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제는 어떻게 도입됐을까 [옛날신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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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제는 어떻게 도입됐을까 [옛날신문보기]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4.07.11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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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이 처음으로 공론화…제12대 총선 이후 전두환이 도입 결정
시행하고 전 업종 적용한 건 노태우…김영삼은 외국인에게로 확대
김대중, 10인 이상→5인 이상→전체 사업장으로 적용범위 넓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2025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앞두고 노사 간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2025년도 최저임금 결정을 앞두고 노사 간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매년 7월은 ‘최저임금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시기다 보니, 모두의 시선이 최저임금위원회로 쏠리기 때문입니다. 매일같이 최저임금 관련 뉴스가 보도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의견을 교환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우리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이 최저임금제가 언제, 어떻게 도입됐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보통 ‘노태우 정권 때인 1988년 처음으로 시행됐다’ 정도로 알고 계신 분이 많을 텐데요. 사실 최저임금제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떡 하니 던져준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과 정치적 상황이 결합된 결과물이었죠.

처음 최저임금 이야기가 공론화된 건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였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까지 연평균 5.4%가량의 경제성장률(한국은행 기준)을 기록하던 우리나라는 1963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된 후 4년간 연평균 9.5%에 달하는 고성장을 이뤄냅니다.

그러나 근로자들은 경제 성장의 과실을 맛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해 생활수준이 악화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임금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인건비 지출을 줄여 수출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정책 기조의 한계였죠.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기사 한 토막 살펴보겠습니다.

한국노총산하 생산종업원과 사무종업원의 노동임금이 생계비지수에 훨씬 뒤떨어지고 기어오르는 각종 물가에 따라 최저임금의 확보가 아쉽다.
노총집계에 의하면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나라의 직원급 임금은 65년 1만283원에서 1만3166원으로, 중노동급 임금은 7013원에서 7447원으로 상승됐으나 평균생계비 기준(5인 가족) 1만7036원에 비해 훨씬 미달되고 있으며, 더욱이 소비자물가지수가 204.4%이던 것이 11월말 현재 240.9%로 상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실질임금은 75%로 저하됐다는 것이다. (중략)
한국의 노동임금실태에 대해 고대 노동문제연구소 소장 김윤환 교수는 “미국 등 선진국가에서는 물가 인상에 따라 임금 인상이 자동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우리는 최저임금제마저 실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문제 전반에 걸친 과학적 재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노동청 허노정 국장도 “최저임금제가 실시돼야 하며 노동조합은 노사협조에 의한 현실적 임금구조를 이루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하고 있다.

1966년 12월 21일 <경향신문> 박한 임금에 짓눌린 근로자

최저임금제 도입 논의를 처음 정치권으로 끌고 들어온 건 1967년 대선에 나선 윤보선 후보였다. ⓒ연합뉴스
최저임금제 도입 논의를 처음 정치권으로 끌고 들어온 건 1967년 대선에 나선 윤보선 후보였다. ⓒ연합뉴스

정치권, 특히 야당에서 이러한 요구를 대변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1967년 5월 박정희 후보와의 대결을 앞둔 신민당 윤보선 후보는 물가 인상에 따른 실질임금 하락을 지적하며 최저임금제 도입을 공약합니다.

(전략) 도시 대중의 생활 대책에 관해 언급한 신민당 윤보선 대통령 후보는 “집권하면 현재 연 20%씩 오르고 있는 소비자 물가를 연 10%로 억제하겠으며 최저임금제도를 마련해 봉급자나 노동자의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유진오 당수는 개회사를 통해 “국민의 여망에 따라 기적보다 어려운 야당 통합이 이뤄졌으므로 이번 기회에 합헌적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해 후손에 자랑스런 유산을 남겨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밖에 이날 강연에는 장준하·박기출 씨 등이 연사로 나와 현 정권의 비정과 정부여당에 의한 부정선거의 사례를 신랄히 규탄했다.

