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YS 군정 종식으로 문민정부 완성, 민주주의 확립” [하나회 청산 되짚기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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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우 “YS 군정 종식으로 문민정부 완성, 민주주의 확립” [하나회 청산 되짚기➁]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4.11.12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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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우 전 의전수석비서관(문민정부)
“하나회 청산, 철통보안 속 극비리로 진행”
“군 청산 못했으면 미얀마처럼 됐을 수도”
“군정 종식한 YS 확실히 용기 있는 정치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故김영삼 전 대통령은문민정부 출범 후 전광석화와 같이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평가를 받고 있다.ⓒ시사오늘(그래픽=정세연)
故김영삼 전 대통령은문민정부 출범 후 전광석화와 같이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평가를 받고 있다.ⓒ시사오늘(그래픽=정세연)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러나 만약 5‧16, 12‧12 쿠데타 때 YS(故김영삼 전 대통령)가 통수권자였다면 어땠을까. 쿠데타가 성공이나 할 수 있었을까?

<김영삼 회고록>에 따르면 YS는 탄식했다. 5‧16 당시 내각제 실권자는 장면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그는 5‧16이 났을 때 수녀원으로 숨어버렸다.

12‧12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대선을 차일피일 미뤘고 결국 군부에 빌미를 줬다.

국가의 중차대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YS는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30여 년 군사 정권 동안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이런 그였기에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불과 11일 만에 하나회 군 수뇌부를 전광석화처럼 제거할 수 있었다. 하나회 청산 되짚기는 이 시대 필요한 전설과 같은 영웅의 이야기, 그 작은 단편이다. <편집자 주>


‘하나회 청산 되짚기’ 두 번째는 문민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故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보좌한 김석우 전 의전수석비서관(이하 김석우)의 증언을 통해 바라본다. 

김석우는 194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외무고시 1회 출신으로 주일대사관참사관, 아주국장 등을 역임했다. 이를 거쳐 문민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된 인물.

현재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장,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난달 8일 서울 서대문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YS와의 인연의 시작 


문민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의전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이 본지와 인터뷰하며 YS 하나회 척결 당시를 돌아보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문민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의전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이 본지와 인터뷰하며 YS 하나회 척결 당시를 돌아보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어떤 인연으로 의전비서관에 발탁된 겁니까. 

“일본 동경에서 외교부 주일대사관으로 있던 시절이었어요. 통일민주당 총재로 김영삼 대통령이 방일한 겁니다. 자민당을 비롯해 사회당 민주당 등 정계에서 굉장히 환영해줬지요. 일본에서는 정치-언론계 모두 ‘노태우 대통령 다음은 YS가 될 거다’는 분위기였어요. YS는 일본의 환대에 굉장히 기분 좋고 만족해했어요. 정치 담당이었던 나는 YS 일정을 챙겨줬지요. 그때 도와준 것을 좋게 본 듯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평소 깔끔한 일 처리와 이론 실무에 밝고 협상을 잘한다는 평이 있다. 

- 직접적인 발탁 과정이 궁금합니다. 

“1993년 2월 25일 YS가 대통령에 취임을 하게 되는데 2주일 전쯤인 중순경 연락이 왔어요. YS가 의전비서관을 말씀하시며 청와대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어요.”

김석우 : 의전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YS : 아, 그거 어려울 거 하나도 없어요. 상식, 상식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 이후 수석비서관 제의를 받았음에도 처음엔 안 하려고 했다던데 이유는 뭐였습니까.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의전이 중요할 수 있겠죠. 문고리 권력이니까요. 그러나 민주화가 제대로 된 문민정부에서는 의전이 수석을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김석우는 YS 대통령 초대 비서실장인 박관용과는 지금까지 각별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에 같이 있으면서 두텁게 된 것인지를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분(박관용)은 YS 정부가 해야 될 전체적인 정책 방향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전체 의견들을 통합해 추진해 나가는 역할을 했어요. 그런 점이 대단했습니다.”

어떤 비서실장이었는지를 묻자 들려온 말. 

- YS가 박 실장을 임명한 이유는 뭐였을까요.

“그분은 이기택계로 YS 방계잖아요. 최측근인 DR(김덕룡)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박 실장이 YS 해외 순방을 수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능력을 보고 기용했다고 봐요.”  

