“장준하의 제자 김용환?”
김용환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교사직에 있다가 1967년에 장 선생이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을 알고 도우려고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교직에 있지 않았다. 그 스스로 군 전역 후 특별한 직업이 없이 생활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1967년~1971년까지 선거사무실에 있었으나 그 전에는 교직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장 선생 사무실과 4년 동안 관계가 있었지만, 선거기간이 아닐 때는 특별한 일도 없었다. 그런 그가 장 선생의 제자라고 주장하거나 장 선생을 아버지같이 따랐다고 하는 주장은 그 근거를 세우기 어렵다.
김용환은 장준하 선생이 1971년 재출마해 낙선한 후, 사무실에 나오지 않았고 특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음을 본인의 진술 및 주변 지인들의 진술로 확인했다.
그러다 사건이 나던 해인 1975년 초에 당진의 모 중학교 강사로 채용됐다. 그는 취직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취직한 사유에 대해, “농사일과 화물선 일을 하던 아버지를 돕다가 아버지가 일하지 못하게 돼 취직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미 1964년도에 그 일을 접었음이 확인됐다. 이 또한 거짓말이다. 결국, 71년~74년말 까지 그의 생계에 대해 밝힌 바가 없다.
“교육자 김용환?”
김용환은 사건 발생 전날인 75년 8월 16일, 갑자기 호림 산악회 사무실에 나타났고 다음날 구두를 신은 채 등반에 동행했으며, 스스로 유일한 목격자가 됐다. 그리고 다시 당진으로 내려가 당진의 모 고교 교사로 채용되었음이 의문사위 조사로 밝혀졌다.
의문사위는 또한 김용환에 대해 서울시경이 작성한 ‘특수인물 존안 카드’가 중앙정보부에 보관되어 있었음을 밝혀냈다. 서울시경은 왜 그에 대한 특수인물 존안 카드를 작성했는지, 그 카드가 왜 중앙정보부에 보관되게 되었는지 밝혀야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김용환은 사건 당시까지는 교육자가 아니었으며 사건에 대해 일관성 없고 계속 진술을 뒤집는 실제 목격자가 아닌 ‘자칭 목격자’ 김용환이다. 그럼에도 마치 교육계 인사를 깎아내리는 듯이 기사와 공개적 글을 쓰며, 광고까지 게재하는 것은 오히려 교육계를 선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히려 김용환이 사건 직후 어떻게 교직에 채용되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장준하 사건은 종결된 사건이 아니다”
의문사위 1기 위원회는 진상규명에 대해 불능 판단을 내렸다. 현장의 지형과 시체의 상태, 목격자 김용환의 일관성 없는 진술과 사건 당일의 의심스러운 행방 등으로 추락사로 보기 어려움에도 이를 증명해낼 자료(국정원 자료) 제출 거부와 비협조로 위법한 공권력의 개입 여부를 명백히 증명할 수 없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이었다.
2기위원회 역시 진상규명 불능 판단을 내렸다. 2기에서는 김용환의 과거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밝혀냈으나, 그가 왜 거짓진술을 하는지, 그것이 사망사건과 연루돼 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이는 또한 정보기관의 자료제출 비협조 때문이었다. 정보기관 [가]는 애초에 자료 없다고 발뺌했고, 뒤늦게 제출한 자료에는 빠진 것들이 많았고, 핵심 자료는 여전히 제출을 거부했다. 정보기관 [나]는 당시 사건에 관해 해당 당사자가 사건보고서를 상부에 보고했다고 증언하고 있음에도 관련 자료가 전혀 없다고 완전히 거부했다.
후일 김영삼 대통령 초산테러사건 등에 관해 밝혀 진 바를 보면, 앞의 [가][나] 이외에도 자료제출을 받아야 할 정보기관이 상당히 다수 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위법한 공권력의 개입 여부를 명백히 밝힐 수 없는 사안으로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똑같은 결론을 낸 것이었다.
