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은 지고 수국은 피고 [일상스케치(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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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은 지고 수국은 피고 [일상스케치(85)]
  • 정명화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7.02 1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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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을 보내고 서글픔도 잠시
수국의 위로에 새 힘을 얻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초라해진 모란의 영광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우산을 받쳐 들고 시골집 마당을 한 바퀴 돌다 시선이 멈췄다. 모란은 이미 지고 없는데 난 왜 철 지난 모란에 관심이 갔을까. 그건 더위에 타들어 간 잎만 남은 채,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  서있는 행색이 무척이나 초라하고 애처로워 보여서다.

모란은 자태가 기품이 있고 화려해 부귀화라 불리기도 한다. ⓒ연합뉴스
모란은 자태가 기품이 있고 화려해 부귀화라 불리기도 한다. ⓒ연합뉴스

모란이 누구인가. 화중화, 즉 꽃 중의 왕이지 않나. 그 자태가 기품이 있고 화려해 모란은 예로부터 부귀와 명예를 나타낸다 하여 부귀화(富貴花)라 불렸다. 그러니 한 시대를 풍미한 권력가 같은 거물이다.

이에 반해 지금, 과거의 화려한 위세는 어디로 갔는지. 그 말로는 앙상한 허울만 남은 듯해 존재감을 잃은 모란이 안타깝다.

그렇게 모란이 지고 나의 봄날도 가고. 인생도 마찬가지다. 천하 미모의 양귀비도 세월을 이길 수 없다. 그래도 모란은 내년을 기약할 수 있으련만 인생은 한번 가면 다신 오질 않기에 허망함과 아쉬움이 진하다.

미물마저 생명은 소중한 것

나는 모란에 마음의 빚이 있다. 어린 시절 탐스럽게 핀 한 송이 모란을 거침없이 뚝 꺾은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 눈에 꽃이 어찌나 크고 예쁘던지 생각해 보면 상당히 도발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는 화단에 핀 꽃을 꺾어다 화병에 꽂는 재미에 맛들어 있었다.

그러나 고이 두고 보는 기쁨을 몰랐던 철부지였던지라, 참 매정한 어린 소녀였다는…. 그때의 미안함이 내 마음속 깊이 서려있다.

지금은 꽃잎 한 떨기도 부서질세라 애지중지, 묵묵히 바라보다 지는 모습이 애달파 가슴 시리다. 오래 살아 보니 생명의 소중함을 알아차린 후라 그런지 미안함에 더 애틋한 건지 모르겠다.

이토록 꽃 한 송이도 귀한 걸  어찌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중생들이 있을까. 인간의 본성은 그토록 악한 건가 하며 그 잔인함에 여름 밤 잠을 설친다.

여름날의 구세주, 수국

수국의 한자 이름은 수구화(繡毬花)인데,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란 의미다. ⓒ연합뉴스
수국의 한자 이름은 수구화(繡毬花)인데,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란 의미다. ⓒ연합뉴스

장맛비가 쏟아지더니 무더운 날씨와 교대로 하늘을 차지한다. 하늘 도화지는 푸르다 회색빛이었다 변화무쌍한 그림을 그려낸다.

여름은 찌는듯한 더위와 쏟아지는 비의 양대 산맥으로 나에겐 썩 유쾌하지 않은 계절이다. 더위에 맥을 놓고 있을 때 두둥 수국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후덥지근한 날씨에 한줄기 소나기 같은 청량감을 주는 존재로 수국만한 꽃이 없다. 지치지 않고 소담스러운 꽃을 피워낸 수국을 보니 어찌나 반가운 지.

수국의 한자 이름은 수구화(繡毬花)인데,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란 의미다. 수구화는 모란처럼 화려한 꽃이 아니라 잔잔하고 편안함을 주는 꽃이다. 꽃 이름은 수구화에서 수국화, 수국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수국은 초여름에서 무더운 여름 중순까지 꽃이 핀다. 꽃 피는 시기가 초여름의 장마철과 겹치는데, 그 이유는 수국이 물을 매우 좋아하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실내에서 키울 때도 꽃을 맺으면 물을 듬뿍 자주 줘야 한다.

꽃들과 동행하며 여름을 나리

무더운 여름에 풍성하고 화려한 꽃잎을 자랑하며 활짝 웃는 수국을 보면 절로 기분이 상쾌해진다.

어린 시절 어느 날 엄마의 화단에 수국이 등장했다. 엄마가 수국 수국 노래를 부르더니 어느샌가 깨끗한 이미지의 수국이 자리를 잡았다. 강렬한 모란의 아름다움도 눈에 꽂혔지만, 구관이 명관 이랬지만, 난 왠지 순수하고 수수해보이는 수국에 더 맘이 갔다.

그렇다. 어릴적 추억을 떠올리며 여름날의 열기를 잊게 해 줄 수국이 있어 외롭지 않다. 또한 세상사에 찌든 헛헛한 마음을 채우고 달래줘 견딜 힘이 생긴다.

이 여름 수국과 동행하리라. 영롱한 수국의 자태는 모란의 슬픔과 일상의 시름을 어루만져 준다. 그러다 수국의 끝자락에 가면 울 밑에선 봉숭아가 피겠지. 이어 백일홍과 채송화도 함께….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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