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해산과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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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해산과 무관심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4.12.22 1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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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통진당이 해산했든 어쨌든 밥벌이나 잘 챙겨라"
민주주의 승리 or 新공안정국의 등장…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박근홍 기자)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 나는 침묵했다. /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 다음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마틴 니묄러 목사 作 추정>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마무리 될 무렵,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민주주의 연방 국가를 표방하는 '바이마르공화국(독일국)'을 수립하고 독일 민주주의의 조타수가 되고자 했다. 대통령제·의회 혼합 권력구조를 통해 평민·시민 층의 많은 지지를 얻으며 기분 좋은 첫걸음을 뗐던 공산당·사민당은 1929년 미국 발(發) 경제 대공황을 버티지 못하고 스러지고 만다.

실업자와 부채 급증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생활고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먹고 사는 일'이 힘들면 민족주의·파시즘을 내세우는 정치적 세력들이 득세하기 마련. 1933년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를 필두로 한 나치는 공산·사민주의 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히틀러는 나치당의 돌격대와 친위대를 군과 합쳐 독일 공산당·사민당, 그리고 노동조합에게 대대적인 '군사적 폭력'을 자행했고, 그들은 곧 물리적으로 절멸(絶滅)했다. 급기야 1934년 히틀러가 총통으로 집권하게 되면서, 공화국은 나치 정권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후 독일은 인류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게 된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 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풍경과 상처, 김훈>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통합진보당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지난 주말을 거쳐 '종북주의를 척결한 자유민주주주의의 승리', '민주주의 훼손하는 신(新)공안정국의 등장' 그리고 "그거 얘기하면 밥주냐" 세 가지로 갈렸다.

정부여당과 보수시민단체들은 '축제'분위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자평했을 정도. 청와대는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이 "헌법적 가치를 지키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고 이를 훼손한 정당에 대해 해산 결정을 한 것은 당연하고 적절한 판단"이라고 밝혔다.

반면 통합진보당 측을 비롯한 야당과 진보세력은 '新공안정국이 등장'한 것이라며 규탄했다. 당 해산 결정과 함께 의원직을 상실한 이상규 전 의원은 22일 SBS<한수진의 SBS전망대>에 출연, "통합진보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진보정당, 그리고 새정치민주연합 같은 야당,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 사회 전 영역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이번 해산 결정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우파를 결속시켜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를 높이려 한다는 것.

앞선 '2지선다'를 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자 주변에는 '먹고 사는 일', 아니 '돈 버는 일'에 바빠 '제3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어느 국립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학생들과 식사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통진당이 해산했든 어쨌든 밥벌이나 잘 챙겨라."

물론 술자리에서의 농담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통진당 해산 선고 판결문을 놓고 치열한 격론을 벌여야 할 법학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밥벌이'를 운운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참혹한 시대상이다.

'식소사번(食少事煩, 일은 힘들게 하는데 얻는 것은 적다)'의 시대인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道遠 至痛在心,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는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의 시대인지는 사람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참불인도(慘不忍睹, 세상에 이런 참혹한 일은 없다)의 시대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밥벌이'에 바빠 정당 해산이라는 우리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해 잠시 잠깐이라도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는 게 참혹하지 않다면 무엇이 참혹하단 말인가.

통합진보당 해산에 '무관심'한 우리네는 어쩌면 이미 큰 '상처'를 입은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21도 황금두꺼비' 한잔 걸치고 이런저런 세상사를 함께 논하며 삶의 고단함을 달래던 '그 때 그 시절의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었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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