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우 “박철언 교만하다 생각한 YS, 내각제 철회 결심” [時代散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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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우 “박철언 교만하다 생각한 YS, 내각제 철회 결심” [時代散策]
  • 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 승인 2023.05.22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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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우 전 국회의원
“경기지사 경선 돈 봉투 논란, 동교동계 쇼라고 봤다”
“이종찬 민 DJ, 경기지사 포기하라며 원내총무 제안”
“이기택, 이종찬 관련 DJ가 일임했다 했지만 동상이몽”
“6·27 지방선거 돕던 DJ측, 막판 부천서부터 발길 끊겨”
“유준상, 나 지지 안 해… 전남지사 안 나가 DJ에 찍혀”
“강창희, 전두환과의 인연으로 말단에서 조직 총괄 발탁”
“전두환 증언대 서기 전 ‘전쟁서 이겨야 한다’ 신신당부”
“노무현, 명패 던진 것, 전두환 아닌 野지도부에 던진 것”
“내각제 파동, 박철언과의 갈등 이후 YS 바뀌었다 생각”
“민정계, 14대 대선 경선서 YS 과소평가한 게 패착 돼”
“YS 막으려 이종찬 지지한 민정계, 처음엔 박태준 밀어”
“경선 보이콧 한 이종찬, 생각보다 득표 많이 나와 당황”
“이종찬 탈당할 때 같이 당 나갔다는 말은 사실과 달라”
“YS 대항마로 김우중 선택했지만, 압박감 못 견뎌 고사”
“이종찬, 정주영 지지로… 문민정부 초 檢 조사 들어와”
“조순, 순진했다…YS 만난 뒤 얻은 자신감으로 대선 출마 ”
“이인제에 격노한 조순 이회창과 만나 한나라당 당명 변경”
“큰 흐름 좇아 정치하라고 조언한 YS, 지금도 잊지 못해”
“세계캠핑캐라바닝대회 유치, 캠핑차 끌고 北 가는 게 꿈”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와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장경우 전 국회의원은 지난 1일 강남 부근의 한국캠핑캐러바닝연맹 사무실에서 본지와 만나 민정당 창당 초창기부터 3당합당에 얽힌 YS와의 일화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장경우 전 국회의원은 지난 1일 강남 부근의 한국캠핑캐러바닝연맹 사무실에서 본지와 만나 민정당 창당 초창기부터 3당합당에 얽힌 YS와의 일화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시대산책 ‖ 장경우 편 

  • 6·27 민주당 경기지사 경선 파동 원인 
  • 유준상의 장경우 지원설은 사실무근
  • DJ와 이기택 회동 후 말이 다른 까닭
  • 국민회의 창당, 알려진 것보다 이르다?
  • 민정당 초창기부터 5공 청문회까지 비화 
  • 강창희, 전두환 인연으로 단박에 승진해
  • 노무현 던진 명패, 전두환 아닌 야당에
  • 3당합당 후 3자 내각제 합의 깨진 내막
  • 이기택, 3당합당 대신 DJ 선택한 속내
  • 14대 대선 민정당계, 이종찬 지원 배경 
  • 김우중 출마하려다 막판에 고사한 이유
  • 민자당 탈당파들의 YS 대권 저지 실패 
  • 15대 대선서 조순 출마 이유는 YS 때문?
  • 조순, 이인제와 단일화 논의 중 격노 사연
  • 장경우 만나 큰 흐름 강조하며 설득한 YS 

1942년 경기 시흥, 부인 김수복, 슬하 3남(장남 장석재 주한에스토니아 명예총영사, 차남 장승재 법무법인 율촌 파트너 변호사, 막내 장혁재 사업가),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씨티은행 노조 창립위원장, 동서증권 대표, 11·13·14대 국회의원, 민정당 당대표 보좌역 겸 부대변인, 민정당 원내부총무, 민자당 사무부총장, 민주당 부총재, 한나라당 당무 운영위원, 국회 체신과학기술위원장, 국회 청원심사소위원장, 헌정회 부회장, 현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

 

선거는 오점으로 남았다. 
1995년 6월 27일은 제1회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민주당은 선전했다. 그러나 경기지역은 석패했다. 

“내 말대로 공천했더라면 수도권 모두 석권했을 것이다.”
이렇게 탄식하는 정치인이 있었다. 

DJ(故김대중 전 대통령)였다. 자서전에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의 말대로 했다면 이겼을까? DJ는 이종찬(1936~, 4선)을 밀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 경기지사 후보는 장경우가 선출됐다. 그는 민주당 총재이던 이기택(1937~2016, 7선)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낙선했다. 

고래 등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DJ와 이기택 경쟁에서 장경우가 딱 그 꼴이었다. 그 자신도 딱히 부정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만난 건 지난 5월 1일 강남 부근의 한국캠핑캐러바닝연맹 사무실에서였다. 연맹 총재를 맡고 있다.

 

6·27 경기지사 파동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기택 민주당 총재가 자택을 방문한 장경우 경기지사 후보와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서 웃음을 짓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기택 민주당 총재가 자택을 방문한 장경우 경기지사 후보와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서 웃음을 짓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어디서부터 풀어갈까 하다, 이 질문부터 건넸다. 

- 1995년 6·27 지방선거 때 입니다. 그때 DJ가 환상의 카드라며 ‘서울은 조순-경기도는 이종찬’을 밀었거든요. 그런데 경기도는 결국 이종찬 대신 ‘장경우 vs 안동선’ 싸움으로 된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네?”

“그건 나중 얘기요.”

사실관계가 거꾸로 됐다고 했다.

이야긴 즉 전하면 이렇다. 
 

장경우를 부른 이기택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하루는 민주당 총재인 이기택이 불렀다.
“자네가 경기지사에 나가게.”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아니, 민주당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나갑니까?”


더군다나 일찌감치 출마 의사를 밝혀온 안동선만 해도 경기도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이었다. 동교동계 지원까지 받고 있어 장경우로서는 자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다 생각이 있어. 자네는 연설이나 잘하고 사람이나 잘 만나면 돼.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이기택은 자신만만했다. 경기도내 계보가 꽤 있다며 큰소리쳤다. 장경우는 내심 긴가민가했지만, 적극적인 권유로 출마 결심은 굳어져 갔다. 


이윽고 4월 27일 오전 마포당사에서 출사표를 던졌다.

“당 지도부의 권유와 경기도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느끼며 지방선거에서 필승, 15대 총선과 차기 정권 창출에 견인차 역할을 하기 위해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사자후를 터트리기 무섭게 “와와…” 갈채가 쏟아졌다. “장경우! 장경우! 장경우!” 그의 이름을 뜨겁게 연호했다. 삽시간에 경선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경선 파행이 나지 않습니까?” 

한참 회상 중인 장경우를 흔들어 깨우듯 기자의 질문이 틈새를 뚫고 전해졌다. 

