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태 “민주당, DJ 정신 실종…민추협 같은 黨 필요” [민추협 되짚기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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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태 “민주당, DJ 정신 실종…민추협 같은 黨 필요” [민추협 되짚기⑬] 
  • 윤종희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2.10.26 21: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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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태 전 민추협 공동회장
“DJ 귀국 후 민추협 참여, 동교동계는 DJ 중심돼야”
“양김 분열로 해산됐지만…민추협 재결성 통해 부활” 
“1971년 대선서 DJ 패한 것은 박정희 부정선거 때문” 
“박지원, 노무현 밀라는 DJ 뜻 전해 광주서 압승시켜”
“민주당, 국민 무서워할 줄 알아야…이대론 尹 못 이겨”
“민추협 정신은 DJ 정신…민추협당 생기면 힘 보탤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윤진석 기자]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매일 투쟁하는 게 일이었다.”
- 박광태 전 민추협 공동회장-

“민추협 재결성에 가장 앞장”
- 동교동계, ‘박광태를 말하다’-

1980년 5월 17일 저녁 동교동 DJ(김대중) 자택. 응접실 가득 전운이 감돌았다.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에서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입수돼 대기하던 중이었다.

‘어떻게든 DJ를 지켜내겠다.’ 가신들의 낯빛 위로 비장함이 역력했다. 그때 ‘철컹철컹’ ‘쿵쿵--’ ‘다다다…다다닥!’ 철문을 치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순식간에 군인들이 총으로 위협하며 동교동계 사람들을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아이쿠”, “으악.” 계단 아래로 떨어지고 쓰러지고 짓밟히고 맞고….

“그만 놔줘.” 끌려 나오면서 DJ가 호통을 쳤다. 위엄에 눌려서인지 양팔을 잡고 섰던 수경사 군인들의 팔도 풀렸다. 

자정께 전두환 신군부는 전국을 장악할 목적으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확대했다. 국회는 해산됐고, 수많은 야당 정치인들이 활동 금지 대상자로 묶였다. 신군부는 DJ에 ‘내란음모혐의’를 씌어 체포했다. YS(김영삼)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신군부, DJ에 광주항쟁 배후조종 내란 음모 
혐의 씌워 사형선고 …‘동교동계 청천벽력’


“우리도 20여 일간 갇혀 있었어요.” 

동교동계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하 박광태)이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DJ를 경호하던 그는 비서 권노갑, 대변인 이협 등과 꼼짝없이 연금됐다고 한다.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만났다. 책 <삼국지>에 따르면 관우의 키는 9척이다. 그만큼은 안 돼도 이마가 반질반질하니 기골이 장대하고 180cm는 훌쩍 넘어 보였다.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1943년생이니 올해 여든 살이다. 나이답지 않게 호랑이도 때려잡을 풍채였다. 정치인은 정기를 잘 타고나야 운도 오른다고 했다. “좋아 보입니다.” 덕담을 건넸다.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번졌다. 

“소싯적 투쟁 나가면 경찰 대여섯 명은 나가떨어졌어요.” 주먹을 쥐어 보며 힘이 장사였음을 에둘러 내비쳤다. 목소리도 쩌렁쩌렁. 선봉에 서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DJ를 위해서라면 총알받이가 된다는 각오로 임했어요.” 공포 정국에서의 민주화 투쟁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었다. 담담히 말하는 눈빛에서 용맹스러움과 충직함이 묻어났다. 관우가 떠올랐다.

이날 그는 광주서 오랫만에 서울로 상경했다. 반기는 선후배 동지들이 여럿 됐다. 민추협의 김장곤 전 의원, 김일범·조찬옥 전·현직 사무총장, 민주화 동지 전대열 선생, 임성규 국장 등이 배석했다. 

“다음날 광주서 5·18이 터졌잖소.” 박광태가 회고를 이어갔다. “처음엔 몰랐다가, 이튿날 돼서야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 알 수 있었지.” 바깥에 있던 동지들 덕분이었다. 용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안에다 쪽지를 넣어줬다. 

“모든 게 전두환 계획대로 진행된 거요.”

곰곰이 되짚으며 박광태가 말했다. 

- 네?

“전남대에서 5월 18일 데모한다는 걸 입수한 뒤 DJ를 잡아넣은 거예요. 학생들 진압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구속한 거죠.” 

연행되기 전 DJ는 지식인 134명의 시국 선언 등을 지원하고 있었다. 신군부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계략도 있었소.” ‘DJ를 내란음모죄로 구속하면 학생들이 더 과격해질 것이다.’ “노린 거죠.” 반발 수위를 자극해 강경 대응의 빌미로 삼으려 했다는 얘기였다. 

