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50년 史>"김영삼 후보의 정치력에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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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 50년 史>"김영삼 후보의 정치력에 혀를 내둘렀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3.06.22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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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문민정부 탄생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문경새재의 기적

"1월9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 최고위원의 회담이 열립니다. 이에 때 맞춰 같은 날 민주산악회 전국 대회가 문경새재에서 대대적으로 열린다고 합니다. 귀추가 주목 됩니다."                      
1992년 1월 8일 KBS 9시 뉴스

이날 민주산악회 문경새재 산행은 수도권 근방에 사는 동지들만으로 늘 하던 대로 간소하게 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전에 큰 준비 없이 서울근교에 있는 회원들이 알아서 문경새재로 모이기로 했다. 많아야 기백명 정도의 회원들이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앰프시설도 광명시 지부에서 쓰는, 용량이 크지 않은 것을 유명환 국장이 미리 가서 설치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에 대한 경비도 통신비와 시산현수막 한 장 등 20여만 원이 전부였다.

1월9일 날이 밝아지면서 전날 방송을 통해 노태우, 김영삼 두 분의 청와대 회담(사실은 청화대 담판)이 알려지자 전국 지부에서 또 개인적으로 문경새재로, 문경새재로 모여 들었다. 그날 참가한 버스가 약 500~600대 그리고 자가용, 택시, 봉고차 등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달려오기도 했다.

한겨울 추위에도 참가한 회원수가 3만여 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사전계획 없이 청와대를 향한 전국 궐기대회가 됐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하고 김영삼 대표 최고위원에게 크게 힘을 실어 줬다. 내각제 논의를 끝내고, 대통령직선제 실시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당내 경선으로 뽑는다는 난제를 일거에 결단하게 하는데 큰 몫을 했다.

그날 문경새재는 빨간 색의 민주산악회 모자와 조끼를 쓰고 입은 회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문경새재 전체가 빨갛게 물들었고, 누가 나서서 통제를 하고 또 안내를 하거나 사전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였고, 쓰레기 하나 버리지 않고 모범적으로 전국대회를 치룰 수 있었다.

사전계획에 의해서 이만한 대회를 문경새재에서 치르려고 하면 아마도 수억 원의 경비를 들이고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뜻이다. 본부에서 시산회를 9일로 정한 것도, 문경새재로 첫 산행지를 정한 것도, 또 갑자기 청와대 회담이 그날로 잡힌 것도, 그리고 방송과 TV, 뉴스, 신문 등이 일제히 청와대 회담과 문경새재의 민주산악회 모임을 보도해 주어서 자연발생의 전국궐기대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래서 이날 산행은 민주산악회의 문경새재 기적이 된 것이다.

민주자유당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와 김영삼 후보의 지명

1월9일 청와대 담판으로 내각제 운운하던 일부의 당론을 잠재우고 대통령직선제를 당론으로 확정했다. 대통령후보는 여당 역사상 처음으로 당내 경선으로 뽑는다는 데까지는 합의를 이끌어 냈으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3당합당 비율이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60%,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25%,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15%였다. 그야말로 태생적 열세의 한계는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그중에도 민정당과 자민련은 대개 공화당 시절 오랫동안 박정희 밑에서 한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많아서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가지처럼 그들 간에는 색깔이 분명치 않았다.
그들과 태생도 뿌리도 완전히 다른 김영삼과 우리 통일민주당 세력은 전체에서 25%뿐인 4분의 1 정도였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그들과 대등하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 하는 더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그들은 박정희의 군사정부로부터 30년 이상 여당만을 해온 사람들이어서 75%라는 수적 우세도 문제거니와 자금력 또한 풍부했다. ‘군정을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루어야한다’는 사명감 하나만으로 야당에 몸담았던 우리는 거의 빈털터리였다.

김영삼은 합당 당시에 차지한 대표 최고위원이라는 당직 하나만이 유일한 위안일 뿐 외적으로 우리 민주계에게 희망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 기득권 세력들은 기회만 오면 김영삼 대표 최고위원과 통일민주당 계(민주계)를 소외시킬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이기지 못하면 김영삼과 우리는 영원히 정치판을 떠나야 할 처지였다. 김영삼 총재만을 믿고 따라온 우리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했다.

1992년 5월19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역사적인 민주자유당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집권당의 대통령후보를 자유경선으로 선출하는 감격스러운 자리였는데, 김영삼 후보에게 도전하는 이종찬도 만만치 않아서 생전 처음 집권당의 대의원으로 대의원석에 앉아 있는 우리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우리는 모두 정성을 다해서 투표를 하고 개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침이 마를 정도로 초조했다. 개표결과를 기다렸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긴지 시계가 멈추고 심장의 고동이 멎은 것 같았다.

드디어 전당대회 의장이 개표 결과를 발표했다.

투표에 참가한 대의원이 6,600명이었고, 그중 김영삼 후보가 4,418표를 득표해 총 투표자수의 66.3%를 득표했다. 이로써 김영삼 후보가 민주자유당의 대통령후보로 당선됐다.

우리 민주계 대의원들은 기적을 낳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산술적 계산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어서 미리 겁을 먹고 패배의식에 젖어 있으면서도 달리 따라갈 지도자를 찾지 못해 할 수 없이 3당합당에 동참한 우리들에게 기적 같은 승리의 영광을 안겨준 김영삼 후보의 정치력에 혀를 내둘렀다.

참으로 눈물겨운 감격의 순간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이 땅에 꼭 심고야 말겠다고 군사독재와 싸워온 지 어언30년, 나도 아내도 가족도 모두 지치고 힘겨워 여기서 지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회복은 절망이라고, 이제 정치는 그만하고 가족의 생계만이라도 제대로 챙겨야 하겠다고, 간절히 승리의 소망을 기도하고 있을 무렵, 김영삼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날 김영삼 후보는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민주적이고 정직한 지도자가 가장 강력한 지도자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도덕적인 정치와 깨끗한 정치를 몸소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윗물 맑기 운동’, ‘민주주의의 완성’, ‘선진정치의 실현’, ‘민족통일의 성취’ 라는 국가 목표를 향해 매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민주자유당의 대통령후보를 수락한다며 연설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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