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전두환, 직선제 받아들이면 대통령선거 출마 않겠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DJ, “전두환, 직선제 받아들이면 대통령선거 출마 않겠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0.03.22 0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9. 통일민주당 창당과 전당대회 부의장 피선

#1. 민주화투쟁의 공방이 너무 지루하게 전개되어 모두 지쳐 있었다. 전두환 정권도 어떻게든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까지 왔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신한민주당과 일반 국민들도 이대로는 어렵다는 좌절의 직전에서 모두 다 같이 수용할 수 있는 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986년 11월 5일, 민추공동의장이자 민주당 상임공문 김대중 씨가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개헌을 받아들이면 나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86년 12월, 여야 영수회담을 하고 나온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가 “민주화는 하되 정부형태는 내각제로 하자”는 전두환의 제안을 받아 들여 먼저 민주화를 하고 보자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고 온양으로 쉬러 가는 바람에 우리는 또 한번 놀랐다.

사전에 김영삼 상임고문과 의논 한번 하지 않고 전두환의 제안을 덥석 받은 이민우 총재의 구상에 충격을 받은 김영삼 민추공동의장은 삼양동 이민우 총재의 자택을 새벽에 급습했다. 김영삼 공동의장이 내각제는 전두환 일파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코너에 몰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안인데 이를 받으면 안 된다고 설득했지만, 이민우 총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후였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김영삼 공동의장은 이제 각자 자기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자고 선언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영삼 상임고문과 이민우 총재는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근 30년 동안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걸어온 동지요 형제였다. 그만큼 민주화운동은 피를 말리는 힘든 과정이었다.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총칼 앞에 맨손으로 정신무장만 하고 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그만큼 기진맥진했다. 김영삼, 김대중 양씨는 새로 만드는 당의 이름을 통일민주당이라고 하고 창당발기에 들어갔고, 이민우 씨의 신민당에 있던 국회의원은 거의 전원이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이 되었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유진산 총재 시절 진산계를 하면서 이민우 총재와 인연을 맺어 지금껏 변함없이 지내왔지만, 직선 대통령중심제라야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내각제로 기우는 이민우 총재를 따를 수 없어 통일민주당의 발기인이 되었다.

1987년 5월 1일, 동숭동에 있는 흥사단에서 통일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내가 신민당 전당대회 부의장이 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전당대회 의장단은 한번 선출되면 다음번 전당대회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데, 내 후임으로 누가 전당대회 부의장으로 선출될지가 관심사였다.

대회장에 들어선 나를 멀찍이서 보고 있던 김덕룡 비서실장이 곁으로 와서 지난번 전당대회 때처럼 내 귀에 입을 대고 “오늘도 김영삼 총재께서 우리 쪽 전당대회 부의장에는 노 선배를 선출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렇게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하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두 번 연속 전당대회 부의장에 선출되는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회가 시작되면서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김대중 쪽에서 전당대회 의장단은 모두 현역 국회의원으로 선출하자는 제의를 해 와서 김영삼 쪽 지도부가 고심하고 있다는 말을 이재옥 씨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전당대회 의장선출에 들어가자 부산 출신 김정수 의원이 발언에 나서 전당대회 의장에 유재연 의원, 부의장에 노병구, 그리고 또 한명의 부의장에 이리 출신 국회의원 김득수 씨를 천거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전당대회 의장단을 모두 현역 국회의원으로 뽑자는 김대중 쪽 제의를 받은 김영삼계 지도부에서 이재옥 의원으로 의견을 모았는데, 김영삼 총재가 김대중 쪽은 현역으로 하든 말든 우리 쪽 부의장은 노병구로 한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된 것이라고 추대발언을 한 김정수 의원에게 들었다. 비록 국회의원은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나를 인정해준 김영삼 총재께 감사를 드린다.