“그랬지.”

현실로 돌아와, 장경우가 답했다. 
 

경기도 안양시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대회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이 돈 봉투 살포 의혹을 제기하며 항의하고 있다.ⓒ연합뉴스
경기도 안양시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대회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이 돈 봉투 살포 의혹을 제기하며 항의하고 있다.ⓒ연합뉴스

치열한 경선 끝에 5월 13일 안양문화회관에서 민주당 경선대회가 치러졌다. 대의원들이 모인 가운데 이심(이기택)을 등에 업은 장경우냐, 범동교동계 안동선이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결선 투표 과정에서 때아닌 돈 봉투 살포 논란을 둘러싸고 시비가 일어났다. 안 측은 장 측에서 돈 봉투를 뿌렸다고 주장했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속 개표는 중단됐다. 급기야 양 세력 간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경선대회는 파행으로 치달았다.
 

“권노갑이 진두지휘하고, 소위 김옥두 등 동교동계 물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단상 위로 올라온 거요. 개표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난리가 난 거야. 경기도당위원장이 이규택 씨였는데 두들겨 맞고, 옷도 다 찢어지고…. 내가 그를 병원으로 옮겼어요. 투표함은 당사로 갖다 놨는데 일주일 동안 개표를 못 했다니까. 동교동계에서 부정이라는 거야.”

- 진상은 무엇입니까. 

“우리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 그럼 뭡니까. 

“자 보라고. 돈 봉투 돌렸다는 쪽도 동교동계고, 그거 잡았다는 쪽도 동교동계…. 이상하지 않아요?”

- 동교동계에서 자작극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몰라요.”

뒤로 빼면서도 “암튼 쇼라고 본 게 우리 입장이에요.”

-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처음엔 개봉하지 못하다가, 나중엔 투표함을 열었지.”

개표 결과 총투표수 444표 중 장경우는 226표를 얻어 안동선(217표)을 제치고 민주당 경기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DJ와 이기택 


당내 넘어야 할 산은 또 있었다. 이번엔 DJ와의 신경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DJ는 본격적인 정치활동 대신 숨고르기를 하던 중이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YS(故김영삼 전 대통령)에 패한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상태였다. 명분 없이 정치재개를 선언하기엔 눈치가 보이던 때였다. 대신 아태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막후에서 개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잠깐 언급했던 대로 DJ는 서울은 조순, 경기도는 이종찬을 구상했다. 그는 이종찬을 내세우는 근거로 당 안팎에서 실시해온 여론조사 결과를 댔다.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두 있던 이기택 쪽에서는 DJ가 이종찬을 앞세워 또다시 대권을 목표로 정계복귀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반면에 DJ는 이기택이 괘씸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 영국에 머물던 와중에도 당원들을 설득해 이기택이 총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왔건만 막상 돌아와 보니 사사건건 부딪혔다.

DJ는 장경우가 경기지사 후보로 선출된 것과 상관없이 계속 ‘이종찬 추대론’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루는 DJ가 동교동 자택으로 장경우를 불렀다. 
 

동교동계 자택, DJ와 장경우 
 

“장 의원, 경기지사 말고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하고, 원내총무를 하는 게 어떻소. 알다시피 장 의원 선거구(경기 안산·옹진)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소.”
호남민이 많다는 말로 들렸다. 
“뿐만아니라 원내총무 끝나면 국회의장까지 가는 길이 열리잖소. 이번엔 양보하시오.”
상대는 민자당의 이인제라 만만치 않다고 본 장경우로서는 DJ의 제안이 솔깃했다.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대신 이기택 총재를 설득해줬으면 합니다.”
“그건 나한테 맡겨요.”

여기까지 당시를 떠올리던 중인데,
“재밌네요.”
듣고 있던 기자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눈동자를 빛냈다. 
“그런데 아니나 달라?”
톤이 높아졌다. 

“이기택과 DJ가 만났는데 기자들도 오고…. 두 분이 장장 점심까지 먹고 몇 시간을 회동했어. 그러니 나는 속으로 얘기가 잘 됐구나, 생각했지.”

하지만 일은 꼬여갔다. 

“DJ와 만나고 난 뒤 이기택 씨가 당으로 왔어. 기자들이 ‘경기지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자 이기택 씨 표현을 빌리자면 ‘김대중 전 총재가 나한테 위임했다.’ 이렇게 한 거야.”

- 그게 사실입니까.

“DJ는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한 조건에서 위임한 건데 이기택 씨는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 왜 그런 겁니까. 

“아직도 모르겠는데…. 이기택 씨가 이종찬 씨한테 전화했다는 거야.”
 

이기택 : 종로구 국회의원 한 사람이 왜 경기지사 나오려고 하오?
이종찬 : DJ가 자꾸 나오라고 하니 고민이오. 
이기택 : 당신이 안 나간다고 DJ한테 얘기해요. 경선 원칙에 따라 장경우가 됐는데 뭣으로 뒤집을 수 있겠소? 

“이기택 논리인데 그 말도 맞지.”
설명하던 장경우가 곱씹듯 되뇌었다. 

“암튼 이기택 씨가 이런 얘기(이종찬과의 통화 내용)를 DJ한테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모든 걸 나한테 맡기십시오.’ 룰대로 가겠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DJ는 자기 말대로 이종찬은 경기지사, 장경우는 원내총무 하기로 했지 않냐는 입장이었고 말요.”

- 동상이몽이었네요.

“그렇지.”

끄덕였다.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맨 왼쪽부터 신용석 인천시장 후보, 이기택 민주당 총재, 김대중(DJ) 아태재단 이사장, 조순 서울시장 후보,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DJ 동교동 자택에 모여 의기투합하고 있다.ⓒ연합뉴스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맨 왼쪽부터 신용석 인천시장 후보, 이기택 민주당 총재, 김대중(DJ) 아태재단 이사장, 조순 서울시장 후보,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DJ 동교동 자택에 모여 의기투합하고 있다.ⓒ연합뉴스

“지금 생각해 보면 DJ는 대통령 선거에 한 번 더 나가고 싶었던 거고, 이기택 씨는 세 번이나 떨어졌는데 왜 또 나가? 이번엔 내 차례라고 생각했던 거요.”

생각난 게 있는 듯 “그의 글(이기택 회고록)에도 나오는데, DJ가 자신한테 약속했다는 거예요.”

- 차기 대권을요?

“말해 뭐해.” 

눈빛으로 대신했다.

“이기택 씨는 ‘아니 내가 (지역구민인) 부산 사람들한테 욕을 얻어먹으면서까지 14대 대선에서 DJ를 끝까지 도왔지 않냐. 다음엔 내 차례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지만 DJ는 욕심이 계속 있었던 거지.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거요. 입증된 게 뭐냐면 갑자기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든다고 선언한 거 아니오?”