1989년 6월 YS는 민자당 최고위원의 신분으로 한국 정치인으로는 처음 모스크바에 방문했다. 크렘린 궁에서 대통령인 고르바초프를 만났다. 국회외교위원이던 박관용이 수행을 하게 됐다. 

그때 마침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인 허담이 소련을 방문했다. 예정에 없던 회담을 하게 됐다. 허담의 요청으로 진행된 거였다. 박관용은 서둘러 남북 현안 관련 답변서를 준비했다.  

허담은 회담을 가진 뒤 YS에게 따로 단둘이 보기를 청했다. 

YS : 다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따로 볼 일은 없다는 듯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YS가 허담과 단둘이 남으려 하지 않은 데에는 정치적 파장을 고려한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 둘만 만남을 가졌을 경우 북측에서 어떻게 대화 내용을 왜곡해 정치적으로 악용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국내외적으로 크게 곤란해질 수 있는 문제였다. 

박관용은 사전에 이런 점을 YS에 조언했다. 

김석우는 당시 상황을 돌이키며 “박 실장이 YS 눈에 든 데에는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전해줬다. 

 

하나회 청산 속으로 


# 1993년 2월 25일 취임 후 

- 3월 3일 YS, 기무사령관 독대 제도 폐지.
- 3월 4일 YS, 군사 독재 상징물인 청와대 주변 안가 철거.
- 3월 5일 YS, 육사 49기 임관식 격려사 중 “잘못된 것 돌려놓겠다.” 
- 3월 7일 YS, 김기수 수행비서실장 통해 권영해 국방부 장관과의 조찬 약속.
- 3월 8일 YS, 오전 7시 30분 권영해와 극비 독대 형식으로 조찬하며 하나회 출신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 전격 해임 지시. 기무사령관의 계급을 중장에서 소장으로 격하시킴. 기무사의 정치 사찰, 정보처 폐지.
- 3월 9일 YS, 비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연합사부사령관을 육군참모총장으로,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기무사령관에, 김재창 대장을 연합사부사령관에 임명.
 

문민정부 시절 YS가 1995년 3월 청와대에서 취임 초부터 의전비서관을 지낸 김석우 의전 수석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연합뉴스
문민정부 시절 YS가 1995년 3월 청와대에서 취임 초부터 의전비서관을 지낸 김석우 의전 수석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연합뉴스

알려진 바로 하나회 척결은 YS와 권영해만 아는 선에서 전광석화처럼 단행됐다. 박관용을 비롯해 청와대 비서진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전언. 

- 진짜 몰랐던 게 맞습니까. 

“네. 굉장히 신경 써서 철통 보안을 했다고 봐요. YS는 야당 지도자일 때부터 일정이 노출돼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어요. 보안에 굉장히 민감한 분이었어요. 하나회 척결이라는 것이 별이 몇십 명 날아가는 일이잖아요.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데 비밀 유지가 제일 중요한 것이죠. YS는 군 생리를 잘 알았어요. 국방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했잖아요. 군에서는 명령 체계가 굉장히 중요해요. 하나회가 도를 넘어 국정을 관여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청와대 내부에서도 군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했어요. 그랬기에 전광석화와 같이 결단하고 집행한 것이죠. 엄청난 작업이었고 국민적 여론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YS 아니면 어느 누구도 불가능했을 거예요.”

- 3월 8일 수석비서관 회의 때 YS가 ‘모두 깜짝 놀랐재?’했다던데 비서진들은 어떤 반응이었나요.

“청와대 내부에서는 YS가 하는 일이니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죠.”

- 본인은 처음 알게 됐을 때 YS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확실히 용기 있는 지도자.” 

- 박관용 실장은 대통령의 군 개혁 구상을 사전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취지로 언론을 통해 밝힌 바는 있던 것 같은데 맞는지요. 

“구체적 일정은 몰라도 군 개혁 구상은 파악했다고 봅니다. 하나회 전횡에 대한 국민적 반감 여론이 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다만 박관용 실장과 김진영 육참총장은 정구영 허삼수와 마찬가지로 부산중학교 동기동창이잖아요. YS도 그런 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어요. 박 실장을 관여시키긴 어렵다고 판단했겠죠.” 

