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보복 소비라는 표현은 코로나19 사태가 잠잠해질 무렵부터 널리 쓰였다. 방역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의 개인에 대한 억압이 정당화됐던 시기 억눌렸던 소비심리가 일상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폭발해 한꺼번에 분출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의 특징은 평범한 생필품이나 식료품이 아니라 사치품, 기호품 등 값이 비싸고 희소성이 높은 상품의 수요가 높다는 것이다. 소비보다는 스트레스와 욕구 불만 해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보복 소비의 본래 의미도 이와 비슷하다. 팬데믹 전까지 보복 소비는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보일 때 과소비로 보복하기 위해 사치품 등을 마구 사들이는 행위를 뜻하는 용어(revenge spending)였다고 한다. 사람에 대한 불만을 돈을 쓰며 푸는 것이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던 기자 생활 초창기 필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 재벌 대기업을 향한 불만을 소비로 해소했다.
2016년 20대 총선을 뛰고 정치부에서 산업부로 소속을 옮긴 직후의 일이다. 지금이야 건설·부동산 분야에 본적을 두고 있지만 그땐 달랐다. 규모가 작은 매체이다 보니, 소수의 인원이 전(全)산업군을 커버해야 했다. 건설사는 물론, 유통, IT, 생활가전, 그리고 뷰티 기업까지 담당했다. 정신이 없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그해 한 대형 IT업체인 A사(社)에서 출시한 스마트기기가 배터리 문제로 폭발(발화)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 스마트기기를 사용한 누리꾼이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 같은 내용의 글을 게시했고, 이게 필자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해당 업체에 즉각 문의를 넣었는데 "기기를 분석하는 데에 일정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전까진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A사 관계자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후 폭발 의혹을 제기한 소비자가 '블랙컨슈머'로 의심되는 정황이 있다면서 기사를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문제가 된 스마트기기는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사용하는 제품이었다. 빠른 보도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2차, 3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 기사를 작성하고 편집국에 승인을 요청했다. 이 사건의 최초 보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매체 기자들도 이미 이 사건을 인지하고 윗선의 기사 승인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후속 보도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이후 국내외에서 비슷한 사건이 속출하자 A사는 문제가 된 스마트기기의 사용 중지를 공식 권고하고, 전량 리콜 조치를 발표했다. 사람이 하는 일엔 결함과 불량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결함·불량을 인정하고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스스로 개선책을 내놓는 건 참으로 어렵고도 훌륭한 일이다. 분명 박수를 보낼 만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교환된 제품에서도 폭발로 의심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국내 교환 제품 첫 폭발 의심 사례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A사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품을 분석한 후 입장을 밝힐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하면서 해당 소비자의 행태가 '블랙컨슈머' 같다면서 미보도를 요청했다. 그래선 안 됐는데,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을 때였다. 오프 더 레코드를 무시하고 소비자를 블랙컨슈머로 보고 있다는 그의 말을 기사에 그대로 인용했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전화가 왔다. 오프 더 레코드인 걸 알고 있지만 공익적 측면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여 보도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A사 관계자는 '법무팀', '소송' 등을 들먹였고, 급기야는 "이 바닥에서 계속 일하고 싶으면 그러면 안 된다"는 말까지 했다. 7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또다시, 그래선 안 됐는데,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을 때였다. 문제를 제기한 부분을 기사에서 삭제했다. 교환품 폭발 사고는 미국 등 해외에서도 발생했고, 그제야 해당 업체는 당시 박근혜 정부의 권고를 수용해 제품 판매·교환을 중단했다.