6·27 지방선거가 끝난 뒤 얼마 안 가 DJ는 창당을 선언했다. 

“이게 경기지사 선거와도 연관이 있어요.”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설에는 경기지사 선거 패배의 책임을 물어 이기택을 2선 후퇴하게 하고, DJ 자신이 화려하게 정계복귀 할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신당행으로 선회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장경우는 선거를 치르던 와중에 이미 동교동계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봤다. 
 
“유세 막판에 느낌이 쎄-하더라고.” 
 

“후보 등록 후 한 열흘간 DJ가 도와준 선거는 나중에 보니 내가 다 이겼어요. 안양 연설을 했는데 거기도 이겼어요. 그런데 묘하게 선거구가 큰 부천으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지는 거라. 연설하러 단상에 올라가 보니 경기도도 아닌 서울 국회의원들이 죄다 앉아있는 거예요. 유세 끝나기가 무섭게 일산에 있는 DJ 숙소에 모이려는 사람들이었던 거요. DJ가 창당 발기인대회 선언할 때도  그 얼굴들이 보이더군.” 

- 그때부터 딴마음을 먹고 준비했었다고 보는 겁니까. 

“안 그러면 왜 그랬겠어요?”

반문해 왔다.

“결론적으로 경기지사 선거에서 내가 패한 이유가 된 거예요. 부천을 기점으로 여는 투표함마다 졌지 뭐요.”

다시 생각해도 분한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1995년 6월 지방선거 기간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안양을 방문해 장경우 경기지사 후보를 지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1995년 6월 지방선거 기간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안양을 방문해 장경우 경기지사 후보를 지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 또 하나, 이것도 궁금한데요. ‘동교동계 유준상이 이기택한테 설득당해 장경우를 지원했다’는 설이 있었잖습니까. 근데 유 전 의원 본인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유준상 씨가 나를 지원했다고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 네. 

“에잇 무슨 소리….”

- 아닙니까. 

“사실무근이오. 유준상 씨는 나를 지지한 적이 없어요.”

- 공식적이든 물밑에서든 지원한 적이 없다는 거죠?

“아. 그렇다니까.”

- 그런 오해로 인해 다음 공천도 못 받고…. 스스로는 꽤 억울했겠네요. 

“동교동계에서 제쳐진 것은 그 전부터일 거예요.”

- 6·27 당시 전남지사 선거에 나가라고 DJ가 수차례 권유했었는데 이를 듣지 않아 불편해졌다는 이야기는 지난 인터뷰 때 듣긴 들었습니다. 

“DJ는 자기가 점지한 사람들이 시도지사에 나가야 한다고 봤어요. 이 때문에 출마를 준비 중이던 권노갑·한화갑 등 동교동계 인사들 죄다 중도 하차한 거 아니오. DJ 말을 들은 거지. 그런데 유준상 씨는 DJ가 나가라고 했는데도 안 나간 거야. 그런 몇 개의 이유로 찍힌 것이지.”

이는 장경우 시각이다. 유준상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DJ와의 관계는 다시 좋아졌다고 한 바 있다. 

“글쎄요. DJ는 한 번 아니면 아닌 줄 알아요. 아무리 측근이어도 공천을 두 번 이상 받기가 어려웠잖소.” 

 

민정당 창당, 이재형 찾아가 


장경우는 민정당 창당 때부터 정계 입문했다. 

- 어떻게 정치하게 된 겁니까. 

“가만있자….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주머니에서 이야기보따리를 꺼내듯 시간을 거슬러 첫 직장 얘기부터 서두로 잡았다.

“내가 외국계 은행 최초 노조를 만들었어요.” 
 

장경우 전 국회의원은 지난 1일 강남 부근의 한국캠핑캐러바닝연맹 사무실에서 본지와 만나 민정당 창당 초창기부터 3당합당에 얽힌 YS와의 일화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장경우 전 국회의원은 지난 1일 강남 부근의 한국캠핑캐러바닝연맹 사무실에서 본지와 만나 민정당 창당 초창기부터 3당합당에 얽힌 YS와의 일화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42년 경기 시흥군에서 태어나 경기고를 거쳐 고려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씨티은행에 입사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우연치 않게 행우회 회장을 맡으면서 자연스레 노사관계 문제의 중심에 섰다. 외국계 은행 최초로 노조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 창립위원장을 맡았다. 회사에서는 상징적 인물이 된 그가 눈엣가시였다. 진급을 시켜 노조위원장을 못하게 했다. 수표에 사인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환심을 살 요량으로 미국 연수까지 보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장경우는 사표를 냈다. 이대로 사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세웠다. 1981년 민정당이 창당됐다. 발기인 명단에 이재형(1914~1999, 7선) 전 국회의장을 보자 반가웠다. 민정당 초대 당대표가 된 이재형은 장경우의 작은 아버지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이 양반 찾아가면 정치 할 수 있겠다.’ 무작정 이재형이 살고 있다는 사직공원 바로 옆 한옥을 찾아갔다. 

 

이재형과 장경우

 

이재형 민정당 대표ⓒ대한민국 헌정회 홈페이지 캡처
이재형 민정당 대표ⓒ대한민국 헌정회 홈페이지 캡처

 

“아버님이 공무원이시겠네.”
큰절을 올리자, 이재형은 장경우 집안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는 듯 내색하며 그리 물었다. 
“국회의원을 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아 국회의원은 아무나 하나?”
호탕한 웃음소리부터 들렸다. 
“….”
“국회의원이 되려면 누구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최소한 사방 십 리 안은 알아야 할 걸세. 공부는 서울 가서 다 했고, 지역에서 한 것도 없는데 뭔 국회의원을 한다고….”
한심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알겠습니다.”
대문을 나오는데 초라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안 되겠구나.’
불합격이라고만 생각했다. 

한 일주일이 지났다. 집으로 전화가 왔다. 
“민정당 대표실입니다.”
깜짝 놀랄 새도 없이 
“날세.”
수화기 너머로 이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예.”
“우리 집에 와서는 큰소리치더니 어째 코빼기도 안 보이나?”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포기할까 싶었습니다.”
“정치하겠다는 사람이 왜 이리 포기가 빨라? 오늘 우리 사무실에 오게.”