- YS가 취임하면서 하나회 인사인 김진영 총장의 능력을 칭찬했다고 하던데요. 내심 승진을 기대할 만한 분위기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런 만큼 김 총장 입장에서는 막상 전격 해임되니 매우 당황했을 거로 봅니다. 해임된 이후 직접적 반발의 목소리가 들려오거나 하는 것은 없었나요. 

“그분이 대단했던 것은 맞지요. 군 지휘관으로서의 풍모가 아주 대단했어요. 그러나 거역이랄까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 YS가 전광석화처럼 단행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미얀마 사태 보면 제대로 통제가 안 되니까 계속해서 쿠데타가 나잖아요. 하나회를 척결해 군정을 종식하지 못하면 민주화가 안 된다고 본 것이죠.”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연장선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 실무진들과 편안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시사오늘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 실무진들과 편안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시사오늘

YS 군 개혁은 이뿐 아니었다.  

#같은 해

- 4월 2일 YS, 하나회 출신 수방사와 특전사 사령관 전격 교체. 하나회 출신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 보직 해임. 비하나회 출신 도일규 한미연합사 부참모장과 장창규 육본 동원참모본부장을 소장에서 중진으로 승진. 
- 5월 24일 YS, 12‧12 사태 고위 장성들 예편조치 시킴. 군 최고 서열 이필섭 합참의장을 전역 시키고 이양호 공군참모장을 후임에 임명. 김진선 2군 사령관, 안병호 2군 부사령, 박종규 56사단장 등도 전역 조치. 

이로써 하나회 청산은 YS 취임 3달에 걸쳐 완수됐다. 하나회 출신 장군 18명을 비롯해 40여 명이 교체됐다. 

YS는 군 개혁에서 나아가 과거 청산을 위한 여러 조치를 단행했다. 이 모두가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한 개혁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 군 개혁, 과거 청산 

- 1994년 1월 YS,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 정치개입 금지하는 국회 정보기관 관련법 개정 요구.
- 1995년 12월 YS, 12‧12 사태, 5‧18무력 탄압 관련해 공소시효가 논란이 되자 법적 처벌할 수 있도록 관련 법 개정 및 5‧18 특별법 제정, 노태우 전두환 구속, 5‧18묘역 조성.
 

YS는 문민정부 기간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관련자 처벌에 나섰다. 사진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1996년 12·12 및 5·18사건 선고공판에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YS는 문민정부 기간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관련자 처벌에 나섰다. 사진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1996년 12·12 및 5·18사건 선고공판에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긴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군정을 종식시킴으로써 문민정부를 완성했어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죠.” 

-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하나회 청산 과정에 깊게 관여된 분인데 인터뷰를 거듭 거절해왔습니다. 

“안 하려고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부담이 되겠죠.”

섭외를 좀 도와줄 수 있는지 부탁해 봤다. 자상히 웃는 가운데 난색을 표했다. 화제를 돌려, 칼국수 얘기를 꺼내봤다. 

- YS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칼국수입니다. 청와대에서는 어느 정도 빈도수로 먹은 건가요. 

“매번 먹었어요. 각료들과 점심을 먹을 때도 칼국수로 해결했어요. 여야, 국회의장, 외국 귀빈 할 것 없이 칼국수를 내놨어요. 의도적으로 하는 거죠. 청와대도 근검절약하니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어렵겠지만 공감하고 동참해 달라.”

- 청와대 칼국수는 특별히 더 맛있나요. 

“이인용 씨라고, 나중에 삼성그룹 사장까지 된 MBC 기자가 있었어요. 경북 안동이 고향인데 안동칼국수가 유명해요. 청와대에서 아마 누군가 내려갔던 거로 알아요. 이인용 씨 어머니한테 물어보니 우리 밀로 국수를 뽑고 톡톡 끊어지지 않도록 콩가루를 넣는다고 해요. 먹어보면 더 고소하달까? 그런 맛이 나더라고요.”

