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랑이 나의 산신령님 [이순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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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랑이 나의 산신령님 [이순자의 하루]  
  • 이순자 자유기고가
  • 승인 2024.03.2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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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순자 자유기고가]

오래전 설공주에 살던 때의 얘기다. 당시 나는 신비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일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년이 지났을 때 겪었다. 

일찍이 41세에 상처하시고 홀아비가 되어 전처 자식들 돌보느라 새로 재혼한 부인한테 이혼까지 당해야 했던 가엾은 아버지! 아버지는 유독 자식 사랑이 지극하여 고향 동네에서는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다. 애처가로도 널리 알려질 만큼 돌아가신 친정 엄마를 아끼셨는데 그 예로 들자면 이러했다.

아버지는 삼형제 중 막내였는데, 할아버지는 유독 막내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가장 예뻐하셨다. 문제는 아버지한테 아들이 얼른 생기지 않고 딸만 내리 다섯을 낳았다는 것이다.

원주로 시집간 언니는 둘째 딸이고 나는 셋째로 태어났다. 엄마는 첫째 딸은 3살 나이에 관격(급체)에 걸려서 죽었다고 했다. 내 밑의 넷째 딸은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피란 나갔다가 잃어버렸다. 넷째 딸의 나이 불과 네 살이었다. 다섯째 딸은 피란 나갔다가 집으로 귀향한 해에 큰댁 뒤꼍에 있는 먹는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결국 딸 다섯을 낳고 겨우 두 명만 건진 것이다. 

할아버지는 난리가 났다. 조석으로 아버지를 사랑방으로 불러 소실(첩)을 두라고 호령하셨다. 내가 태어난 해까지 할아버지 댁에서 함께 살았다는데 그 와중에 엄마의 괴로움은 어떠했을까 싶다.

내가 태어나고 할아버지는 사랑방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텃밭에 우리집을 새로 지어주셨다. 아침마다 일찍이 나오셔서 아버지를 꿇어 앉혀 놓으시고는 “근두야! 소실(첩) 둬라!” 라고 큰 소리로 호령하시는 것이었다. 내 밑으로 또 딸을 두 명이나 더 낳았으니 할아버지는 노발대발이셨다.
 
“팔자에 없는 아들이 소실을 둔다고 나오나요?”

아버지는 꿇어 앉은 채로 나지막하게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지금도 그 목소리가 다 기억난다. 그럴라치면 할아버지는 “어흠~그놈 고얀놈~~!” 하면서 후다닥 하고 일어나서 나가시곤 했다.

그러다가 천우조화로 엄마는 내 나이 12세 때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온 동네가 떠들썩했고 심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면 전체에까지 소문이 났다. 그건 대단한 경사였다. 남동생 백일잔치는 아주 거대한 잔치가 됐다.

사실 돌아가신 엄마는 첫째 딸을 낳고 시아버지의 시집살이를 피해 몰래몰래 시어머님과 짜고 구적골 약수터에 있는 보살 할머님의 법당으로 치성을 드리러 다녔다고 한다.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이렇게 두 번 칠성당에서 치성을 드렸다.

나도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물탕(구적골을 그렇게 불렀음)에 몇 번 간적이 있었다. 그 물탕은 검은색 바위가 벽처럼 생긴 곳에서 물이 샘솟았다. 그 물로 밥을 지으면 파르스름하게 푸른색이 감도는 신비한 밥이 되었고 촛불을 켜두면 아늑해서 꺼지지 않았다.

그 약수가 얼마나 영험했던지 물탕에 얽힌 전설도 많았고, 신비한 일도 많이 겪는다고 했다. 벽처럼 생긴 바위는 타원형으로 둥글게 생겨서는 마치 병풍을 둘러쳐놓은 듯했다. 물이 샘솟는 곳에는 이끼가 새파랗게 가지런히 나았었고 아래에는 작은 우물 세 개가 있었는데 상탕, 중탕, 하탕이었다.

물론 그곳에는 산신령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화인데 한국전쟁인 6.25 사변 때 우리 엄마가 치성들이던 절이 폭격을 맞아서 불타 없어진 적이 있었다. 