신군부는 DJ가 광주항쟁을 배후조종하고 폭력으로 현 정권을 타도하려 했다고 몰아붙였다. 조작된 각본을 내세워 1980년 9월 17일 사형을 구형했다. 또 이듬해 1월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형을 확정했다.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전두환은 공포 정치를 펼쳤다. ⓒ연합뉴스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 전두환은 공포 정치를 펼쳤다. ⓒ연합뉴스

- 절망스러웠겠습니다. 

“맨 날 눈물바다였지.” 

동교동계로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전두환 살인마….” 피가 거꾸로 솟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듯 괴로운 표정이 스쳤다. 

“예춘호-백기완 선생도 상당히 강했지만….” 운을 띄며 말을 이었다. 

“목사님 한 분이 입만 열면 기도하기를 ‘하나님, 전두환 저 살인마 좀 데려가 주십시오’….” 기억을 더듬는 사이 양미간이 밝아졌다. 지난 일이니 웃을 수 있다는 듯 “껄껄 걸.” 박장대소했다. 

용감한 목사였다. 순간 “이름이….”고개를 갸웃했다. 입에서 뱀뱀 맴돌 뿐 가물가물한 모양이었다. 그때 “윤반웅 목사요.” 뒤에서 듣고 있던 임성규 국장이 거들었다. “맞아. 맞아.” 무릎을 탁! 

윤 목사는 초대 정치범동지회 회장이었다. “그분 중심으로 집회하고 기도하고….” 날마다 투쟁하는 게 일이었다. “밥 먹으면 시위하고, 잡혀갔다 나오면 또 투쟁하고….” 아침에 대문 밖을 나설 때마다 다시 들어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나마 숨 좀 쉬고 살게 된 것은 DJ가 사형선고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망명하면서부터였다. 전두환은 국제적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2년여 뒤에는 강제 망명 조치를 내렸다. “DJ 소식을 알 수 없으니 미국의 소리(VOA)에 의지했어요.” 국제방송에 귀를 갖다 대기 일쑤였다. “제일 정확했어요. 듣고 있으면 DJ가 뭘 하는지 나왔어요. 국내 방송은 엉터리고 믿을 수 없을 때였어요.” 

 

순수 동교동계 모임 민헌련서 활동
“동교동계는 강경, 상도동은 온건”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동교동계로서 DJ를 수행하며 민주화 투쟁에 동참했다. 사진은 박광태 전 공동회장이 젊은 시절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민추협 제공)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동교동계로서 DJ를 수행하며 민주화 투쟁에 동참했다. 사진은 박광태 전 공동회장이 젊은 시절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민추협 제공)

80년대 초 YS 상도동계가 민주산악회를 결성해 민주화 투쟁의 맥을 이어갔다면 동교동계는 민헌련(민정연구회)을 조직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김종환, 박종태, 예춘호…. 이런 분들 중심으로 몇 년을 해왔죠.” 순수 동교동계 모임이었다. 박광태도 김장곤 등과 더불어 민헌련 투쟁 대오서 맨 앞을 지켰다. 

YS 단식을 계기로 1984년 5월 18일 범정치결사체 민추협이 발족했다. 상도동계가 전원 가담한 것과 달리 동교동계는 2파로 나뉘었다. 김상현·조연하·김녹영·박종률·예춘호 등 참여파, 박종록·김종완·박종태 등 비참여파로 갈라졌다. 주로 재야 그룹이 민추협 참여를 반대하고 있었다. 핵심 참모 그룹인 권노갑·한화갑·김옥두 역시 멀리 해외에서 조직 와해를 우려한 DJ 의중을 살펴 민추협과는 거리를 뒀다. 

박광태도 같은 입장이었다. “우리가 DJ 중심으로 가야지, YS와 상도동 중심으로 가면 안 된다.” 결연했다. “상도동에는 강성 민주세력이 없어요. 강력한 투쟁은 동교동계죠.”

- 무슨 말인가요. 

“민주세력 중에서는 조금 온건이었죠.” 

그가 볼 때 다 같은 정통 민주세력이어도 동교동계가 강경이라면, 상도동계는 온건 노선으로 비치는 듯했다. “우리는 민헌련서 매일 투쟁했어요.” 한 데서 찬 이슬 맞을 때가 많았다. 동교동계 고난에 대해서는 김장곤 전 의원한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김대중 선생 측근들은 엄청나게 고통을 많이 받았다. 공무원이고 뭐고 파면시켰다. 고문도 고문이지만…. 집에 오면 나뿐 아니라 측근들은 모두 탄압 속에서 지냈다.”
- 2022년 6월 동교동계 김장곤 <시사오늘> 인터뷰 중-


문득 스산한 심정이 스친 듯했다. 시큰한 듯 코를 훔쳤다. “YS도 단식하고 했지만…. 싸움해 본 사람들이 투쟁할 줄 안다고 동교동계 사람들이 앞장서서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재야 세력과 한 데 투쟁하는 일이 많아 더 그런 생각을 하는 듯했다. “동교동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 역사가 쭉 이어져 왔습니다.” 쐐기를 박듯 목청을 높였다. 