안국동 옆에 민정당 창당 건물이 있을 때였다. 물어물어 찾아가 대기하고 있자니 뉴스에 많이 보던 얼굴들이 문턱을 오갔다. 
정오 때가 되자 이재형이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장경우를 불렀다. 
“어이, 장군. 나하고 점심이나 하러 가세.”
무교동 서교호텔 2층에 있는 한 음식점으로 갔다. ‘드르륵’ 안으로 들어갔다. TV에서만 보던 권정달‧이종찬‧배성동‧박현태 등이 앉아있었다. 
“집안 대대로 교류가 있는 이의 조카 되는 사람이요. 오늘부터 나하고 같이 일하게 됐소.”
그렇게 장경우를 소개했다.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가니 아침에 봤던 비서들 태도도 달라진 느낌이었다. “보좌역님 방은 여깁니다.” 당대표의 보좌역이라는 직책이 생겼다. 책상도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이재형은 장경우에게 두 권의 책을 줬다. 당헌과 헌법 책이었다.
“장 보좌역은 한 달 동안은 특별한 일 없이 이 두 책만 공부하게.”
열심히 읽으라며 당부했다. 딱히 부르는 일도 없었다. 
“공부는 다 했나?”
한 달여가 지났을 때 이재형이 물었다.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는 아침 7시 회의에 참석하게.”
실국장 회의를 말했다. 면면을 보니 11대 전국구 국회의원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선전국장은 조남조가, 청년국장은 이민섭이 맡고 있었다. 

하루는 전두환이 당사를 방문했다. 대통령이 당 총재도 겸직할 때였다. 일렬로 쭉 늘어서서 전두환을 맞았다. 장경우는 맨 끝머리였다. 그 옆에는 사무총장 밑에 있던 강창희 보좌역이 서 있었는데, “아니. 이게 누구야?” 전두환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이노마 봐라! 하하하.” 알고 보니 전두환과 강창희는 같은 육사 출신으로 축구선수를 지낸 인연이 있었다. 이 사실이 삽시간에 알려지면서 당 서열은 바뀌어버렸다. 전두환이 정무수석인 허화평한테 시켜 승진 발령을 냈다. 다음날 강창희는 당 조직을 총괄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러던 중 장경우에게도 기회가 왔다. 민정당 전국구 정희택이 감사원장 서리에 임명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를 계기로 예비후보 순번이었던 장경우에게 그 자리가 승계됐다. 보좌역 겸직 대신 부대변인을 자청했다. 조간신문을 보면 대변인들이 말한 게 기사화돼 나오는 게 신기했다. 매커니즘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5공 청문회, 백담사로 


이재형이 대표직에 물러났고, 12대 때는 공천을 못 받았다. 같은 재무위원회 소속인 정재철과 친했다. “장형. 그러지 말고 증권사 일은 어떻소?” 그렇게 동서증권 사장으로 있다가 13대 총선이 다가왔다. 증권사에서는 계속 사장으로 있어 줄 것을 재차 권유해 왔지만, 정치에 대한 꿈을 저버리기가 어려웠다. 공천을 받지 못했다는 아쉬움 같은 것도 있었다. 이를 만회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나 컸다. 

13대 총선은 소선거구제로 치러졌다. 우여곡절 끝에 안산·옹진으로 나갔다. 논두렁, 밭두렁부터 백령도, 대청도까지 빠짐없이 누볐다. 8만 표 이상 몰표가 나왔다. 압승이었다. 

당에 의원 등록 신고차 갔더니 그때 만난 사람이 허주 김윤환(1932~2003, 5선)이었다. 그는 장경우에게 원내부총무를 맡겼다. 
 

국회 5공-광주특위 연석 청문회 간사인 장경우 의원이 최낙도·김현·오경의 의원 등 여야 간사단과 보충질의 관련 위원장한데 다가가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국회 5공-광주특위 연석 청문회 간사인 장경우 의원이 최낙도·김현·오경의 의원 등 여야 간사단과 보충질의 관련 위원장한데 다가가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국회는 여소야대였다. 125석을 얻은 민정당은 제1당이긴 했지만, 과반 의석을 얻지 못했다. 야권의 파이는 컸다. 평화민주당이 70석, 통일민주당이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으로 뒤를 이었다. 

야3당이 과반 넘게 차지하게 되자 민정당으로서는 5공 청문회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5공 청문회는 85년 신민당이 첫 제기하면서부터 불씨가 이어져 오고 있던 첨예한 쟁점 사안이었다. 

당시 신민당은 12대 총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5·18문제 등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성사되지 않다가 6월항쟁과 직선제 쟁취, 여소야대 국면이 되면서 5공 청산 작업에 대한 야3당 총재(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주장이 관철됐다. 

1988년 6월 국회, 광주5공비리 특위가 가동됐다. 11월에는 5공 관련 비리 연루자들이 소환돼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됐다. 

하이라이트는 12월 말로 예정된 전두환의 청문회 출석이었다. 민정당으로서는 백담사에 칩거하던 전두환을 내려오게 하는 것과 그가 증인선서를 할 때 청문회 위원장 앞에서가 아닌 방청석을 향해 선서할 수 있도록 야당을 설득하는 일이 최대 관건이었다. 
 

백담사로 가다
 

후자는 해결됐지만, 전자가 남았다. 둘은 백담사로 향했다.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전두환 경호실장 안현태가 떡하니 버텼다. 그는 총을 차고 있었다. 
“각하를 뵙고 싶습니다.”
“우리 각하를 말이야. 조금이나마 언짢게 한다든지 욕되게 하면 쏴 죽일 거야. 나도 죽어.”
여차하면 쏠 것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전두환을 향해 이한동이 큰절을 하고, 선물로 가져온 술을 건넸다. 
“내가 술 안 먹는 거 알잖아. 이 사람아. 이건 우리 비서들 주게나.”
술병을 치운 뒤 설명에 들어갔다. 
“선서는 방청석을 향해서 하면 됩니다.” 
전두환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번엔 청문회 예상 질문을 뽑아 보여줬다. 거기에는 눈길조차 안 줬다. 어쨌든 얘기가 잘 돼 일어나려는데 전두환이 불쑥 이 말을 꺼냈다. 

“전투에서 이기는 건 소용이 없어. 그러나 전쟁에선 이겨야 해.”
‘마지막에 이기는 게 중요하다’라는 말을 신신당부했다. 의중이 뭘까. 장경우는 궁금했지만, 선뜻 감이 안 왔다.
이윽고 12월 31일 전두환을 대상으로 5공-광주특위에 대한 연석 청문회가 열렸다. 장경우는 당 간사를 맡고 있어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러던 중 전두환이 등장했다. 간부들이 모두 나와 맞았다. 장경우 눈에는 그들이 고양이 앞에 쥐 같았다. 전두환이 쭉 둘러보더니 “전쟁에서 이기는 게 중요해.”
백담사에서 했던 말을 또다시 했다.
그런 뒤 이한동을 쳐다봤다.
“똑바로 해.”
“알겠습니다.”
그는 알아들은 눈치였다. 

1989년 12월 31일  5공-광주특위 연석 청문회에서 전두환이 발언하는 도중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항의하고 있다.ⓒ연합뉴스
1989년 12월 31일 5공-광주특위 연석 청문회에서 전두환이 발언하는 도중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항의하고 있다.ⓒ연합뉴스

5공 청문회는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자정까지 이어졌다. 전두환은 5공 비리의 실체를 부인했다. 야당과 재야세력은 분노했다. 그의 증언을 둘러싸고 여야는 고성에 몸싸움까지 벌였다. 청문회는 몇 차례 파행을 거듭했다. 