1967년 4월 22일 <경향신문> 양 후보는 부르짖는다

1967년 대선의 승자는 박정희였습니다. 그러나 윤보선이 주장했던 최저임금제 도입 주장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윤보선의 공약이 민심의 호응을 받자, 박정희 정권도 선거가 끝난 직후 최저임금 법제화를 위한 임금실태조사에 나서게 됩니다.

5일 노동청은 명년도에 근로자들의 최저임금제도 입법화를 서두르기로 하고 임금위원회를 구정, 전국의 임금실태조사에 나섰다. 노동청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별, 직종별, 기업규모별, 지역별 임금 격차가 심해 임금의 합리적 최저선 책정이 매우 힘들기 때문에 우선 임금위원회가 전국 규모의 임금실태를 파악키로 한 것이다. (후략)

1967년 12월 5일 <경향신문> 최저임금 법제화

그로부터 2년 후인 1969년에는 1971년이라는 구체적인 도입 시기까지 언급됐습니다.

정부는 노임정책의 기본방향을 최저임금제도로 굳히고 71년도부터 시행하기 위한 기초작업에 나섰다. 정부는 지난 68년 말부터 정부 고위층 및 경제계 일각에서 주창돼 온 생산성임금제가 근로자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으로부터 심한 반발에 부딪히자 생산성임금제의 전 단계인 최저임금제도를 기본노임정책으로 삼고 우리나라 실정에 적합한 전반적이고도 종합적인 임금제도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략)

1969년 4월 28일 <매일경제> 최저임금제 채택

시대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최저임금제가 실업률을 상승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앙일보
시대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최저임금제가 실업률을 상승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앙일보

하지만 최저임금제에 대한 우려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면 임금지불능력이 없는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이 증가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전략) 현행 근로기준법에 최저임금제 실시에 대한 조항이 있는 데도 이 법조항이 오랫동안 실시되지 못한 채 사문화 돼왔던 것은 최저임금의 결정기준을 찾기가 어렵고 그 시행에 따르는 곤란한 부작용들이 예상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략)
최저임금이 저임금산업에서 임금을 올려줘야 하는 기준이 된다면 이것은 기업의 임금부담능력과 직결될 것이다. 임금 인상이 강요된다면 기업에 따라서는 사업의 폐지와 축소를 빚어내 실업을 늘어나게 하는 것도 생길 것이다. 최저임금제의 채택으로 불행히도 이 사태가 일어난다면 근로자를 보호하는 최저임금제의 실시는 바로 실업의 증가라는 근로자의 비참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 (후략)

1970년 12월 14일 <동아일보> 최저임금제의 문제

결국 정부는 1971년 최저임금제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판단을 내리고 1976년 실시를 목표로 다시 기본실태조사에 돌입합니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에서는 최저임금제 도입을 위한 기초조사 실시와 도입 무산이라는 뉴스가 반복해서 흘러나왔습니다. 모든 내용을 살펴보는 건 무의미하니, 신문기사 제목만 가져와봤습니다.

“최저임금제 76년까지 확립” 1972년 7월 15일 <동아일보>
“최저임금제 아직은 일러…산재보험 5인 이상 확대” 1977년 6월 28일 <경향신문>
“81년부터 최저임금제 실시” 1978년 1월 27일 <매일경제> 
“박 총리 최저임금제 일러” 1980년 6월 19일 <매일경제>

그러나 1970년대를 지나는 동안 야당과 노동계, 학계에서는 이미 최저임금제 도입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였습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은 일부 계층에게로 쏠렸고, 이 같은 임금격차 확대는 사회적 갈등의 소지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70년대 후반 축소되는 추세를 보였던 임금격차가 80년 이후에는 개선되는 기미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봉급이 가장 낮은 10%계층 근로자의 82년 중 월 평균임금은 7만6000원으로 봉급이 가장 높은 10%계층에 비해 9분의 1정도인 박봉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4일 한국개발연구원(KDI)는 ‘70년대 우리나라의 임금분포변화’라는 보고서를 통해 임금격차가 76~80년에는 두드러지게 축소됐으나 80년 이후에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략)
현재의 우리나라 임금격차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사회 통념에 비춰보더라도 매우 큰 편이기 때문에 저임 해소는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보고서는 최저임금제를 도입, 법률적으로 뒷받침, 임금격차를 해소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략)