반면 상도동계는 자신들이 민주화 세력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서 가장 앞장서 싸워왔다는 자긍심을 <민산 되짚기> 등을 통해 누차 강조해왔다.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등 수많은 이들이 감옥서 고초를 겪었다. 

유신이 선포되자 해외서 체류하며 국내 실상을 알린 DJ와 달리 YS는 죽음을 각오하고 귀국해 투쟁 전선을 지켰다. 온건 노선으로는 독재 정권에 맞설 수 없다며 신민당 체질을 선명 야당으로 바꿨다. DJ가 납치 사건, 사형선고라는 역경을 이겨냈다면 YS는 초산 테러를 당했고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범국민운동을 추동해 87 직선제를 열었다. 그 길 위에 양 세력의 의기투합이 있었다. 자부심도 쌍벽을 이뤘다. 

하지만 동교동계 공이 더 크다는 주장에서 결코 물러서고 싶지 않다는 듯 박광태는 “그것(민주 역사의 중심=동교동)은 사실입니다.” 힘을 줬다. 의가 좋으면서도 라이벌 관계에서 오는  팽팽한 신경전이 감지됐다. 

“민추협은 언제부터 참여한 건가요.” 
화제를 돌렸다. 

“민헌련으로 하다가 1985년 DJ가 미국서 귀국했잖습니까.”

민추협이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해 2·12 총선을 치르기 나흘 전이었다. 2년여 망명 생활을 마친 DJ는 민추협 공동의장으로 복귀했다. 제1야당을 갈아치운 선거 결과는 혁명이라 일컬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박광태는 다음 해인 1986년부터 본격 합류했다. 

- 민한당에서 활동한 것은 맞나요. 

“아니요. 당사에 가본 일도 없어요.”

고개를 저었다. 포털사이트 인물백과 <나무위키>에 따르면 민한당서 몸담은 적이 있다고 나와 있다. “잘못된 정보요.” 정정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어림도 없다는 듯 거듭 “우리는 통일당 했고, 거기는 유치송 중심으로 생긴 사쿠라 당 아니오?” 펄쩍 뛰었다.

박광태가 말한 통일당은 1980년 5·17 비상계엄 당시 강제 해산된 통일당(민주통일당의 약칭)을 말했다. 1973년 구(舊)신민당의 반유진산계가 만든 당이었다. “유진산이 들어간 신민당은 믿을 수 없다”며 양일동, 장준하, 김홍일, 윤제술, 정화암, 김선태, 박병배 등이 참여했다. YS가 신민당의 구파, DJ가 신파로 분류되는 이유다. 
 
어쨌거나 민한당 소속이냐는 얘기에 박광태는 정색했다. 유치송 총재는 과거 기자회견 등에서 “신당(신민당)만이 왜 야당이냐”며 발끈한 적이 있었다. 박관용-홍사덕 등 현역 의원들이 선명 야당에서 활동하겠다며 우르르 신민당으로 입당했을 때였다.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한 말이었다. 

바깥 시선은 달랐다. 민한당 자체가 신민당 등 기존 야당들이 강제 해산된 후 만들어진 정당인 데다 일부 당직자 임명까지 군부서 관여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관제 야당 같다는 의심을 샀다. 

“민한당에서 계속 오라고 했지만 우리는 안 갔어요. 근데 김금동이란 사람이….” 유치송 총재와는 사돈 관계의 인물이었다. “막판에 우리 명단을 집어넣었나 봐요.” 허락도 안 받고 임의대로 올렸다는 말로 들렸다. 평소 알고 지낸 관계여서 크게 뭐라고는 못 한 듯했다. 

 

민추협서 노동-인권국장, 최전선서 싸워
양김 분열로 흩어졌지만, 재결성 위해 헌신


민추협에서는 인권국장과 노동국장을 맡았다. “그때도 최전선에서 싸웠어요. 무조건 사무실에 나오면 날마다 투쟁하는 게 일이여.” 행동대장 격이었다. “상도동계 유성환 의원이 감금당했을 때도 항의한 기억이 나요.” 유 의원은 국시(國是) 논쟁 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국회의원으로서 처음으로 회기 중 구속되는 사건이었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신민당과 민추협을 우리가 병행해 운영했잖소.” 85년부터 87년 초반까지였다. “두 분(김영삼‧김대중)이 합의해 이민우로 대표를 시키고 민추협과 마찬가지로 신민당도 당직을 50대 50으로 분담했지요.” 동교동과 상도동은 지분을 딱 반으로 나눴다. 