자정 12시.
어느덧 종료 시점이 다다랐다. 
야당은 차수 변경을 선포했지만, 민정당 의원들은 거부했다. 청문회가 속개됐으나 반쪽 참석에 불과했다. 여당은 보이콧했고 자리를 지킨 야당은 전두환을 압박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여야가 대립함에 따라 더는 증언하기 어렵다는 변을 끝으로 철수해버렸다.

장경우는 자신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전두환의 뒷모습과 그가 되풀이했던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선 이겨야 한다’는 말이 겹쳐 떠올랐다. 순간 섬광처럼 번뜩이는 게 있었다. ‘그 말이었구나.’ 무릎을 탁! 쳤다. 

‘청문회 출석은 올해 마지막 날에 하는 이번 한 번뿐이다. 야당이 차수를 변경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막아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리 가늠됐다. 

어느덧 전두환을 태운 차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날짜는 1989년 마지막 날의 자정을 지나 1990년 1월 1일로 넘어갔다. 야당 의원들은 새벽 1시까지 발언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두환이 떠난 뒤라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단단히 벼르던 5공 청산이건만 깊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8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노무현에 대한 와전


- 그때 분을 참지 못한 노무현 의원이 퇴장하는 전두환한테 명패를 던지기도 했잖습니까.

“사실이 아니에요.”

기자가 물어오자, 장경우가 단칼에 정정했다.

- 그럼 뭡니까. 

“문동환 광주특위 위원장을 향해 명패를 던진 거예요.”

자기네 야당 특위 지도부한테 실망한 나머지 명패를 내동댕이쳤다는 말이었다. 

- 와전된 건가요.

“그렇죠.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도 있어요. <꼬방동네 사람들> 작가 이철용 씨라고….”
 

“이철용 씨를 작년에 만났는데, 나한테 그럽디다. ‘장 선배. 내가 (노무현) 옆에 있어서 잘 알잖아. 문동환 위원장을 향해서 실컷 불러다 놓고 이런 식으로 제대로 못 하는 게 어디 있냐. 화난다면서 바닥에 명패를 팽개친 거예요.’ 근데 소문은 전두환을 향해 던진 것으로 나더라고(웃음).”

이철용은 13대 국회의원이던 5공 청문회 때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이다. 살인마”라고 발언해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또 다른 청문회 스타는 노무현이었다. 전두환한테 명패를 던진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철용 말을 전하며 사실과 달리 와전됐다는 게 장경우 얘기. 

 

내각제 파동


3당 합당 후 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과 장경우 사무부총장이 국회에서 어린이들고 손잡고 화보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3당 합당 후 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과 장경우 사무부총장이 국회에서 어린이들고 손잡고 화보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 1990년 3당합당 때는 민정당계 정치인으로서 어떻게 느꼈습니까. 

“국회 예결위원회 간사로 1월 초 남미 출장을 갔을 때예요. 저녁을 먹고 있는데 3당합당이 됐다는 거야.”

귀를 의심할 일이었다. 

- 놀랐겠습니다. 

“이후 민정당 사무총장인 박준병 씨한테 전화가 오더라고. 나더러 당장 귀국하래. 이유를 물으니 당에서 맡을 일이 있다는 거야.”

그길로 부랴부랴 귀국했다. 박준병은 장경우한테 당 살림을 맡겼다. 사무부총장 자리였다. 3당합당에 필요한 실무작업이었다. 

대표최고위원은 YS가 맡았다. 부총장이니 YS한테 결재받을 일이 많았다. 

“YS 옆에는 좌동영(김동영), 우형우(최형우)가 있었어요.”

- 알죠. 

“김동영 씨가 나를 끌어들이려고 공을 많이 들였는데 말이야.”

- 그랬습니까.

“그 양반이 일찍 작고하지 않았다면 모르지. 결국, 그리 갔을지도…”

여러 표정이 읽혔다. 

- 내각제 파동 등이 한창 부각했을 무렵에는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내 기억으로는 아마 YS와 박철언 정무장관이 모스크바에 갈 일이 있었는데….”

3월 말경이다. 

“그때부터 본격화됐다고 봐요.”

- 무슨 얘깁니까. 

“나야 현장에 없어서 모르지만, 외무통일위원장이던 정재문 씨 얘기론 두 사람 간 마찰이 컸다는 거야. 박철언 씨가 교만하다며 YS가 엄청 흥분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귀국하기 전 내각제 합의를 깨기로 민주계끼리 합의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저 꼬락서니 보니까 안 되겠다’ 싶었던 것이지.”

추측이었다. 

3당합당 후 노태우 측은 YS에 내각제 합의각서에 사인할 것을 조심스럽게 압박해왔다. 합당 전 논의되던 것을 문서화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YS는 대한민국 정치풍토에 맞지 않는 제도라고 봐서 쉽게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 계파(민정당계, 민주계, 신민주공화당계)의 통합을 위해서는 이런 형식이 필요하다는 말에 마지못해 사인했다. 대신 절대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전제조건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약속은 깨져버렸다. 1990년 5월 한 일간지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김종필 최고위원이 내각제에 합의하고 각서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정치권 안팎은 발칵 뒤집혔다. 내각제라는 말에 여론의 반대 또한 심상치 않았다. 폭풍전야였다. 

당에 보도 경위를 추궁한 YS는 점점 커지는 내각제 반대 여론을 명분으로 백지화해야 한다는 데 힘을 실었다. 청와대도 사실상 수용할 분위기였다. 몇 개월 지나 이번에는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서명했던 내각제 합의 문서가 한 일간지를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YS는 내각제 개헌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청와대의 정치 공작이라고 봤다. 즉시 당무 투쟁에 돌입했다. 그 결과 노태우로부터 내각제 포기 공표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YS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과정 끝에 내각제 합의를 파기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장경우는 박철언과 불협화음이 있던 3월 모스크바 방문 때부터 이미 YS가 내각제 합의를 깨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고 봤다. 

당시 민정당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YS의 권력 쟁취 


치열한 당내 투쟁 끝에 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은 대선후보로 선출됐고 14대 대통령이 됐다. 사진은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 시절의 YS와 장경우, YS를 보좌한 박진 등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치열한 당내 투쟁 끝에 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은 대선후보로 선출됐고 14대 대통령이 됐다. 사진은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 시절의 YS와 장경우, YS를 보좌한 박진(장경우 뒤) 등이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 권력 분점에서 권력 쟁취로 바뀐 거네요. 

“바뀐 거로 봐야지.”