결국, 1·2기 의문사위는 진상규명 불능의 가장 큰 이유로 “김용환의 거짓 진술과 정보기관의 비협조”를 공식 문건에 남겼다. 이는 이 사건의 종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함을 밝히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이미 조사가 끝난 사건, 추락사로 종결된 사건이라 보도한다면 명백한 오보이고, 그리 주장한다면 거짓 주장이 될 것이다.
“장준하 선생 자택에 전화로 사고 사실을 알린 자는 누구인가?”
유족들은 사건 당일 3시경 누군가로부터 사건에 대한 전화를 받았다. 장 선생이 등산 중 떨어졌고 시체를 옮기려면 서울에서 사람들이 와야 한다는 전화였다. 중앙정보부의 사건 당일 <중요정보 보고서> 문건과 다수 중정 직원들의 진술에 의하면 전화를 건 자는 김용환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김용환은 절대 전화를 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중정 기록에 대해 중정이 조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했다면 장 선생과의 친밀도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부인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전화를 받은 장 선생 자제 장호준도 전화한 사람이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고, 누군지도 몰랐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정보부 감청기록관은 어떻게 전화한 사람의 음성이 김용환의 음성임을 식별할 수 있었을까? 평소에 김용환의 음성을 감청관이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는 경우인가? 아니면 음성의 주인공을 김용환으로 지목해도 무관하다고 판단했을까?이것은 김용환의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매우 중요한 단서라고 할 것이다. 또한, 사건 현장과 진행상황을 현장이 아닌 별도의 곳에서 추적하고 모두 알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의문사위 조사관들은 당시 사고현장 인근에는 이장의 집에 행정전화가 한 대 있었을 뿐 어느 사람도 전화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밝혀냈다. 현장에 있었던 그 누구도 전화할 수 없고 또 했다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장 선생 자택에 전화한 것일까? 중앙정보부의 감청기록과 중요사건 보고서가 맞는 것인지, 김용환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이 또한 다시 밝혀내야 한다.
“추락사가 아니란 증거는 장 선생의 시신에 있다”
김용환의 목격진술이 이처럼 허황되고 신빙성이 없다면, 장준하 선생 시신의 상처를 추락사의 증거로 제시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목격진술에만 의지했다. 김용환의 주장을 따르면, 장 선생은 15m 절벽 아래로 떨어져 마치 상어 이빨 같이 생긴 지름 30~40cm 바윗돌이 밭을 이루고 있는 곳에 반듯이 누워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추락사임을 주장하려면 과연 그 높이에서 그런 험한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있어야 할 흉터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장 선생의 옷과 안경과 물통은 깨지지 않았다. 옷에도 긁힌 흔적이 없었다. 피부에 난 외상이라곤 오른쪽 귀 뒤편에 찍힌 상처와 소량의 출혈, 양팔에 제압당한 것 같은 멍 자국, 왼쪽 엉덩이에 긁힌 듯 보이는 작은 흔적, 그리고 오른쪽 엉덩이에 난 주삿바늘 자국 두 개뿐이었다. 과연 15m 높이에서 상어 이빨 같은 바윗돌 밭으로 떨어졌을 때 시체의 상태가 이럴 수 있는지에 대해 추락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이를 증명해야 한다.
이번 이장 때(2012년 8월 1일) 시행됐던 유골검사에서도 두개골 함몰과 골반골절 이외에는 그 어떠한 추가 골절이 발견되지 않았다. 의문사위에서는 마네킹도 던져보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그 결과 다량의 외상과 복합골절과 출혈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그러나 장 선생의 시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추락사를 주장하려면 김용환의 (신빙성 없고 번복이 잦은) 목격진술에만 의지하지 말고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당시 검찰은 이에 대해 어떠한 증거도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의문에 대해 기사를 쓴 동아일보 성00 기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고, 후속으로 이 의문을 취재하던 동아일보는 갑자기 취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담당기자에게 내렸다고 의문사위 조사결과 밝혀졌다. 무엇이 과학적이고 상식적인지 판단해야 한다. 객관적 시각만 갖는다면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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