통일민주당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 총재는 실로 오랜 만에 야당의 지휘봉을 잡고 원내외를 총지휘하며 민주화투쟁을 이끌게 되었다. 민주화투쟁의 지휘봉을 잡은 김영삼 총재는 더욱 거세게 전두환을 밀어 붙였고, 이때부터 전두환의 군부독재정권은 이성을 일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와 6·10 국민대회
 
#2. 전두환은 국민의 열화 같은 민주화요구와 국회 강성야당의 출현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민주화요구를 수용하는 척 질질 끌다가 궁여지책으로 내각책임제 개헌, 일명 ‘이민우구상’을 내놓았다. 이것이 김영삼, 김대중 양씨와 국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앞으로 1년도 남지 않은 대통령선거에 맞추어 합의개헌을 하자면 날짜가 부족해 물리적으로 헌법개정은 불가능하다면서 1987년 4월 13일 “현행 헌법으로 정부이양”(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는 간선제)이라는 이른바 전두환의 중대결단을 발표했다. 이것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라고 한다.

이때부터 민주화운동은 구체적인 4·13 호헌철폐운동으로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김영삼 총재는 내각제안을 반대하고 더욱 철저한 직선개헌투쟁을 원내외를 통해서 밀어붙이기 위해 전두환이 호헌결단을 발표하던 날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다. 더불어 재야 국민운동단체와 연합으로 더욱 격렬한 거리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중앙에서 장외투쟁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광명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을 우리 집으로 보내 나를 가택연금했다. 1987년 6월초 어느 날인가, 아침부터 정보과 형사 다섯 명이 몰려와서 우리 아파트 앞에 승용차를 대놓고 온종일 바깥출입을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 다음 날도 서울시청과 무교동 일대에서 항의집회가 예정되어 있어서 나의 집회참가를 막기 위해 그날 밤에 형사들이 철수도 하지 않고 조그만 승용차 안에 앉아 밤을 꼬박 새며 나를 연금했다.

그들도 답답했겠지만 나도 어지간히 답답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 광우를 시켜 문방구점에 가서 모조 백지 전지 10장을 사오게 하고, 전지 두 장을 가로로 잇대어 붙여 큰 글씨로 ‘독재타도’라고 쓰고, 남은 종이를 잘게 썰어 사인펜으로 ‘호헌철폐’ ‘독재타도’라고 밤새 수없이 썼다.

이때 우리 집은 광명경찰서가 빤히 보이는 철산 주공아파트 402동 503호였다. 다음 날 아침, 큰 글씨의 ‘독재타도’는 베란다에 내걸고, 잘게 쓴 전단은 내 점퍼와 바지주머니마다 가득 채웠다. 그런 다음 형사들도 차 안에서 밤을 지내고 피곤해서 긴장이 풀렸을 아침 8시 출근시간에 맞춰 그들의 차 앞을 조심스럽게 지나 집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광명경찰서 앞 삼거리에서 길을 가로막고 밤새 만든 전단을 뿌리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단독데모를 감행했다.

아침 출근시간이라 잠깐 사이에 차는 몰리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내 주변에 몰려들어 대혼잡을 이루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혼잡 속에 비로소 그것을 알아챈 형사들이 달려와 나의 팔다리를 한 사람씩 잡아 번쩍 들고 자기들의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옮겨다 강제로 차에 태워 어디론가 달려갔다.

한참을 가서 차문을 열며 내리라고 하는데 보니 한적한 바닷가였다. 화성군 어느 서해안 같은데, 큰집 앞에서 내려 들어가 보니 큰방에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들은 나를 상석에 앉히며 말했다.

“의원님, 죄송합니다. 오늘 우리를 너무 놀라게 하셨습니다. 우린들 이짓을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마누라하고 새끼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의원님께는 죄송하지만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용서하시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식사나 하시고 오늘 여기서 푹 쉬었다 가시지요. 사실은 광명경찰서 관내에 의원님 같은 분은 단 한 분 뿐입니다.”

내가 화를 내고 욕을 해도 그들은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하는 짓이라고 했다.
“여기는 동네도 없고 바닷가 한적한 곳이니 의원님 혼자서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체념하시고 우리와 함께 쉬었다 가십시오.”

그러면서 TV에 아주 야한 영화까지 틀어 놓는 것이었다.
“이거나 보시며 하루를 지내시지요.”
그들은 그날 밤 늦게야 나를 집에 태워다주었다. 이 일이 벌어진 것이 바로 1987년 6월 10일, 6·10 대회 때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