- 결국, 대선후보까지 된 거 아닙니까(1992년 5월 전당대회에서 YS는 민자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노태우부터 주변 사람들이 YS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아. 그게 패착이었던 거예요. 당장은 민정당계에 대한 여론이 안 좋으니까 YS를 대선후보로 만든 뒤 다시 TK(대구·경북) 후보로 돌리자. 이런 생각을 했으나 뜻대로 안 된 거지.” 

-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과거 청와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인 거죠. 너무 많은 권력을 갖다 보면 객관성을 잃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14대 대선 경선 과정에서 YS계는 장경우한테도 도와달라고 접촉해왔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 허주 김윤환(1932~2003, 5선) 씨 등 YS 쪽으로 간 민정당계 인사들도 꽤 됐는데, 왜 안 간 겁니까.

“(또 다른 민정당계 일각에서) 나한테 YS한테 안 갔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난 그게 오더인 줄 알았어. 또 남들이 봐도 그게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 싶었지.”

당직을 맡아 더욱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처음엔 그런 뜻이었는데 경쟁에 빨려 들어가면서 결국 세력화돼 버리더라고.”

대선 경선은 묘하게 흘러갔다. YS 만큼은 안 돼야 한다고 봤던 민정당계에서는 이종찬을 밀었다. 원래 박태준한테 관심이 있었지만, 청와대 분석 결과 ‘아니다’라는 판단이 전해지면서 이종찬으로 선회했다고 전해진다.

본격적인 세 과시가 벌어졌다. YS가 민주계와 민정-공화계파를 망라한 추대위를 공식 발족하자, 이종찬은 불공정 경선이라며 반발했다. 급기야 전당대회를 이틀 앞두고 위장 경선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5월 19일 치러지기로 한 전당대회는 예정대로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YS는 투표자의 66.3%를 받아 14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종찬 씨가 경선 당일 안 온 거예요. ‘이건 하나 마나 한 애들 장난이다….’ 그렇지만 없는 상태에서 전당대회 투표를 했잖소. 뚜껑을 열어보니 삼십몇 퍼센트가 나온 거라. 아마도 이종찬 씨가 계속 버티고 있었으면 40% 이상은 득표했을 거로 봐요. 그랬다면 이후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민정당계에서 아쉬워들 했죠.”

이종찬은 이후 당을 떠났다. 

- 같이 탈당했잖습니까. 

“난 아니지. 참, 오해들을 많이 하는데….”

이참에 제대로 정정하겠다는 듯 자초지종을 전해나갔다. 

대선후보로 선출된 YS가 기자들을 데리고 광화문에 있는 이종찬 경선캠프를 찾아왔을 때였다. 기자들 보는 앞에서 YS는 이종찬을 끌어안고 승리를 위해 힘을 합치자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종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당을 떠나려 했다. 

“반면에 우리(민정당계)는 당에 있어야 한다고 만류했어요.”

하지만 허사였다.

- 그게 실책이죠. 

“글쎄….”

공감하면서도 선뜻 인정하기 싫은 심리가 엿보였다. 

이종찬은 나가서 신당을 모색했다. 곧이어 민정당계 일부 의원들의 탈당 러시가 벌어졌다. 장경우는 박태준·김용환·박철언·이자헌·유수호 등과 함께 탈당 행렬에 가세했다. 이들은 “구국적 결단으로 3당이 통합됐으나 정신과 본질이 변하고 있다”며 탈당의 변을 댔다. 

그러나 허울 좋은 구실일 뿐 따지고 보면 이유는 하나였다. 

“쉽게 얘기하면 이 양반들이 볼 때 YS는 무조건 안 된다는 거야.”

 

YS 대항마 찾아나서  


고심 끝에 YS 대항마를 물색했다.
 

“김용환 씨라고 참 꾀보였어요. 그 당시 강영훈 씨가 적십자 총재였는데 ‘대통령감’이라는 거예요. 군인 출신이면서 문인이고 강직한 성품이 맘에 든다고 했지. 우리도 강영훈 씨를 후보로 밀기로 방향을 잡았지요. 그런데 청와대에서 접촉인 된 건지 모르지만,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나중에서야 전화가 왔어. 자기는 대통령에 맞서기 어려우니 안 나가겠다고…. (청와대에서는 YS를 대선후보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강영훈을 YS 대항마로 보지는 않았던 듯하다.)
 

하는 수 없이 긴급회의를 한 끝에 김우중(대우그룹회장) 씨를 추천받았어요. 별장이 경기도 안산에 있는데 찾아갔지요. 본인도 나가고 싶다고 해서 그쪽으로 거의 굳어졌지. 찾아보면 신문에도 크게 났을 거야.” 

1992년 10월 25일 신문에서는 대선 출마를 결심한 김우중에 대해 크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뜻을 접고 만다. 

- 왜 그랬던 겁니까. 

“대우 임원들이 나한테 전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동기동창이 많았거든. ‘너 미쳤냐. 김 회장을 왜 대통령 시키려고 하냐. 우리 기업 다 망한다. 안 그래도 은행 대출까지 막혔다.’… 난리가 난 거야.”

심란한 상황이었다. 민정당계 탈당파들은 숙고에 들어간 김우중과 만나 최후 담판을 짓기로 했다. 출마 가부를 결정할 참이었다. 힐튼호텔 맨 꼭대기 층에 별장 같은 곳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이종찬도 와 있었다. 대통령 출마를 포기한 상태라 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한참 대화가 무르익어가는데 이종찬 씨가 자꾸 시비를 걸더라고. 김우중 씨한테요. 옥신각신하길래 보다못해 우리가 둘만 남기고 나와버렸어. 근데 나중에 들으니까 한바탕 했다더군.”

전해준 사람은 <세계일보> 황용호 기자였다. 알고 보니 그는 당시 병풍 뒤에 숨어서는 현장의 상황을 몰래 취재하고 있었다. 

“거기서 다 듣고 있었다더군.”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지 껄껄거렸다. 

“어쨌든 이후 김우중 씨는 대권 출마를 접었어요.” 

- 결정적인 이유는 뭡니까.

“이종찬이 반대하지. 정부에서 압력 나오지. 돈 묶이지. 결국, 포기한 거요.” 
 

민자당내 민정계 중 YS에 반발한 인사들은 탈당해 대항마를 찾아 나섰다. 사진은 왼쪽부터 장경우, 김현욱, 오유방, 유수호, 이종찬 의원이 모여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민자당내 민정당계 중 YS에 반발한 인사들은 탈당해 대항마를 찾아 나섰다. 사진은 왼쪽부터 장경우, 김현욱, 오유방, 유수호, 이종찬 의원이 모여 논의하고 있다.ⓒ연합뉴스

도저히 후보가 없자, 다시 이종찬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 사이 탈당파들 다수는 현대그룹 회장인 정주영 대선후보한테로 옮겨갔다. 신당에는 장경우만 남다시피 했다. 하루는 이종찬이 찾아와서는 후보 등록에 필요한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장경우는 공명선거 캠페인이나 하자며 말렸다. 그러나 이종찬은 끝내 등록을 해버렸다. 유세 버스도 준비했다.

