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 유서, "아주 24개월 꽉 채워 쓰고 버려졌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박근홍 기자)
지난 9월 26일, 중소기업중앙회(중앙회)에서 정규직 전환을 오매불망하며 2년간 힘겨운 비정규직 생활을 버텨왔던 25세의 젊은 여성(K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고통보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다.
유서에는 중앙회 측이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성추행·성희롱을 당했고, 이를 상부에 알리자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유가족 측의 조사 결과, 실제로 중앙회가 K씨에게 성추행·성희롱 등 불법행위를 일삼았다는 정황증거가 나왔다. 하지만 중앙회는 그녀가 피해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를 '왕따'시키고 정규직 전환 약속을 깨뜨려 버렸다.
직접 가해자인 K씨의 직속상사들은 아직까지도 유가족에게 어떠한 사실인정도, 진심어린 사과도 하지 않았다. 중앙회의 수장, 김기문 회장은 "업무보조 직원의 근무여건 개선과 고용안정성 확보 등 운영체계 전반을 개선하겠다"며 제3자 입장에서의 사과문을 중앙회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이에 유가족 측은 "부족하다. 우리들 마음에 두 번 못을 박는 행위"라고 토로했다.
결국 그녀의 외삼촌이 직접 나섰다. 외삼촌 김 모 씨는 10월 9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카의 유언을 실천하는 것이 지금 내 역할"이라며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가해자들에 대한 형사 고소 및 민사 손해배상 청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유가족 측 법률대리인 류하경 변호사는 "10일 형법상 강제추행,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등으로 서울남부지검에 고발장을 접수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시사오늘>은 이날 기자회견 후, K씨의 외삼촌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유가족 측의 요청으로 얼굴과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외삼촌 김모 씨, "조카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나섰다"
참담하고 억울한 심경 때문일까, 외삼촌 김 모 씨는 인터뷰 내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K는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뭐든 열심히 하는 아이, 주변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명랑한 친구였다. 대학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장학금을 거의 4년 내내 받았고 조기 졸업까지 할 정도였다. 대인관계나 사회성도 굉장히 뛰어난 아이라서, 나도 K가 앞으로 어떤 사회생활을 하게 될까 궁금했던 차에 중소기업중앙회로 가서 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턴으로 들어가면 당연히 곧 정규직 전환이 될 줄 알았는데, 열심히만 하면 되겠지 했는데…. 조카가 이렇게 직장에서 여러 가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가는 줄은 정말 몰랐다."
K씨가 근무하던 곳은 중소기업중앙회 소속 인재 교육본부 이었다. 중소기업 대표나 CEO들이 찾아와서 교육을 받는 곳이다. 행사 후 40·50대 기성세대 CEO들과 2차, 3차 회식자리가 많을 수밖에 없는 업무였다. 그 자리에서 그들이 K씨에게 술을 따르라 강요하고, 블루스를 추자하고, 부둥켜안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K씨의 직속상사들은 회식 자리에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 직원을 보호관리하기는 커녕 이를 방치했고, 되레 함께 성추행·성희롱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상부에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해고통보를 받았다.
성추행·성희롱 상부 보고 이후, '왕따' 그리고 '해고통보'
"K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정규직을 보장 받은 상태였다. 오히려 조카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상사들이 '너는 정규직 전환 확실히 된다. 조금만 더 버텨라'라며 이를 말리고 설득했다. 심지어 중앙회 인사 최고 책임자까지 조카에게 정규직 전환을 약속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K는 주변에서 일을 잘하고 정규직 보장이 확실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았었다. 그런데 조카가 성희롱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인권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상부에 이메일을 보내자 중앙회에서 정규직 전환을 일주일 앞둔 8월 중순경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어떻게 그렇게 약속했던 부분을 손바닥 뒤집듯이 깨버릴 수 있는지. 정규직 전환 약속에 대한 배신감이, 상처들이 너무 컸던 것 같다."
성추행·성희롱 피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이후, K씨는 직장 내에서 상당한 괴롭힘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유족 측에 따르면 K씨의 한 직속상사는 "K씨가 이메일을 보내서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라고 평소 부하직원들에게 쓰지 않던 존댓말까지 해가며 공개적으로 K씨를 비아냥거리는 등 '왕따'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소기업중앙회, "너 이런 식으로 하면 다른데 가도 떨어져"
"부당해고죠. 부당해고고요. 참을 수 없는 분노, 부당함에 대해서 조카가 항의했지만, '너 이런 식으로 하면 다른데도 못 들어간다. 레퍼런스 체크하면 너 다른데 가도 떨어질 수 있다'는 협박을 들었다더라. K가 너무 억울해서 노무사 공부를 따로 할 정도였다. 자기가 당했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남기고 싶지 않다고…. 조카가 당한 상처는 성추행·성희롱보다는 직장에 대한 배신감이다. 자기가 지금까지 어려운 역경을 버티며 살아온 게 정규직 전환 약속인데, 자기는 모든 것을 걸었는데 중앙회에서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어쩔 수 없으니 나가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카의 배신감이 얼마나 컸겠나."
K씨는 외동딸이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전부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바라보는 재미로 살았고,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며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사고 이후 매일매일을 눈물로 보내고 있다고 한다. 충격이 큰 상태다. 외삼촌 김 모 씨는 누님을 대신해 진실규명을 일임 받아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외삼촌으로서 조카에게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내가 조금 더 관심 있게 상황을 지켜봤다면 K와 힘을 합쳐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조카의 유언처럼 '제2의 K'가 나오지 않도록, 유언을 실천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겉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훌륭하고 튼튼한 단체가, 이면에서 바라보면 사회초년생들을 정규직 전환으로 볼모 삼아 학대하고 착취하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하고 있다. 조카의 죽음이 노예처럼 살아가는 현재 젊은 청년들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줬으면 좋겠다. 구조적인 문제라 내가 말하기가 조금 부담스럽지만,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사회초년생을 잘 이끌어서 건강한 조직, 활력 넘치는 사회로 만들겠다는 사명감을 가졌으면 한다. 정규직 전환 해주겠다고 회유해놓고 배신하는 게 우리 사회에 만연하면 안 된다."
K씨 유서, "아주 24개월 꽉 채워 쓰고 버려졌네"
K씨의 유서에서 일부분을 발췌했다.
노력하면 다 될 거라 생각했어. 그동안 그래왔듯이…….그런데 이제는 뭘해도 결과가 안 좋을 것만 같아. 자신이 없어.
내가 타인을 위해 봉사를 실천하며 살 정도로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은 못되었지만, 적어도 피해 안 끼치고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 2년은.
그런데 아주 24개월 꽉 채워 쓰고 버려졌네.
내가 순진한 걸까? 터무니없는 약속들을 굳게 참고 끝까지 자리 지키고 있었던 게.
그들은 설마 이렇게 떨어질 줄은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냥 끝인가 봐. 사람 인생이 걸린 일인데.
속은 사람도 문제이지만, 자기 좋자고 속인 사람들. 적어도 죗값은 치러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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