보살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는지 실종되셨고, 물탕만 남아있을 때에 웬 또 다른 보살 할머니 한 분이 그곳에다 오막살이로 절을 짓고 법당을 차려 놓았다. 그러나, 매일 밤 호랑이가 지붕 위에 모래를 우수수 우수수 뿌려대고 심지어는 며느리가 출산을 하는 데 태아가 다리가 먼저 나오는 등 너무 기괴한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결국 외지에서 온 그 보살 할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쫓겨서는 아랫동네로 내려오고 말았다. 이미 그 얘기는 동네 전체가 다 아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엄마는 이상하게 원래 살고 계시던 물탕 할머니가 실종되신 후부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는 그만, 가지를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엄마가 그 물탕에 10년은 치성을 한 결과인지 아들을 점지해 주신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이 때문이라도 엄마는 차선책으로나마 물탕에 쫓겨 내려와 동네 가라붓골(골이름)에다 오막살이를 짓고 법당을 차려 놓은 보살 댁에 가서라도 치성을 드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유교적인 아버지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가 일찌감치 물탕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친할머니가 인정이 많으시고 며느리 사랑이 깊으셨기 때문이었다. 모든 뒷배를 챙겨주신 덕이지만 이제 세간을 나와 독립된 가정경제 환경 속에서는 아버지의 허락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늘 엄마는 아버지가 이 보살님 댁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시어 항상 그 말씀을 되뇌곤 했다. 만약 엄마 말씀처럼 아버지가 물탕을 다니게 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들을 낳고 4년 뒤 또다시 아들을 낳다가 아이도 잃고 산후병으로 돌아가시지 않게 됐을는지 모른다. 훗날 나는 이 질문을 여러 번 해보곤 했다. 

사실 엄마는 산신령님과 인연이 깊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인연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도 엄마가 물탕에 치성 들이러 가실 때에 몇 번 쫓아갔었으니 구면이 아닐 것이다. 

암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년이 지난 그해는 윤달이 낀 해였다. 어느 날 나는 친척과 상의한 끝에 아버지 묘 옆으로 엄마를 모셔올 결심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살고 있는 강천면 공동묘지에 묻혀계신다. 엄마는 양평 고향 마을 뒤편으로 붙어있는‘옹골댁’ 산에 계신다. 14정보 반이나 되는 산이고 원래 그 산은 아버지 산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큰댁에다가 나무해서 때라고 주셨다고 했다. 

이장을 해야 하는 날이 불과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원주 언니한테 전화했더니 돈 삼십만 원을 보내왔다. 언니 말이 엄마 산소는 네가 맡고 아버지 산소는 자기가 맡겠다고 했다.

하지만 일이 생겼다. 그날은 직장도 쉬고 여주 읍내에 나갔다가 오후 4시 30분 버스로 돌아온 뒤였다. 이상하게도 내 발길은 집으로 향하지 않고 엉뚱하게 어느 밭길로 자꾸 가서는 그곳 테두리를 정신없이 맴도는 것이었다. 

잣나무가 빽빽하고 울창하게 들어선 곳까지 갔는데 순간,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아뿔싸 -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잣나무 위에 어느새 어마어마하게 큰 백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서는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입이 어찌나 큰지 우리 집을 다 삼킬 만큼 컸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생시였다. 그 와중에 백호랑이가 하는 말이 “만약에 너의 엄마 산소를 이쪽으로 모셔오면 내가 너의 가족과 이 집 전체를 다 한입에 물어 죽일 것이다” 라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야! 나는 직감적으로 그 백호랑이가 어릴 때 엄마가 치성 드리러 갔던 물탕의 주인인 산신령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신령님 절대로 엄마 산소를 이쪽으로 모셔오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고 우리 집과 우리 식구들을 모두 다 살려주세요.”

나는 이렇듯 얼결에 그 백호랑이에게 빌고 있었다. 그러자 내 발길이 쇠사슬에서 풀려나듯 비로소 의지대로 걸음을 걸을 수 있었고 마음도 진정되었다. 나는 그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아~ 엄마는 산신령님이 보호하고 계시는구나. 사실 따지자면 나와 남편과 아이들 모두를 산신령님께서 돌봐주시고 계시는구나!

이후 방으로 들어가서는 이장하기로 한 모든 것을 취소시켰다. 엄마를 아버지 곁으로 모셔온다는 계획은 모두 없던 일로 되었고 가정에도 평온이 찾아왔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깜짝 놀랐는데, 아버지는 함박 웃으시면서 눈을 감으셨던 것이다. 언젠가 어떤 미륵 절에 갔었을 때 그 절의 미륵 부처님 웃음처럼 활짝 웃고 계셨다. 아버지의 그 웃음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분명 극락세계에 가셨을 것이다. 
 

※ 시민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설공주 살던 때의 경험담이며 글을 쓰는 이순자 씨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사는 78세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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