“거기에 완전히 몰입돼 있던 거야.”

장경우는 마지못해 출마를 돕게 됐다. 

- 안 도울 수도 있었잖아요. 

“내가 신당의 사무총장인데 어떻게 그러나.”

잠시 사잇길로 빠지며, 
“그 양반 아들이 이철우 씨잖소.”
연세대 법학교수를 말했다. 

- 윤석열 대통령 친구지요.

“이종찬 씨 유세장에도 둘이 왔다고 하더군. 본 것도 같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모습이었다. 

열길 제쳐놓고 도우러 온 테너 임웅균과 가수 이선희도 떠올랐다. 도와달라는 호소를 뿌리치지 않고 의리를 지켜준 것에 지금까지 고마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임웅균이라는 유명 테너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장경우와의 인연인 영향도 컸다. 이선희 역시 서울시의원으로 장경우가 발탁한 인물이었다. 1991년 기초의회선거를 앞두고 영입했는데 실제 나이가 호적과 달라 출마할 수 없게 되자 재판까지 거쳐 이를 바로잡고 내보낸 끝에 당선시킨 일화가 있다. 

“이선희 씨가 연설을 똑 부러지게 잘하기로 유명했어요. 입소문이 나면서 선거 전체에 바람을 일으키는 일등공신이었죠.”
 
노태우 정부 때였다. 김옥숙 여사가 청와대로 초청해 만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선거 일주일인가, 열흘 남기고 이종찬은 완주 여부를 놓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주영 측에서 찾아와 설득을 해왔다. 동교동계에서도 물밑 접촉이 들어왔다. DJ측 한광옥과 장경우는 12대 국회부터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종찬의 마음은 정주영에게 기울었다. 정주영이 직접 이종찬과 만나면서 결정됐다. 

1992년 12월 13일 이종찬은 후보직에서 물러나 정주영 국민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대선 구도는 김영삼 vs 김대중 vs 정주영 3파전으로 굳어졌다. 

5일 후 투표 날이 다가왔다. 대통령은 YS가 됐다. 

“이걸 말해도 되나?”
고개를 갸웃했다.

- 뭡니까. 

“얼마 있다가 공안부에서 부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제일 먼저 내가 불려갔어.”

정치자금 관련 이종찬과 함께 조사를 받았다. 말인즉 표적수사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종찬 씨가 학을 뗀 것 같아. 그길로 영국을 간 거예요.”

훗날 DJ와 만나 민주당에서 함께하게 된 계기였다. 장경우도 이런 계기로 민주당에 들어갔고, 경기지사 후보까지 됐던 과정들을 거쳐 온 것으로 보였다. DJ가 새정치국민연합을 만들면서 기존의 민주당은 확연히 쪼그라들고 말았다. 

 

다시 신한국당으로 


민주당의 이기택과 장경우는 조순 대선후보를 영입했다. 사진은 오른쪽부터 이기택, 장경우 전대열, 조순, 강창성, 이규정, 권오을 의원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민주당의 이기택과 장경우는 조순 대선후보를 영입했다. 사진은 조순(가운데) 후보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이기택, 장경우 전대열, 왼쪽은 강창성, 이규정, 권오을 의원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 우여곡절 끝에 15대 대선을 앞두고는 신한국당과 합치지 않습니까. 원래 조순 서울시장을 영입해서 대선을 준비하려 했던 것 같은데 왜 잘 안 됐던 겁니까. 

“우리(이기택과 장경우)는 조순 씨가 대통령 후보가 될 거로 생각하고 셋이서 만났단 말이오.”

DJ가 분당해 나간 뒤 민주당 총재는 이기택이 여전히 맡았고 장경우는 부총재로 있었다.
 

조순의 대권행
 

1997년 8월 장경우 배석 하에 이기택과 조순이 만났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기택이 물었다. 
“후보와 총재 자리 둘 다 내놓으시죠.”
순간 어이가 없는지 이기택이 조순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 조순 씨. 정치 경험도 없는 분이 성공할 수 있겠어요?” 
“이왕 밀어주는 거 모든 걸 나한테 맡겨 주시죠.”
결국, 이기택이 “알아서 하라”며 구체적 논의는 장경우한테 맡기고 나가버렸다. 

둘이 남은 조순은 장경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장형. 모든 준비가 다 됐으니까 도와주소.”
“돈은 좀 마련됐습니까?”
“내가 다 계획이 있어요.”
하도 자신감 있게 말하길래 그런 줄로만 알았다. 홍문표가 사무부총장을 하고 있었을 땐데 며칠 뒤 지구당위원장들을 구성해 대선 출범식 비슷한 것을 열었다. 다들 조순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자택으로 갔다. 내복 차림의 조순이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아니. 왜 그럽니까.”
“대선 자금을 아직 마련하지 못했소.”
그는 자기가 대권 도전만 시사하면 청와대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줄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었다. 

- 왜 그런 생각을 한 겁니까.

“대선후보로 조순 씨가 인기가 올라가자 YS가 보자고 한 것 같아요. 잔뜩 꿈을 부풀게 해놓은 거예요. 이기택 총재한테 큰소리칠 때만 해도 청와대에서 돈을 다 대줄 것으로 생각한 거예요.”

- 저런.

“나한테 그러는 거야. 청와대에서 돈이 안 온대. 전화해도 받지 않고…. 속으로 이 양반이 너무 순진하구나.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총재님. 청와대에서 돈 안 옵니다. 자금조달 계획을 세우든지, 출마를 포기하든지 양단간에 결정하십시오.’”

이런 찰나에 이인제와 회동하는 일이 생겼다. 

“누가 주선을 했는지 모르지만, 둘이 만나게 된 거예요.”
 

이인제한테 격노하는 조순


“장형, 같이 좀 갑시다.”
“어디에요?”
“63빌딩에서 이인제와 만나기로 했어요.”
가보니 이인제를 지원하고 있던 유성환 등도 나와 있었다. 
한참 얘기가 된 줄 알았는데 들어간 지 15분 만에 조순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아니, 왜 갑자기 나왔습니까.”
물었지만 답도 없었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첫마디가 “괘씸한 놈”이었다. 

이야긴 즉 이인제가 단일화 논의를 하기도 전에 자신으로 대선후보가 결정된 것처럼 말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회동을 주선한 사람한테 그리 듣고는 성급히 발언한 것이 조순의 심기를 건드리는 원인이 된 듯했다.
조순 입장에서는 처음 본 자리에 무례가 없다고 본 거였다.
“내가 들러리란 말이야?…어이가 없어서.”
분이 안 풀리는지 “두 번 다시 안 만납니다.” 씩씩거렸다. 