 

“아름다운 나눔이었지요. 뭐든 공평하게 반반으로 했어요. 행사할 때도 김대중-김영삼 의장을 부르면, 그다음은 김영삼-김대중 의장이라고 소개했어요. 나눠 먹기만 해도 훌륭한 정치입니다.”
- 2022년 4월 동교동계 이석현 <시사오늘> 인터뷰 중-


“민추협부터 지켜온 50대 50원칙은 YS가 결단한 거예요. 폭넓게 참여시키자, 통합해야 한다, 합쳐야 한다, 그래야 이긴다고 했어요. 기득권을 버리면서까지 통합을 위해 앞장선 분이었소.”
-2022년 4월 김덕룡 <시사오늘> 인터뷰 중-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암튼 홍사덕이 대변인 할 때입니다. 근데 이민우 대표가 약간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설명이 이어졌다. 이른바 ‘이민우 파동.’ 86년 4월 이 대표는 직선제를 요구한 양김 반대에도 전두환 정권과 타협해 민주주의 7개 항이 담보된 내각제에 동의했다. 이를 철회하고자 양김은 신민당을 해체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만들었습니다.” 1987년 4월 21일이었다. “처음엔 사무실이 없으니 서울역 뒤에다 당사를 만들었어요. YS가 총재하고 DJ가 상임고문하면서 쭉 해오다가…. 6‧29가 온 거예요.” 나름대로 민주화 여정의 흐름을 압축해 전하고픈 눈치였다. 

“그리고 또….” 잠시 표정에 아득함이 밀려왔다. 부천 성고문 사건, 학원 안정법 투쟁, 1천만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 고대 앞 학생 투쟁 지원,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규명, 4‧13 호헌반대 및 DJ 가택연금 항의, 6‧10항쟁, 6·26 국민대행진 등… 87 체제로 오기까지 투쟁의 항쟁일지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 양김 단일화는 왜 안 됐다고 보나요. 

“갈라진 건 대선 때문이죠.” 

- YS가 야권 단일화를 위해 외교구락부서 DJ를 만나 동교동계 요구 조건인 미창당지구당 수를 양보했음에도 이후 경선 약속을 깨고 분열한 것은 DJ 아닌가요. 

“어차피 양쪽 진영서 각자 대통령 후보로 우리가 돼야 한다고 했을 때예요.” 누구든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책임상 “똑같다”는 해석이었다.

“상도동은 같이 합쳐 나가자며 동교동 요구를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옆자리에 있던 조찬옥 총장이 보태나갔다.

“DJ가 이길 수 없는 구조였어요.”
“왜 그런가요.” 물었다. “상도동이 조직을 다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힘을 키울 여건이 없었던 거예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 평민당을 창당한 거죠.” 

또 이 말도 보탰다. “저쪽(전두환)서 직선제를 받은 이유가 있어요. 분명히 양김이 하나로 가지 않을 거라는 시나리오가 있었어요. 결합 못 할 거로 봤기 때문에 6·29 선언을 한 거예요. 아주 고단수인데 삼김(김종필 포함)이 당한 거죠.” 자신은 그렇게 본다며 톤을 낮췄다. “그래서 노태우가 됐고, YS가 호랑이 잡으려 호랑이 굴로 들어간 거예요.” 착잡함이 어렸다.

양김이 분열되면서 민추협도 쪼개졌다. 1988년 1월 해체될 당시 양 세력 간 분위기는 폐쇄된 사무실이 주는 썰렁함처럼 냉랭했다고 전해진다. 민추협서 <민주통신> 국장을 지낸 김도현 전 차관은 “건국 이래 가장 큰 연합조직으로 6월 항쟁을 이끈 실질적 주역임에도 민추협이 조명받지 못한 점은 바로 이 유시무종(有始無終)에 있다”고 한 바 있다. 두 지도자를 구심력으로 뭉친 범정치결사체는 시작은 좋았으나 대권을 향해 분열된 양김의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흩어졌다는 평가였다. 

다만 역사 속으로 완전히 퇴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화해한 양 김처럼 양 세력도 민주주의를 향한 단결과 국민통합을 목표로 16대 대선을 앞두고 재창립했다. 민추협 출신 현역들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 재결성이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민주화 대장정과 거물 정치인들이 다시 뭉친 것만으로도 역사적 감회를 안겼다. 

상도동계에서는 새누리당 대표였던 무대(김무성)가 DR(김덕룡)과 함께 힘을 썼다면, 동교동계에서는 광주시장을 맡고 있던 박광태가 후농 김상현을 앞세워 가장 적극적으로 민추협 재결성을 이끌었다. 박광태와 김무성이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했다는 평가다. 동교동계서는 박광태가 있었기에 2001년 국회 사단법인으로 정식 등록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김무성과 함께 했지” 박광태가 말하자 옆에 있던 김일범-조찬옥 전·현직 총장이 부연했다. “처음 재건될 때는 민주동지회(상도동계서 민주동지회와 명칭상 같다)라는 이름으로 조직됐었어요. 이것도 박광태 회장이 한 일이에요.” 