1984년 7월 4일 <동아일보> 임금격차 80년 이후 제자리…최고 9배 차이까지

제12대 총선에서의 신한민주당 돌풍은 최저임금제 도입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평가다. ⓒ시사오늘
제12대 총선에서의 신한민주당 돌풍은 최저임금제 도입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평가다. ⓒ시사오늘

최저임금제 도입은 이 같은 사회적 흐름과 정치적 격변이 만나고서야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1985년 2월 12일. 우리나라에선 제12대 총선이 치러졌는데요. 야당이었던 신한민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함께 최저임금제 실시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습니다.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는 22일 “현행 헌법을 국민이 자유롭게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치풍토 쇄신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즉각 철폐하고 15명에 대한 전면 해금을 단행하라”고 촉구했다. (중략)
이 총재는 “우리는 중소기업의 건전한 육성과 노동자·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해 최저임금제 실시, 농가부채탕감 및 양곡수매가인상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재벌기업의 금융기관 소유 등 경제의 특권적 집중 현상을 해소하는데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1985년 1월 22일 <경향신문> 이 신한민주당 총재 회견…경제집중 해소, 전면해금 촉구

그리고 신한민주당은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방해 속에서도 무려 67석을 얻으며 제1야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민심을 추스르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꺾기 위해 국민복지 증진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연금제와 최저임금제 도입, 의료보험 확대 등이 바로 그것이었죠.

(전략) 조철권 노동부장관은 28일 상오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저임금해소 방안으로 10인 이상 사업체의 경우 취업규칙에 최저임금 10만 원 이상을 명시토록 제도화하고 특히 일부 재벌그룹의 저임금 개선을 유도하겠다고 보고했다.
노동부는 또 올해 저임금실태조사를 실시, 최저임금제 시행기반을 구축하고 학력간·직종간 임금격차 완화, 성과배분방식의 확산, 적정임금인상 등 임금체계의 합리적 개선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4월 말까지 근로자 중산층 육성방안을 확정키로 했다. (후략)

1985년 2월 28일 <경향신문> 최저임금 제도화

제12대 총선 후 1년여가 지난 1986년 1월 28일. 마침내 신문에는 ‘최저임금제 88년 실시’라는 제목이 대문짝만하게 박혔습니다. 다만 전 업종이 아닌, 섬유·신발, 도자기류, 고무제품 등 제조업분야에만 우선 적용하기로 했죠.

정부는 저임금 근로자들의 생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오는 88년부터 최저임금제를 실시키로 했다.
노동부는 28일 최저임금제 실시에 따른 계획 시안을 발표, 올해부터 87년까지 저임금실태를 조사, ‘최저임금법’을 제정하는 등 제도를 완비해 88년부터 최저임금제를 실시키로 확정했다.
노동부는 업종별로 임금의 격차가 심해 일부 노동집약적 업종에서는 임금수준이 근로자의 생계비 수준에도 못 미쳐 최저임금제도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88년부터 최저임금제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중략)
최저임금의 적용범위는 우리나라의 경우 업종별 임금격차가 큰 점을 고려,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낮은 섬유·신발, 도자기류, 고무제품 등 제조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실시하되 지역별 임금격차를 고려해 차등을 두기로 했다. (후략)

1986년 1월 28일 <동아일보> 최저임금제 88년 실시

최저임금제는 여러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도입된 제도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최저임금제는 여러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도입된 제도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러나 1987년 4월. 전두환 정권은 당초 8개 업종으로 제한했던 최저임금제 적용 업종을 32종까지 확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역시 대통령 직선제 요구라는 국민적 바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당근’의 일환이라는 평가가 많죠.

