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아래는 故 장준하 선생 의문사 관련, 6일(사건 현장인 경기도 포천 약사봉 산행), 7일(장호권 장준하 유족대표 전화인터뷰), 8일(민주통합당 이찬열 의원이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입수한 장준하 의문사 제출 자료 확인 및 유기홍 의원 측과의 대화, 고상만 전 조사관과의 전화 인터뷰), 9일(이찬열 의원 측과의 대화) 등을 토대로 취재 정리를 목적으로 기사화한 것이다. <편집자 주>
지난 6일 고상만 전 조사관을 따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소재의 백운산 약사계곡유원지 입구에 들어섰다. 故 장준하 선생의 천도재 봉행을 마치고 의문사 현장을 확인하기 위한 길이었다.
3km 근방에는 흥룡사란 사찰이 있는데, 이곳을 관장하는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이 마련한 자리였다. 문화재제자리찾기와 흥룡사는 故 장준하 선생 천도재 및 의문사 진상 규명 촉구 법회를 통해 천도재 봉행, 약사계곡 방문, 의문사 현장 확인 및 진혼제 등을 주관했다.
이날 약사계곡 현장에는 '장준하'라는 공통분모로 묶여진 사람들 100여 명이 함께했다. 중간중간 착잡함이 엿보였던 장호권 유족대표 부부를 비롯해 장준하 암살의혹규명 관련, 일선에서 뛰고 있는 백찬홍 홍보위원(씨알재단 운영위원 홍보위원장)등 범국민대책위 다수의 인사들도 눈에 들어왔다.증명법사 명진 스님과 봉행위원장인 흥룡사 혜문 스님, 그리고 사찰 관계자들은 사건 현장에서 이뤄질 진혼제를 준비하기 위해 일찌감치 앞서 나갔다. 민주통합당 장준하 의문사진상조사위원이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인 임수경 의원은 국정감사를 대비, 나름의 현장조사 차원으로 온 듯했다.
한쪽 어깨에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진 스텝 일행은 장 선생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 '유신의 추억'을 제작 중에 있다고 했다. 대다수가 사찰에서 점심공양으로 제공해준 김 가루가 얹어진 국수를 먹은지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한적한 풍경, 어딘지 나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앞서 서울에서는 아침 9시 조계종 앞에 세워진 4대의 버스 중 안내 종이에 4번이라고 적힌 버스를 타고 내려왔지만 약사봉 계곡을 향할 때는 고상만 전 조사관 차를 탔다. 흥룡사에서 약사봉 계곡 지점까지는 체감상 차로 십여 분 걸리는 듯했다. 고 전 조사관은 차창 밖으로 펼쳐진 마을 풍경을 둘러보면서 예전에 왔을 때보다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약사계곡 유원지 입구는 초등학교 운동장 반절 정도의 크기였다. 휑하니 낡은 건물 뒤로 약사봉 전경이 보였다. 입구 주변에 할아버지 한 분이 밤을 펼쳐두고 계셨는데, 근처 매점 위치를 여쭤보니 이곳은 없다고 했다. 진짜 없는지는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순간 진짜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곳은 번화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이곳 약사봉은 1975년 8월 7일이 되어서야 군사보호시설구역에서 해제됐다고 전해진다. 장 선생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기 10일 전에 해제된 것이다. 37년이면 강산이 4번 가까이 바뀌어갈 시간이고, 주변 모습도 많이 달라졌겠지만 등산객들이 찾기 좋은 등산로는 아닌 듯했다. 놀러가기 좋은 토요일 낮인데도 사찰에서 떠난 일행들 말고는 달리 보이는 등산객들은 없었다.
유원지 입구 오른쪽 방향의 먼 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이곳 주변이 마을임을 알 수 있는 집 한 채가 보였다. 대문 앞에는 두세 마리의 개가 묶여져 있었는데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연신 짖어대는 모양새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은 개 사육 농가였다.
장 선생도 이곳 입구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고 전 조사관의 말이 기억났다. 차타고 오면서 그는 "그때도 장 선생을 태운 42인승의 호림 산악회 버스가 약사봉 계곡 입구에 선 거예요." 고 전 조사관 말로는 당시 호림 산악회 말고도 (들은 게 정확치는 않지만)두 어개의 산악회가 더 갔다고 했다.