 

“민추협 정신이 DJ 정신, 나라사랑-민주화”
“민주당, DJ 정신의 0.1%도 없어…” 개탄 


故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확실한 리더십으로 정계개편의 중심에 서 왔었다. 사진은 민주화추진협의회 시절의 YS와 DJⓒ연합뉴스
故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확실한 리더십으로 정계개편의 중심에 서 왔었다. 사진은 민주화추진협의회 시절의 YS와 DJⓒ연합뉴스

- 민추협 정신은 뭐라고 보나요. 

“DJ 정신이요.”

- DJ 정신은 뭔가요.

“나라 사랑 정신이고, 민주화 정신이죠.” 

명쾌했다. “YS는요.” 반문했다.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DJ와 함께 이 나라의 민주화를 완성한 최고의 공로자입니다.” 좌우간 “DJ와 YS는 틀림없는 지도자입니다.” 단언했다. 그러면서도 “YS가 물론 절대 공이 있지만….” 침을 삼켰다. “우리가 볼 때 ‘DJ가 훨씬 민주화의 공이 더 있다.’ 이 얘깁니다.” 할 말은 꼭 해야겠다는 표정. 

천상 DJ맨 박광태였다. 

- DJ와의 인연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1970년 신민당에 입당하면서예요.”

같은 고향의 김선태 전 장관이 국회의원(3~5대 역임)을 하고 있을 당시다. 박광태는 조선대 졸업 후 그의 비서로 있었다. 다음 해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40대 기수론이 등장했다. “DJ 당선을 위해 조직책을 맡았어요.” 

판세는 “전체 분위기상 분명 이기고 있었는데….” 선거는 박정희의 승으로 돌아갔다. “표를 까보니 100만여 표 진 거예요.” 의견이 분분했다. “사람들이 부정선거를 의심했습니다. 무더기 표 나오고, 선관위도 매수해버리고….” 석연찮은 표정이 묻어났다. 일방적 주장이지만 선거 결과를 놓고 민심이 흉흉했다는 것만은 짐작됐다. 

“그때부터 DJ가 우리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거예요.” 박 정권은 심상찮은 분위기에 1972년 유신을 선포했다. 동교동계는 DJ라는 버팀목에 의지했다. “박정희 너는 유신 독재자일 뿐 우리의 정신적 대통령은 김대중이야.” 일생의 신념이 되는 순간이었다. 

- 본격적으로 동교동계 입문은 언제부터 한 건가요. 

“1979년 DJ가 부르더라고요.”

모시고 있던 김선태 의원이 작고하고 나서였다. 동교동 자택을 가니, “뭣 할란가.” 물어왔다. 선뜻 말을 못 하자 이윽고 “자네가 나한테 와서 수행 좀 해줘.” 그 말에 박광태는 감격한 나머지 넙죽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이고. 영광입니다.” 존경해온 인물을 보좌하게 된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목숨 바치겠습니다.” 맹세했다. “그날부로 동교동계로 들어가 DJ를 모시게 된 거예요.”

어떤 매력이 있어 그리 좋아한 걸까. “낮이나 밤이나 국민 사랑이요.” 술술 풀어나갔다. 그에게 DJ는 국민을 무서워하고 공경할 줄 아는 대통령이었다. 소위 “국민을 하늘같이 받든다는 경천애인(敬天愛人)과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천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우리한테도 항상 하는 얘기가 ‘국민 뜻이 어디 있는가를 살펴 그대로 하면 된다.’” 눈가가 촉촉했다. 

-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은 어떤가요. 

“DJ 정신이 단 0.1%도 없어요.”

단칼에 말했다. “천지 차이”라는 것이었다. “이재명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내가 그랬어요.” 박광태는 민주당 고문을 맡고 있다. “이 사람아. ‘당신, 입만 열면 DJ 정신 팔아먹는데 뭔지나 알고 얘기하는 거요?’”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아무 말도 안 해요.” 잠자코 있다고 했다. “내가 말하길 ‘하나부터 열까지 DJ는 국민이었소. 작금의 민주당은 반대로 가지 않느냐.’ 이랬어요. ‘DJ 팔아먹으려면 그 정신 그대로 지키라.’ 사정없이 해버려 나는.” 씩씩댔다. 강직한 태도에 상대가 기죽을 법도 했다. “답은 또 ‘죄송합니다’라고 해요. 앞으로 잘 하겠다고. 허허…거참….” 

