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대세론… “역사의 흐름과과 연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역대 대선을 돌아본다. 최대 계파를 갖고 있음에도 대선후보를 내지 못하는 경우는 여럿 있어왔다. 14대 대선, 민자당 최대 계파는 민정계였지만, 대선후보는 당내 지분 20%에 불과하던 YS(김영삼)에 돌아갔다. 15대 대선, 최대 계파는 상도동계였지만 이회창 총재가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16대 대선, 동교동계가 최대 계파였지만 비주류인 노무현 경선후보가 본선에 올랐다.
20대 대선에서도 관련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민주당 내 최대 계파는 친문(문재인)이었지만 대선후보는 비문에서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과 본선에서 겨룬 인사는 이재명 후보였다. 그들(최대계파)은 왜 대선후보를 만들지 못했나. 각각의 원인도 다르고 공통점, 다른점도 있을 것이다. 이번엔 YS와의 경쟁에서 밀린 민정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며 나름의 힌트를 찾아본다.
14대 대선 민자당 전대 속으로
1996년 5월 19일 민자당 대선후보가 선출됐다. 카메라 기자들은 셔터를 눌러댔다. 펜 기자들의 손놀림도 바빠졌다. 연단에 올라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사람 쪽으로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이제 막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뽑힌 김영삼(YS) 대표 최고위원이었다.
전당대회에서 66% 득표율을 얻은 YS는 노태우 대통령의 축하를 받으며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뜨겁게 환호하는 당원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엔 여유가 감돌았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대권까지는 9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민자당은 이날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제2차 전당대회를 갖고 대의원들의 무기명비밀투표로 대통령후보 선거를 실시, 재적대의원(6천8백82명)과 반수의 찬성을 얻은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을 대통령후보로 확정, 공고했다. 이날 대회에는 오전 10시까지 6천7백13명의 대의원이 참석했으며 경선 거부 선언을 한 이종찬 후보와 일부 지지세력이 불참했다.
김 대표는 후보직 수락연설에서 앞으로 여권의 결속을 강화해 연말의 대통령선거에서 승리, 정권재창출을 이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중략) 이종찬 후보의 경선 거부로 헌정사상 첫 집권당 내 자유경선이 무산된 가운데 개최된 이날 전당대회에서는 대통령 후보 선출 투표에 앞서 새 총재에 노태우 현 총재, 최고위원에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현 최고위원을 만장일치로 재추대했다. 노 총재는 대통령후보 선거 결과가 나온뒤 김영삼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에 재지명했다. 노 총재는 늦어도 정기국회 이전에는 김 후보에게 이양, 당무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할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5월 19일 <동아일보> 기사 중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민정계를 대표해 나온 이종찬 후보가 전당대회에 불참했음에도 그의 이름에 투표한 비율이 33%나 되는 것에 주목했다. YS를 향한, 생각보다 많은 반란표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반YS계를 중심으로 집단 탈당도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관측했다.
앞서 민정계 중 반YS 노선을 탔던 인사들은 새정치모임을 구성하고 이종찬 후보를 대선후보로 내세웠다. 박태준, 박준병, 박철언, 이한동, 심명보, 양창식 등 17명의 의원들로 이뤄진 모임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돼 반YS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다.
전당대회가 끝난 뒤 기자들은 YS를 에워쌌다. 누군가는 ‘혼자만 나왔음에도 66%밖에 얻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YS는 “66% 지지율에 대단히 만족한다”고 받아쳤다. 그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66%정도면 대단히 많은 표를 얻은 것”이라며 긍정적인 점을 부각했다. 또, “압도적 지지보다 과반수를 얻는 것이 민주주의 정도이며 멋이라고 생각한다”며 오히려 한 수 가르쳐 줄 것처럼 응수했다.