실제로 당시 신문을 보면 최저임금제 확대 실시 기사 옆으로 여당이 1988년 올림픽까지 개헌을 유보했다는 기사와 ‘김대중씨 연금 해제 촉구’라는 제목의 기사가 함께 실려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노동부는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할 예정인 최저임금제의 적용 범위를 당초의 일부 제조업에서 전 제조업·광업·건설업으로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노동부는 11일 이 같은 내용의 최저임금법 시행령안을 마련, 입법예고했다. 최저임금제 적용을 받게 될 제조업·광업·건설업의 전 업종은 산업소분류로 따지면 전체 52개 업종 중 62%인 32개 업종에 해당한다.
또 대상사업장은 전체 10인 이상 사업장 5만8600여 개의 58.4%인 3만4300여 개이며 대상근로자는 전체 385만6000여 명의 70.5%인 272만3000여 명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당초엔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 제조업 중 섬유·신발·의복 등 대표적인 저임금 8개 업종에 국한할 방침이었으나 그럴 경우 최저임금제 시행의 근본 취지에 어긋난다고 판단, 적용대상을 확대키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후략)

1987년 4월 12일 <조선일보> 최저임금제 확대 실시

이렇게 해서 1988년 처음으로 최저임금제가 시행됩니다. 이때부터 언론에 나오는 최저임금 관련 기사는 지금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최저임금 심의 과정에서 사용자 혹은 노동자 측이 퇴장하고, 결정된 후에는 근로자 측은 너무 낮다고 반발하고, 사용자 측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게 똑같죠. 다만 시행 첫 해는 지금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업종별로 최저임금액에 차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내년 1월 1일부터 제조업 전 업종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최저임금제의 최저임금액이 이원화돼 제1그룹(12개 저임금업종)은 월11만1000원, 제2그룹(16개 고임금업종)은 11만7000원으로 결정됐다.
최저임금심의위원회는 24일 상오 전체회의를 열어 내년도에 적용할 최저임금안을 심의한 끝에 이 같이 결정하고 이를 노동부에 제출했다.
최저임금제는 28개 업종을 두 그룹으로 분류, 각각 서로 다른 최저임금을 적용하되 제1그룹에는 식료품·섬유의복·가죽·신발·나무·종이·고무·플라스틱·도자기 및 자기·전기기기·기타제조업 등 12개 상대적 저임금업종이 포함됐다.
또 상대적 고임금업종으로 분류된 제2그룹은 음료품·담배·가구·인쇄출판·산업화학·기타화학·석유정제·석유석탄·유리비금속·철강·비철금속·조립금속·기계·운수장비·정밀기계 등 16개 업종이다. (후략)

1987년 12월 25일 <매일경제> 최저임금 11만원선

그러나 업종별 차등 적용은 1988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다음 해 최저임금액 협상에 나선 노사가 1989년부터 모든 업종에 단일 최저임금을 적용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입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22일 상오 임금수준전문위 제5차 회의를 갖고 제조업·광업·건설업을 업종 구분 없이 단일 최저임금을 마련키로 했다.
이날 회의를 마친 뒤 최저임금심의회 관계자는 “업종별 임금격차를 완화하고 근로자의 기본생계비를 보장하기 위해 전 업종을 단일화한 최저임금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합의했다”고 밝히고 “오는 28일 6차 회의에서 노사 양측으로부터 업종을 단일화한 최저임금안을 제출받아 심의키로 했다”고 말했다.

1988년 9월 23일 <매일경제> 최저임금 업종 단일화

이후 최저임금제의 역사는 ‘적용 범위 확대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목만 간략하게 훑어보겠습니다.

“내년 최저임금제 전 산업 확대” 1989년 7월 22일 <매일경제>
“외국인근로자 임금 최저임금 수준 지급” 1995년 2월 4일 <매일경제>
“5인 이상 업체 최저임금제 적용” 1999년 3월 10일 <동아일보>
“최저임금제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적용” 2000년 6월 20일 <매일경제>

그러니까 최저임금제를 정치권에서 처음 공론화한 건 윤보선, 도입을 결정한 건 전두환, 실제로 도입하고 적용 업종을 전 업종으로 확대한 건 노태우, 외국인 근로자도 최저임금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한 건 김영삼, 10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던 것을 5인 이상 사업장, 전 사업장으로 늘어난 건 김대중인 겁니다. 최저임금제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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