 

국민 누구도 희생되지 않도록…


문민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의전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이 본지와 인터뷰하며 YS 하나회 척결 당시를 돌아보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문민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의전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이 본지와 인터뷰하며 YS 하나회 척결 당시를 돌아보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또 궁금한 것이 불발된 남북정상회담 관련인데요. 1994년 7월 25일 역사상 처음 YS와 김일성 간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회담 결정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영변 핵시설 문제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될 때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중재역을 자청해 방북을 했잖아요. 김일성과 대동강변에서 배를 타고 만난 거 아닙니까. 이후 돌아와 청와대 오찬을 가졌어요.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들고 온 겁니다. YS는 통 큰 정치인이잖아요. 대범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회담 장소도 저쪽(북)에서 고집하는 게 있으면 다 들어주라고 했어요.”

- 그건 왜인가요. 

“YS 입장에서 김일성과 회담하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YS는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 합의가 가능했다고 봅니까. 

“그럼요. 통 큰 합의가 가능했을 겁니다. 한반도 정세가 크게 바뀌었을 거예요. 김정일의 부상을 억제할 가능성이 있었고 말입니다.”

그러나 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7월 8일 새벽 김일성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역사적 첫 회담이 개최됐다면 노벨평화상은 YS에 돌아갔을 거라는 평가다. 

- 그 시기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미국이 영변 핵시설을 정밀 폭격하려 해 한반도 전쟁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인 적이 있는데요. 당시 YS가 저지해 전쟁을 막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맞는지요. 

“미국이 영변 핵시설을 폭격할 경우 북한이 DMZ(비무장지대)에 있는 장사정포로 반격하면 서울 일대가 사정권 안에 다 들어오게 돼요. 서울 시민 100만 명 정도가 피해를 입게 됩니다. YS야 북핵 문제에 단호하고 강경한 입장이었지만 인명 피해가 날 수밖에 없다는 분석에 핵시설 폭격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항의했어요. 집무실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직통으로 전화하면서 언성이 높아질 때도 많았어요. 결국 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요.”
 

YS와 밴쿠버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미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YS와 밴쿠버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미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 협상이 잘 안됐다면 미국이 폭격을 가했을까요.

“아니라고 봐요. 미국 또한 북한이 반격할 경우 서울은 물론 주한미군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봤기에 실행에 옮기긴 어려웠을 겁니다. 정밀 폭격 계획 자체가 블러핑(bluffing)일 수 있어요. 클린턴은 94년 11월 상하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어요. 핵개발을 동결하는 쪽으로 잘 마무리해 선거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차단하고 싶었을 겁니다. 반면에 YS는 북한은 믿어서는 안 된다고 봤어요.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핵 개발 리스크를 원천 차단하려 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YS가 강경한 노선을 보이니 유화 정책을 구사하기 어려웠지요. 전략상 역으로 북폭 계획을 가하겠다고 해 YS가 선회하도록 일종의 블러핑을 구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북한은 경수로 건설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북핵 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YS는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로 봤지만 서울시민의 안전을 우려해 미국의 북폭을 막고자 경수로 건설 지원금을 대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결국 YS 전망대로 북한은 이후 약속을 어겼죠.” 

북한은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에 맞물려 핵개발까지 완수했다. 

- 미국도 북한이 그럴 줄 모른 건가요. 

“그렇죠. 속은 거죠. YS의 대북 정세 분석이 맞은 겁니다.”

이 말을 하는 그의 눈빛에서 YS 의중대로 한반도 정세가 돌아가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김석우는 1995년 6월 통일원(현 통일부) 차관에 임명되기까지 청와대에서 의전수석비서관으로 YS를 보좌했다. 마무리할 겸 YS 서거 9주기를 맞아 곁에서 지켜본 YS는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물었다. 

“용기 있는 정치가였어요. 일의 경중과 완급을 파악하고, 권한에 대한 위임을 지켜주는 지도자였습니다. 국민 사랑이 남달랐던 만큼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분이었지요.”

일어나면서는 금융실명제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꼭 실어달라고 당부했다. 

“역대 정권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한 일이었어요. 철통 보안 속에서 극비리에 도입한 거예요. 부정부패로 감춰진 검은 돈을 거둬 내고 경제 시스템을 투명하게 했잖아요. 지금의 선진국을 만들어낸 겁니다. 하나회 청산만큼 꼭 강조돼야 할 업적이지요.”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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