고 전 조사관은 항간에서 들려오는 '~카더라' 소문들을 경계했다. 호림산악회 주요 멤버인 김용덕 회장, 김희로 씨 등에 대해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그런 것들은 이 사건을 제대로 보는데 어려움을 초래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 소속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팀장을 맡았던 고 전 조사관은 2003년 7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장준하 의문사와 관련된 인물 100 여명을 만났다. 이 중 김용덕 회장, 김희로 씨 등은 시간의 경과로 인해 일부의 기억을 바꿔 말하긴 했지만 일관된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장 선생이 실족사한 것을 봤다고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김용환 씨만이 유일하게 일관된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다시 이 사건을 재조사한다고 해도 호림산악회 관계자들은 재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김용환 씨 경우는 호림산악회 회원이 아니라고 고 전 조사관은 부연했다.
그러면서 (관련 증언자들에 따르면) 장 선생은 자의로 약사봉에 온 것이고, 점심시간 장소에 도착한 후 홀로 등산길에 나섰다고 덧붙였다.
등산로로 향하기 위해서는 논둑길을 지나야 되는데, 둘 이상은 못 가고 한 사람만 지날 수 있는 외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옆쪽으로 한참 떨어진 논길을 이용했다.
37년 전 장 선생이 걸어간 곳은 우리 일행이 간 곳이 아닌, 옆 쪽 길이었다고 고 전 조사관은 설명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앞사람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다른 길 쪽으로 가게 된 것이다. 어찌 됐든 양쪽 모두 본격적인 등산로를 올라 개울처럼 생긴 계곡을 건너야 의문사 사건 현장에 당도할 수 있다.
고 전 조사관은 75년 8월 17일 장 선생은 경향신문 이 모 기자와 함께 약사계곡 초입까지 등산을 함께 했다고 전했다. 여기서 잠깐, 지난 2003년 2기 의문사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이 씨를 참고인으로 불러 기록한 대목을 발췌해본다.
"당시 근무하던 경향신문사 내에 등산모임이 있어 일요일마다 산행을 하였고 이날도 경향신문사 동료 서너 명과 서울운동장으로 나가니 한 버스에 '약사봉'이라고 쓰여 있어 버스에 승차, 기억으로는 장준하 선생이 버스 기사 운전석 바로 뒤편에 앉아있어 인사 후 포천 약사봉에 도착, 장준하 선생은 건강이 좋지 못한지 혼자서 일행보다 뒤쳐져 따라 올라가고 있어 내가 함께 동행 했고, 계곡 초입에서 '저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장 선생님은 '젊은 친구들이 산에 왔으면 산에 가야지 왜 여기서 안 올라가느냐'며 산으로 올라갔다.당시 장 선생은 건강이 좋지 못한지 걸음이 빠르지 못했고, 내가 끝까지 지켜봤기 때문에 기억하는데 장 선생님 보다 더 늦게 간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2004.6 2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재개 제 7호 장준하 사건 최종 보고 중 약사계곡 동행자, 당시 경향신문 이 모 기자 진술조사기록.>
논길을 거쳐 등산로까지는 시간상으로 따지면 30여 분이 안 된 듯했으나 본격적인 등산코스부터는 산지가 가파른 데다 세숫대야 같이 생긴 돌들이 발바닥을 찌르는 것 같아 느낌상으로는 지리산천왕봉을 올랐을 때보다 더 힘들게 여겨졌다.
사건 현장을 수차례 와 본 고상만 전 조사관은 "예전에는 지금처럼 길이 험하지 않았다"고 말해줬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여러 번 내린 빗물에 흙이 걷히고 돌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 거친 길로 변해버린 모양이었다. 이번에 함께 간 일행 중 약사봉 주변을 가장 잘 아는 고 전 조사관은 자연스레 등산 코스 해설자가 되어 함께 간 일행의 이해를 도왔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무렵, 이제는 개울 같이 생긴 계곡을 건너야했다. 그곳만 건너면 SBS <그것이 알고 싶다>방송에 나왔던 검안 바위와 사체가 발견된 절벽 아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계곡 쪽으로 내려가려는데 앞서 있던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씨가 한겨레신문사 강당에서 강연을 하게 돼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다른 일행 중 한 명이 이왕 온 김에 검안바위 근처까지 가자고 권유했지만 장호권 씨는 시간을 더는 지체할 수 없는 형편 인듯했다.
고상만 전 조사관은 장호권 씨에게 설명해 줄 사항이 있는지 잠시 붙잡고 김용환 씨가 군인을 봤다는 진술이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지, 그리고 그간 위치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따로 밝히지 않았던 대목에 대해 말을 이어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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