속상함이 가득했다. “민주당이 왜 정권을 뺏겼습니까. 솔직히 국민의힘에 뺏길 당입니까? 백 번 천 번 해도 그럴 수 없는 당이에요.” 침을 튀기며 분개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때 어떻게 했어요. 국민 무서운 줄 모르고 무시하고 짓밟아 버렸잖아요.” 핏대를 높였다.

 “대통령부터 밑의 국회의원까지 한 번도 사과한 일조차 없어요. 변명만 일삼고 무식한 소리만 해 쌓고…. 또 사상은 좌클릭 아니요?”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디 자기 생각대로 한 가지라도 한 게 있소? 전부 운동권들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써준 대로 읽었지. 잘못된 인사가 나오면 경질도 안 해. 여론이 안 좋아도 안 바꿔. 그게 문재인이었어요.” 개탄했다. 

- DJ는 어땠나요.

“뭐 하나 잘못하면 즉각 바꿉니다.” 

- 민주당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봅니까.

“DJ 정신을 받들라면 중도 개혁으로 가야 해요. 북한의 김정은이가 행패 부리고 (문재인) 대통령한테 막말해도 말 한마디 못했잖소. 나라 꼴을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우리나라가 그때부터 무너진 거예요.” 크게 탄식하며 망조가 들은 거라고 했다. 

“나는 민주당 고문이지만 할 말 다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듯 보였다. 머뭇거림이 없었다. 폭포 줄기처럼 쏟아냈다. “국민이 볼 때 국민의힘도 ‘깜’이 아니지만, 민주당보단 나았던 거 아니오. 이 당에는 정권 못 맡기겠다.” 

그럴수록 생각나는 이가 있었다. “한광옥 같은 이가 민주당을 이끌었어야 했는데….” 입맛을 다셨다. “박근혜한테만 안 갔어도 민주당은 지금도 한광옥이었을 텐데 말이오.” 아쉬워했다. 민추협 대변인 출신의 새천년민주당 대표였던 한광옥은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동교동계 일부와 껄끄러워진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용서와 통합을 구현하는 것이 DJ 뜻을 계승하는 일이라는 명분이 그에겐 있었다. 친노(노무현)-친문(문재인)에 대한 뿌리 깊은 비토의 심정도 있었고 말이다.

-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낮은 것을 반등의 기미로 삼으려는 것 같은데요. 

“30%대 지지율? 아무 의미 없어요. 어차피 정권 잡고 5년간 끌고 갈 사람들이여. 언제 지지율 50%대로 올라갈지 몰라. 지금으로 평가하지 마요. 아직 집권 1년도 못했어.” 

현실적인 분석이었다. “나는 정치 50년 한 사람이오. 유진산 때부터 보고 살았어요. 역사를 다 알아. ‘느그, 이래 갖고는 2년 후 총선서 의석 반토막도 못 얻어. 국민이 바보가 아녀. 느그 정치인들보다 수준이 더 높아. 국회의원 안 하고 정치 안 하는 것뿐이여.” 민주당을 겨냥한 애정 어린 질타들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며 일갈했다. “노란 봉투법도 그게 뭐요. 깜짝 놀랐어요.” 아연실색했다. “불법 집회하고 기물 파손해도 배상 안 한다는 거 아니오. 세계 어느 나라도 없는 법입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다 배상하게 돼 있어요. 하게 되면 대한민국 기업 망합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근심이 엿보였다. “법안 통과되면 말이오. 그러면 나는 당 떠나요.” 단언했다. 단단히 벼르는 기색. 

 

“노무현-문재인, 49% 버리는 전략 똑같아”
“국민통합-지역주의 극복 DJ와 결 달랐다”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말을 듣다 보니 이점이 궁금했다. ‘DJ 세력과는 결이 다르다고 보는 겁니까.’

질문에 그는 노무현 정부로 거슬러 원인을 짚었다.

참여정부서 “기존 민주당을 없애버리고 노무현 100년 정당을 만들려 한 거예요.”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구민주당과 결별한 상황을 말했다. “노무현이로 대한민국 역사를 새 출발 하려는 무서운 야심이 있던 거요. DJ 세력을 전부 쳐내버리고 자기세력으로만 가자 이거예요.”

확신하는 모습에 “왜 그랬을까요.” 물었다. “….” 잠시 뜸 들이는 사이 심각하게 듣고 있던 조찬옥 총장이 “이념의 문제였어요.” 끼어들었다.

“거기서부터 진보, 보수가 완전히 갈라진 거예요. 진보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박광태가 부연했다. “근데 내가요.” 목소리를 깔았다. “무서운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네?” “그걸 노무현한테 발견했어요.” 긴장감이 돌았다. 

“뭔가요.” “‘박 선배’” 언뜻 노(盧) 말투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였다. “노무현 얘기가 그래요. ‘박 선배. 뭣 하러 그렇게 표를 모으려는 겁니까. ” 같이 국회의원할 때였다. “표는 51%만 가져가면 됩니다. 민주주의는 51%면 돼요. 49%는 버려도 됩니다.” 