어느 기자는 소수 계파인 민주계에서 대선후보가 나오면서 계파 갈등이 더 불거질 수 있다고 보고 이를 불식하기 위한 복안을 물어왔다. YS는 “이제 이 순간부터 당내 계파는 없고, 오직 민자당 하나만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나 또한 오직 나라와 당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차원에서만 생각하겠다”는 점을 어필했다.
한 기자는 경선을 보이콧한 이종찬 후보를 만날 의향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YS는 “민자당이 하나 되는 길이라면 누구와도 만나겠다”고 호언했다. 그만큼 수습이 필요한 상황임이 엿보인다.
YS 판이었다고 본 이유는?
당시 민정계 이종찬 후보는 왜 경선을 거부했을까. ‘이종찬의 민자당 결선 불참 선언’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민자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이종찬 의원은 17일 출마 포기와 함께 대통령 후보 경선 거부를 선언했다. 이 후보는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상상을 뛰어넘는 외압으로 자유경선의 정신이 본질적으로 훼손된 상황에서는 이 길만이 나라와 우리 당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당원 동지들의 뜻을 받드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선 거부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또 ‘5월 19일 자유경선의 본질을 훼손하며 강행되는 전당대회는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선언한다’면서…(후략)”
- 1992년 5월 16일 <한겨레> 기사 중
그는 “불공정 경선”을 주장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당에서 편파적으로 YS를 밀어주고 있다고 보고, 들러리를 서고 싶지 않다는 불만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경선 체제로 돌입하자마자 이게 무슨 경선인가 싶었다. 한 예를 들어, 부산 경남의 대의원 수가 990명인데, 실제로 대회가 열리는 극장엘 가봤더니 딱 30명이 모여 있을 뿐이었다. 대회가 있는 극장에는 간판도 달아주지 않고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한 번은 강원도 강릉에서 대회가 있을 때였다. YS가 갔을 때는 대의원의 97퍼센트가 출석을 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반수 정도가 왔다. 게다가 김문기 도당위원장은 아예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이런 불공정 경선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를 두고 상당히 고민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마음을 정해놓고 경선이라는 연극을 통해 YS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연극에 조연 정도로 취급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참다못해 아내가 김옥숙 여사를 찾아갔다. …(중략) 김옥숙 여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정하고 중립입니다. 김윤환 총장이 자꾸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서, 마치 김영삼 씨를 지명해 놓고 연극을 하는 것처럼 말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종찬 의원도 노태우 대통령의 이름을 팔아도 좋아요’….”
- 이종찬, MBC 라디오 증언록 <이제는 말한다> 중
노태우 대통령 측은 중립이라고 일축했다. 상도동계 등 YS 민주계 입장은 또 달랐다. 노 대통령과 민정계 주류가 호시탐탐 내각제를 유도하려 했다고 봤다. 내각제 각서 유출 파동, 안기부 감찰 등을 들며 조직적으로 YS를 방해했다고 보고 있다. YS는 정면 돌파하며 더욱 가열하게 투쟁했다.
“민자당의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이 31일 노태우 대통령과 당내 민정, 공화계에 맞서 내각제 개헌 반대와 즉각적인 포기 선언을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내각제 합의문 유출로 증폭되기 시작한 민자당 내분은 분당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다. 김 대표는 전격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내각제 개헌 반대 투쟁의사를 분명히 하며 개헌추진파인 당내 민정공화계가 확실한 개헌포기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당무집행을 계속 거부하겠다고 말하고 이날 낮 경남 마산으로 내려갔다….”
-1990년 10월 31일 <동아일보> 중
비민주계였던 이만섭 의원 또한, 당시 노 대통령은 YS가 대선후보로 나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고 한 바 있다. 이에 자신이 YS밖에 대안이 없다고 설득했다는 것이 그의 증언.
