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추협 제대로 평가받는 그날까지 조명돼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눈은 내리면 녹습니다. 바람에 날리면 흩어지고 사라집니다.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동지애는 다릅니다. 녹지 않고 켜켜이 쌓입니다. 햇빛이 비치면 더욱 위풍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동지들이 보고 싶어 왔소.”
흰 눈처럼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고, 한 노인이 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상기된 얼굴에 눈물이 차올랐다 말았다, 안개에 휩싸이듯 흐려지는 눈시울을 본 순간 스토리가 궁금해 주변을 맴돌게 됐습니다.
상도동계이고, 이름은 남상선(남‧73) 씨였습니다. 서울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인 강원도 속초에서 왔습니다.
21일 새벽부터 폭설이 내리더니 여의도 국회 주변에도 눈이 쌓였습니다. 지방에서 오는 데다 눈길 조심하랴, 살살 걷느라 초긴장했을 터였습니다. 폭설을 뚫고 적잖은 고생이 뒤따랐을법하건만 곧바로 자리 잡아 앉지 못하고 한 명의 동지라도 더 찾고 싶다는 듯 시선을 바삐 움직였습니다.
이곳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주최하는 ‘2022년 제4회 민추인의 상’ 시상식 현장입니다. 민추협 인사들은 독재라는 어둠을 밀어내고, 민주화라는 새벽을 밝힌 87체제의 ‘찐’ 주역들입니다.
남 씨는 민추협이 출범했던 해인 1985년, 종각 13층 사무실에다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있을 때부터 민추인으로 살았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서울을 오가며 민주화운동하느라 보직을 맡지 못했다고 합니다.
시대를 호령해온 기라성 같은 민추협 인사들도 많지만 남 씨처럼 이름 모를 들풀 같은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김영삼-김대중(YS-DJ) 양 지도자를 중심으로 앞에서 거사를 도모한 거물들이 있다면, 민들레 홀씨처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다가도 자신을 내줄 자세로 뒤에서 밀어줬을 숨은 주역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때 ‘아이쿠나. 형님 오셨어요.’ ‘그래. 이 사람아.’ 뒤편에서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얼싸안는 동지들이 보입니다. 맨 앞줄에는 권노갑-김덕룡 공동이사장, 김장곤-유준상-안경률 전 의원 등이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남 씨. “이번에 와보니 지방에 있는 놈들은 죽었는지, 아픈지 보이지가 않네….” 보이지 않으면 생사부터 걱정되는 나이들이라, 자연스레 ‘죽었는지’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듯했습니다.
“몇 년 전 송재호도 죽었고 많이들 떠났어.” 친했던 동지의 이름을 불러보며 혹시라도 못 알아챈 얼굴이 있을까, 주변을 다시금 둘러봤습니다. 그나마 이성춘 사무총장, 조익현 부회장의 모습이 보인다며, 그제야 끝줄에 앉는 남 씨.
“코로나 전에는 많이들 왔는데, 이후에는 부쩍 줄어들었지….” 말처럼 노구를 이끌고 오기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60여 명 자리하고 있지만, 전과 비교하면 떠들썩하기보다 차분하니 조촐한 풍경이었습니다. 그 무렵 무대 영상 위로 내레이션과 함께 민추협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습니다.
“1984년 5월 18일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상의 상도동계가 힘을 합쳐 민주화 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과정이 있었다. 83년 12월 27일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500여 명이 모여 결의를 표명한 데 이어 84년으로 넘어오면서 출범 준비가 급물살을 타기에 이른다….”
원로들이 적적하지 않도록 사무국에서는 식전 막간을 활용해 민추협사(史)가 담긴 다큐멘터리 영상을 상영했습니다. 이럴 때 요긴하게 쓸 목적으로 따로 제작해둔 듯했습니다. 화면 위로 신민당의 12대 총선 승리에 한껏 고무된 양김이 손을 맞잡고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는 유명한 흑백사진도 스쳐지나갔습니다.
때마침 민주평통 수석부회장에서 내려온 뒤 좀처럼 근황을 접하기 어려웠던 이석현 공동회장이 뒤늦게나마 행사장에 나타났습니다. 민추협 원로들 중에서는 나이로 볼 때 막내 격에 속한다며 형님들 사이에서 곧잘 재롱 섞인 위트를 던져 웃음을 전해준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연신 웃는 상이었습니다.
매년 참석해 자리를 지켜왔던 김무성 공동회장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기에 걸렸다고 합니다. 무성대장으로 불릴 만큼 장군 포스지만 겨울 한파에는 속수무책인가 봅니다.
식이 시작되고 늘 그렇듯 이번에도 민추협의 백미인 주요 원로들의 인사말이 좌중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정치 10단들이 즉석에서 쏟아내는 경종의 메시지들이었습니다.
“국민을 불행하게 하고,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문제인 이념-지역-세대 갈등…. 국민통합에 우리가 앞장서야 합니다.”
- 권노갑 공동이사장-
내전이 극에 달한 정치 상황을 개탄하며 통합을 외쳤습니다.
평소 단상 위에 오를 때면 시국을 작심 비판해왔던 김덕룡 공동이사장은 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민추협의 역사적 조명에 집중해 발언했습니다. 87 직선제의 실질 주역임에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며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석현 공동회장은 민추협 유공자법이 21대 국회에서는 꼭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관련법은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에 이어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수정해 대표발의해둔 상태입니다.
양순석 사무부총장이 사회를, 조찬옥 사무총장이 경과보고를 읊었습니다. 피날레를 장식한 ‘자랑스런 민추인의 상’에는 김도현 전 문화부 차관을 비롯해 김도‧민상금‧백태열‧신현기‧오인석‧전대열‧최동화‧탁형준‧하민중‧홍순철 운영위원 등 20인이 받았습니다.
앞서 권노갑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민추인이야말로 헌신의 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올라와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에 따라 시상 순서에 맞춰 한 꽃 한 꽃이 걸음을 옮겼습니다.
모두 ‘헌신의 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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