직접 듣고도 박광태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깜짝 놀랐어요. ‘하….’ ‘이 사람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건가.’” 꾸짖듯 지적했다. 그래도 盧는 그 얘기를 밀고 나갔다고 했다. “나하고는 전혀 다른 사상인 거지.” 분열돼도 자기 표만 가져가면 무조건 이긴다는 정치공학적 전략에 혀를 내둘렀다. “‘왜 다 끌고 가려고 하냐. 49%는 버려라.’ 그리 말한 것을 내가 지금도 안 잊어요. 몇십 년 됐어도 충격받아서 잊어먹지를 못해요.” 부르르 떨었다. 

- 문 정부 때도 갈라치기로 비판받았는데요. 

“그쪽 사상이 전부 51% 그거예요.”

- DJ는 통치 철학이 통합 아니었나요. 

“그렇습니다.”

“옳은 말”이라며 크게 맞장구쳤다. “DJ야말로 동서화합을 위해 애쓴 분이에요. 뭔 일 있으면 부산부터 먼저 가고, 영남을 먼저 우대했어요. 부산 신발 산업 살리겠다고 5000억을 미리 주라고까지 했어요. 세계적으로 디자인 시대가 온다며 대구는 섬유 산업 일으키겠다고 7000억도 지원하고 시장 데리고 밀라노까지 간 양반이오.” 동진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광주를 대표하고 있던 박광태가 볼 때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백운출 박사 등 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21세기 빛의 시대를 전망하고, 5000억 규모의 광(光) 통신 산업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DJ가 처음엔 임기 후반에 해준다는 거요. 그때 되면 힘이 없잖소.” 국회 산자위원회에 오래 몸담고 있던 그는 지금 못하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발 벗고 나서 결국 성사시켰다. “그 결과 광주가 광 통신 산업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두번째로 선진국이 된 거요.” 뿌듯함이 컸다. “그니까 요지는 DJ가 그만큼 통합을 위해 영남을 신경써줬다는 얘기요.” 이해하는 심정이면서도 조금의 서운함이 들 법했다.

어찌 됐든 지역주의 타파를 외쳐온 盧가 49%를 버리라고 했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또 그로부터 지역주의 갈등을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던 DJ가 반대로 통합에 나섰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노무현, DJ 때문에 됐지만, 동교동계 탄압”
“DJ, 경상도 후보 나와야 이회창 이긴다 생각”


박광태 전 회장은 DJ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전략적으로 밀었다고 전했다.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박광태 전 회장은 DJ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전략적으로 밀었다고 전했다. 사진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

대화는 둘의 이야기로 좀 더 흘러갔다. “노무현 정부 때 동교동계 수난 시대였잖습니까.” 이 점을 환기하자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서리쳤다. “대통령 만들어 놓응께 제일 먼저 동교동계를 잡아넣었어요.” 한광옥, 한화갑, 김운용, 이훈평, 이인제, 박주선 등 열린우리당 창당을 반대한 동교동계를 비롯해 DJ정부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표적 수사했다. “나도 징역 갔어요. 권노갑·박지원 전부 다….” 

울분이 느껴졌다. 배신감이 큰 듯했다. “지나고 보면 DJ는 ‘노무현이를 내가 키워주면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정작 노무현은 자기를 대통령 만들도록 도와줘도 고마운 생각도 없고 사상도 다르고.”

- DJ가 16대 대선 경선서 盧를 밀었나요? 

“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우리가 선거 때 이인제 후보를 밀었단 말요.” 우리란 동교동계 일부와 박광태가 이끄는 광주 조직 전역을 말하는 듯했다. 그는 이인제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서실장이던 박지원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최대 승부처라 일컫는 광주서의 완전국민경선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 그래서요?

“전화가 와서는 ‘대통령(DJ)은 노무현이다.’”

박지원이 이렇게 전했다는 거였다. 

“노무현이 무슨 대통령감이냐.”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반박했다. “‘아니다. 대통령 뜻이다. 광주는 노무현으로 바꿔라.’” DJ 뜻이라고 하니 지령처럼 느껴졌을 듯했다. 그 시절 광주서의 박광태 영향력은 막강했다. “내가 다 쥐고 있던 판이에요.” 결국 “노무현으로 3일 만에 판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압승했던 거예요.” 

처음 듣는 비화였다. 지금까지는 盧가 경선서 이길 수 있던 결정타는 광주서 노풍(盧風)이 자발적으로 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져왔다. 민주당 성지 광주서 그를 지지하고 있음이 회자되면서 대세가 확 기울 수 있었다. 