3당합당 이후 촬영한 사진일 것으로 장경우 의원은 가늠했다. 사진 왼쪽부터 장경우, 박지원, 김덕룡, 이기택, 박계동 의원이 이기택 자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3당합당 이후 촬영한 사진일 것으로 장경우 의원은 가늠했다. 사진 왼쪽부터 장경우, 박지원, 김덕룡, 이기택, 박계동 의원이 이기택 자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 그렇게 해서 대권 행보를 시작하게 됐지만 얼마 못 가 결국, 신한국당과 합치지 않습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다른 캠프로 다 도망가고….”

상황이 불가피했다는 말로 들렸다. 

“하루는 조순 씨가 나보고 ‘롯데호텔에서 얘기나 진하게 하자’고 그래. 갔더니 느닷없이 대선에 안 나가겠다는 거예요.”

청천벽력 같았다. 알고 보니 신한국당 후보인 이회창과 얘기가 오갔던 거였다. 

“불과 며칠 만에 지지 선언을 해버리더라고. 그러면서 이 양반이 총재가 된 거요. 한나라당 당명도 조 총재가 만들었지. 나는 비서실장 맡기고…. 그런데 또 얼마 안 있어 정치를 안 하겠다면서 손든 것 아니오. 그 자리에 묘하게도 이기택 씨가 들어갔고 말요. 나하고도 가까우니 부르더라고.”

다시 이기택과 연이 돼 이회창 대선 캠프에 들어가게 된 이유였다.

-이회창 후보는 왜 떨어졌다고 봅니까. 

“그땐 같은 캠프여도 만나기가 어려웠어요.”

측근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성역화하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하순봉 같은 그룹들이 차단을 많이 시켰던 것 같아. 얘기할 틈이 없었으니까.”

지난 얘기다. 뭐가 정답인지는 모른다. 장경우 본인도 11·13·14대 국회까지 배지를 달았지만, 이후는 당선 운이 없었다. 

- 진작에 YS 쪽으로 왔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허허.” 

웃어넘겼다. 

- 이기택 총재도 차라리 YS 3당합당 때 따라갔더라면 차기 대권 가능성이 더 커졌을 텐데. 3당합당에 가세하려다 불참한 일화도 있었지요. 

“자꾸 결과론을 갖고 이야기하는데… 그때 이기택 씨는 YS가 3당합당 한들 대선후보가 될 수 있었겠냐며 승산이 없다고 봐서 그랬던 거요. 민정당계에 비하면 민주계 지분도 적지 않았소.”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법이다. 
YS는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민주화 인사 중 가장 먼저 대통령이 됐다. 또 그 덕분에 군정은 종식됐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으며 민주화 제도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 대세란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YS가 대통령 된 것은 커다란 시대 흐름의 당위론적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민정당계였던 허주 김윤환이 YS 편에 선 것도 그런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가 어디로 흐를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이어 뭔가가 생각났는지, 

“하루는 느닷없이 YS가 나를 보자고 하더라고.”

14대 대선 때였다.
 

장경우한테 조언하는 YS


“3당합당 시절 똑똑하고 헌신적으로 일해서 내 눈여겨보고 있었소.”
YS는 이 말부터 한 뒤 자유당 시절 얘기를 꺼냈다. 

“내가 그때부터 정치를 쭉 해왔지 않소. 아무리 똑똑해도 큰 흐름을 못 잡으면 천하없어도 안 되는 법이오. 비주류에 있다가 성공 못하고 사라지고 마는 인사들이 많았지. 주류의 역할이란 게 있어요. 그 안으로 들어와야 해요. 안 그러면 어렵고 힘들어요.” 

자신을 생각해주는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후회되냐고 묻자,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때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정도라고 생각한 건데…. 말하자면 오만했던 거지.” 물끄러미 생각에 잠기다 시인하듯 읊조렸다. 인터뷰 내내 어딘지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그였다. 인정하기도 싫고, 안 할 수도 없는 내적 갈등이 읽혔다. 
 

장경우 전 의원은 정치는 허업이라고 말한 김종필(JP) 전 총재의 말을 떠올렸다. 사진은 행사장에 참석한 JP와 장경우 전 의원이 한 수녀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장경우 전 의원은 정치는 허업이라고 말한 김종필(JP) 전 총재의 말을 떠올렸다. 사진은 행사장에 참석한 JP와 장경우 전 의원이 한 수녀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JP가 정치는 허업이라고 했잖소.”

돌아보니 그 말이 와닿는다고 했다. 그래도 끝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정치라는 게 나보다 사회, 사회보다는 국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지금도 나는 내가 내린 결론들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아요.” 

어쨌거나 ‘유불리에 따라 셈하고 살지 않았다.’ 그것을 지킨 데서 오는 자부심이 컸다. 
 

한국캠핑캐러바닝총연맹 총재를 맡고 있는 장경우 전 의원은 30여 년 가까이 ‘차박 문화’ 개척에 앞장서고 있다. 2002년 동해 망상, 2008년 경기도 가평, 2015년 전북 완주에 이어 오는 2024년 강원도 고성 청소년수련원에서 제94회 ‘세계캠핑캐라바닝대회’를 앞두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한국캠핑캐러바닝총연맹 총재를 맡고 있는 장경우 전 의원은 30여 년 가까이 ‘차박 문화’ 개척에 앞장서고 있다. 2002년 동해 망상, 2008년 경기도 가평, 2015년 전북 완주에 이어 오는 2024년 강원도 고성 청소년수련원에서 제94회 ‘세계캠핑캐라바닝대회’를 앞두고 있다.ⓒ사진제공=장경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현재 한국캠핑캐러바닝총연맹 총재를 역임하고 있다. 국회 청원심사소위원장 시절 민원 해결에 나선 것을 계기로 세계적 캠핑 문화에 눈뜬 것이 인연이 됐다. 1994년 한국연맹을 창설한 이래 햇수로만 30여 년 가까이 ‘차박 문화’ 개척에 앞장서고 있다.

지금이야 대중적 트렌드가 됐지만 캠핑차에 대한 국내 인식이 전무 할 무렵인 2002년 이미 동해 망상에 세계대회를 유치했다. ‘세계캠핑캐라바닝연맹(FICC)’을 설득한 끝에 얻은 성과였다. 이후 2008년 경기도 가평, 2015년 전북 완주에 이어 오는 2024년 강원도 고성 청소년수련원에서 제94회 ‘세계캠핑캐라바닝대회’를 앞두고 있다.

과거 정주영은 500마리의 소 떼를 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땅을 밟았다. 평화사절단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다. 그도 언젠가는 캐러반 차들을 앞세워 한반도의 봄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는 게 꿈이다. 

그럴 날이 올까? 다른 건 몰라도 우직하고 고집스러운 소처럼 불평불만 없이 최선을 다할 것 같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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