슬럼프에 빠졌다. 산업부로 이동한 후 1년도 되지 않아 대형 출입처로부터 들은 '이 바닥' 발언에 혼자 사무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었는가'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슬럼프였지만 시련이지, 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것, 어떻게든 돌파해내는 것 뿐이었다. 보복 소비를 돌파의 시발점으로 택했다. 기존 사용하던 스마트기기를 폐기 처분하고, 당시 경쟁사가 내놓은 최신 제품인 'V○○'을 구매한 것이다. 10만 원만 넘어도 벌벌 떠는 성격임에도, 그땐 100만 원 가까운 돈을 할부 없이 전액 현금으로 지불했다. 자가진단에 따른 일종의 심리 치료였는데, 스마트기기를 자주 사용하는 일을 하다 보니 효과가 꽤 좋았다. 현재는 다시 A사의 스마트기기를 쓰고 있다. 경쟁사가 관련 사업에서 아예 철수하기도 했지만, 그 스마트기기는 A사만큼 잘 만드는 곳이 없다.
유럽 순방 중인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인 김건희 여사의 해외 명품 쇼핑 의혹이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리투아니아 매체인 〈15min〉(Žmonės.lt)은 지난 11일(현지시각) 김 여사가 수행원 16명과 함께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 소재 명품 편집숍인 'Du broliai'를 예고 없이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가 인용한 Du broliai 관계자에 따르면 김 여사는 매장을 단순히 둘러본 게 아니라 쇼핑을 즐겼으며, 다른 날에도 수행원들이 이 매장을 찾아 추가 물품을 구매했다. Du broliai는 '럭셔리 패션 부티크'로 소개돼 있다. 실제로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해당 매장은 해외 명품 브랜드를 주로 판매하고 있으며 옷, 신발, 가방 등 상품 가격이 수백만 원대다. 국민 여론은 좋지 않다. 야권인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물폭탄에 문자폭탄에 출근을 서두르고 있는 서민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기사가 떴다. 해외 나가 명품 쇼핑으로 리투아니아 언론을 타는 부인 이야기다. 후진국도 이런 후진국이 없다"고 지적했다. 여권으로 분류되는 신인규 변호사(정당바로세우기 대표)도 "국민 앞에 에코백으로 소탈함을 보이다가 외국 순방을 나가서 명품백을 사는 모습이 이해가 되나. 점입가경이고 가관"이라고 꼬집었다. 앞서 김 여사는 에코백을 들고 유럽 순방길에 오른 바 있다. 김 여사가 실제로 명품을 구매했는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방문은 했으나 명품을 사진 않았다고 대통령실이 해명하면 거기서 끝이기 때문이다. 관세청에서 어깃장을 놓을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부정적인 여론과는 달리, 필자는 김 여사가 혹시나 만약에 명품을 구매했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치료 목적이라면 말이다. 최근 자신과 가족을 둘러싸고 '서울-양평 고속도로 논란'이 불거지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싸고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인데, 소박한 영부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이를 억누르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직접 경험을 해 봐서 안다. 그런 종류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에 보복 소비만 한 게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 여사가 명품을 구매한 게 사실이라면 왜 하필 다른 나라에서 쇼핑을 즐겼느냐는 것이다.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로 수많은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로 인한 소비 둔화로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기왕이면 국내에서 소비해야 내수 시장에 조금이라도 더 돈이 돌고, 조금이나마 국민들의 시름을 덜어줬을 텐데, 이 부분이 참으로 아쉽다.
아울러 보복 소비에 따른 치료 효과를 본 사람으로서 하나 조언할 게 있다. '코로나19 기간에 경험한 생활 스트레스와 보상소비성향 간의 관계에서 내현적 자기애의 조절효과'(2022년, 한국웰니스학회지)에 따르면 충족되지 못한 욕구나 스트레스를 소비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행위인 보상소비는 내현적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에게 주로 목격되는 성향이다. 내현적 자기애의 특성은 대인관계에서의 불편감이 크고, 내재된 공격성이 높으며, 자기 비판적이어서 타인의 반응에 과민하고 쉽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성향의 사람들은 보복 소비를 부적절하게 반복하다 보면 더 큰 우울감에 빠지게 되고, 더 쉽게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또한 자칫 쇼핑 중독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하니, 보복 소비가 고착화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방과후활동'은 기자의 과거 취재기를 통해 현재 이슈를 바라보는 기자칼럼이자 회고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