사실이면, “노무현 바람이 아니고 DJ 바람이었던 거네요.” “암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면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권노갑 고문은 지난해 본지 인터뷰에서 ‘DJ는 중립’이라고 한 바 있다. 그는 오히려 ‘DJ의 盧 지원설’을 이인제가 터트린 게 경선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중립이었고 나는 첫 번째 이인제, 그다음에 노무현. 하지만 이인제 후보가 발언을 잘못했어요. ‘대통령과 박지원이 협력해 노무현을 돕고 있다’는 식으로 발표한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수용하지 않기에 안 되겠다 싶어서 나도 노무현 후보를 도왔죠.”
- 권노갑, 2022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 사실이라면 DJ는 왜 盧를 밀어준 건가요. 

“이인제가 될 것 같으니까.”

- 이인제를 싫어했나요?

“그게 아니고. 정권 재창출을 위해 그랬던 거요. 한나라당의 이회창을 이기려면 경상도 사람을 민주당 후보로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을 잡을 수 있다.”

영남 출신의 盧가 전략적 후보로 선택됐다는 전언이었다. 

 

“박주선, 尹 지지한다고 말해와 격려”
“민추협 같은 당 생기면 힘 보탤 것”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박광태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회장이 지난달 16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시사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시계를 봤다. 후일담을 듣고 있자니 한 시간 여가 훌쩍 지났다. 공천받는 과정서의 험난하다면 험난한 일화부터 선당후사로 당 총선 승리를 위해 희생한 일 등이 더해졌다. 서슬 퍼런 시기에도 “전두환을 사형시키겠다”며 유세장서 연설해 으름장 놓은 얘기는 간담을 서늘케 했다. 

다른 지역구로의 공천을 보장받았지만, 광주를 떠나지 않고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결국 성공한 무용담은 애틋한 재미를 안겼다. 15대 광주북갑 총선서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의 최고 득표율(92.76%)을 기록했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수치라고 하니 내심 으쓱한 듯했다.

국회의원 3선에 광주시장 2선을 역임했다. 지역 발전에 대한 노고로 주변서는 시장 3선을 연임해야지 않느냐며 성화였다고 한다. 연연 않고, 일선서 물러났다. 이번엔 광주형 일자리 자동차 위탁생산 공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한사코 거절하다 더는 못하고 지역 시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허허벌판에 공장 짓고….” 그랬던 사업이 지금은 광주형 대표 일자리로 성장했다. “광주글로벌모터스는 95%를 광주에서 인재를 뽑습니다.” 자랑할 만했다. “자동차 만들려면 품질이 높아야 하잖소. 현대에서 굉장히 만족합니다. 기아보다 품질이 훨씬 좋아요.”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앞으로는 전기차도 돌리려 하고… 잘 협상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마무리할 겸 민추협 얘기로 돌아왔다. 내전이 극에 달한 만큼 잠재적으로는 국민통합이 화두가 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민추협 원로들도 만나 통합을 고리로 이야기하면 좋을 텐데 말이죠.” 정파를 떠나 담소라도 나누며 국가를 위해 머리를 맞대는 모습이 그려졌다. 민추협은 그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옆에서 조찬옥 총장은 “검사들은 민추협을 좋아하지 않을 거요. 그들의 사고로는 좌파적 개념으로 생각할 테지.” 추측했다. “상도동계 김무성 대표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내정서 불발됐잖소. 조금이라도 민추협을 생각했다면 그대로 줬어야 했어요.”

“….”

대통령과 민추협 간 식사라도 할 형편은 안 되는 거냐는 물음에 박광태는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도 “전화하면 받긴 하겠죠.” 뭔가 인연이 있는 듯했다. “잘 아나요.” 쳐다봤다. “시장 때 광주지검 특수부에 있었어요. 내가 광주 좌장이고 하니, ‘이렇게 출마했습니다’ 인사하러 오대요.”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이 윤 대통령 지지한 것은 어떻게 봤나요.” “김동철 등과 찾아와 묻더라고요. 내가 상관없다고 했어요. 정치는 자기를 알아봐 주는 대로 가면 되는 거요.” 어조가 쿨했다. “윤(尹)과 박(朴)이 국민의정부 민정수석실에 있을 때부터 서로 잘 알던 사이일 거요. DJ에 대해서도 尹이 감사하게 생각하리라 봅니다.”

민추협은 기여가 큼에도 많은 조명을 받지는 못해 왔다.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봅니까.” 끝으로 공통질문을 던졌다.

“민추협 정신을 가진 당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동문서답 같지만 임팩트가 컸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우직하고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 당이 생기면 힘 보태야죠.” 활력이 느껴졌다. 좀처럼 상기된 얼굴이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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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달용 2022-10-28 04:32:41
민주화운동은 민추협같은 조직이어야한다.
지금의 문산당은 민주당전신이아니고 국가전복을 꽤하는 불순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