“내가 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날짜는 1992년 4월 8일이었다. 그날 오후 3시 반부터 5시 반까지 약 두 시간가량 대통령과 여러 현안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특히 대통령 후보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 만남은 노태우 대통령 측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이뤄졌는데,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후보를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데 굉장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로 봐서는 김영삼 대표 이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고 노태우 대통령을 설득했다. 대략 두 시간 동안 이같은 설득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대통령의 감정으로는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안 된다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뚜렷한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 두 시간의 만남 끝에 노 대통령의 마음이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쪽으로 굳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만나고 난 그날 저녁, 김종필 최고위원과 저녁만찬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때 노심이 YS 쪽에 있다는 것을 JP에게 내비쳤을 것이다.”
- 이만섭, MBC 라디오 증언록 <이제는 말한다> 중
반면에 노태우 대통령을 보좌한 손주환 정무수석은 ‘노심은 3당합당 초기부터 이미 YS에 있었다’고 전했다. 진짜 ‘노심’이 무엇이었을지, 그 변화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층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반대세력인 이종찬 후보가 중도 포기할 정도로 YS가 전체적인 판의 헤게모니를 쥐면서 입지를 굳혀가는 데 결국 성공했다는 점이다. 똘똘 뭉친 민주계와 함께 투쟁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든 요인도 있겠다. 특유의 친화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당내 최대 계파인 민정계 내 많은 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삼으로 빠르게 잠식해갔다고 전해진다.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당에 들어오자마자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기 시작해 민정계 쪽을 급속하게 흡수했다. 당시만 해도 김영삼 대표를 만나고 온 사람은 ‘내가 저분을 위해서 뭔가를 해줘야겠다. 나는 저분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YS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상도동에 다녀오면 YS는 동양화의 여백처럼 느껴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박희태, MBC 라디오 증언록 <이제는 말한다> 중
민정계인 이만섭 의원이 YS를 밀고, 김윤환 전 사무총장이 YS를 지지하며 신민주계를 형성해갔듯 말이다. 김 전 사무총장은 YS를 지지한 대표적 신민주계로 꼽힌다. 언론에서는 YS 경선 캠프 진영의 선거대책본부장 격이라고 봤다.
“김 대표 진영의 선거대책본부장격인 김윤환 의원과 김 대표의 핵심참모인 최형우 정무장관, 김덕룡 의원 등이 민정계 지구당위원장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지지성명을 받는 형식으로 세력 규합 작업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김 대표 진영에서는 현재까지 30~40명의 민정계 위원장들이 지지 의사를 밝혔다면서….”
- 1992년 4월 3일 <한겨레> 기사 중
역사의 뒤안길이라는 수순
이렇듯 민정계는 당내 숫자가 가장 많았지만 일부는 YS를 지지하는 신민주계로, 또 일부는 반YS모임을 이루며 갈라져갔다. 뚜렷한 대선주자가 없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구심점이 돼줄 만한 인물이 없기에 YS를 중심으로 나뉘었다는 분석이다.
결국 관건은 대세론이라고 볼 수 있다. 대세론이 형성되면 좀처럼 그 방향의 물줄기를 꺾기가 어렵다. 계파 면에서 숫자가 가장 많다 한들 YS 쪽으로 대세론이 굳어져가고 있는 이상 분열되고 이탈되고 흡수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또 그것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도 연결된다는 견해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관련해 지난달 30일 대화에서 “민정계가 YS에 밀린 이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수순에 놓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당시는 “87년 민주화가 됐고 절차적 민주주의 단계를 밟기 시작한 때였다”며 “민정계는 군부 독재 때 탄생된 집단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고 부연했다.
정 평론가는 “그런데 민정계는 13대 대선 당시 양김의 분열로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 이후 어떻게든 역사를 부여잡고 연장하려 했다”며 “정통민주세력인 YS와 합한 것을 발판 삼아 내각제를 하려 한 것도, 이후 이회창을 앞세워 당권을 장악해 대권까지 넘본 것도 모두 그 일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연장하려 한 것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며 “역사의 큰 흐름, 수순, 순리를 거스르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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