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민원평가 무서워 법적 처벌보다 보상 수용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박시형 기자)
한 은행 A 직원은 주택담보대출을 마무리하기 위해 방문한 B 씨에게 우대금리 혜택이 있다며 신용카드발급을 권했다. 고객은 이에 응해 서류를 작성했고, 대출은 일단락 되는 듯했다.
며칠 뒤 B 씨는 A 직원이 서류를 늦게 접수하는 바람에 계좌 관리가 엉망이 됐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A 직원이 대출 서류를 가져간 뒤 다른 지점에서 카드신청을 했는데 카드 대금 출금계좌가 주거래 계좌가 아닌 다른 계좌로 바뀌어버렸다는 것. B씨는 A직원이 업무를 빨리 처리했으면 이런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고 화냈다.
당황한 A 직원은 당시 동석했던 부동산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B씨는 이를 두고 개인정보를 공개했다며 상위기관에 다시 민원을 넣었다.
은행원들이 줄지 않는 악성 민원에 멍들고 있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에서 발생한 민원은 1만1589건으로 은행권에서는 이 중 약 10%가 악성민원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통계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소비자 중 악성민원의 비율이 2~3% 내외라는 점을 고려하면 은행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앞선 사례처럼 업무 과정에서 일어나는 민원 제기는 양반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도 민원으로 접수되는 경우가 있다.
문제행동 소비자로 분류된 C씨는 은행 상담센터로 전화해 다짜고짜 "왜 내 전화를 받냐"거나 "사람 이하로 취급해도 전화 받겠냐"는 등의 발언을 해댔다.
언쟁을 벌이던 C 씨는 결국 전화 받은 직원의 목소리를 들으면 재수가 없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욕 먹는 일은 일상다반사"라며 "일부 고객들은 저주를 퍼붓기도 하는데 미신인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쁜건 어쩔수 없다"고 설명했다.
여러 건의 민원을 반복적으로 제기해 보상을 받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D 씨는 카드대금 자동 이체가 오후 6시 이전에 입금했을 때만 이뤄져 카드 연체가 발생했다며 피해 배상을 요구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개인적으로 금액을 각출해 보상하라고 요구하면서 장시간 통화를 이어가거나 인근 지점에 방문해 업무를 방해하기도 했다.
D 씨는 이후 같은 은행에서 적금 가입 때 안내받은 금리와 현재 적용 금리가 다르다고 민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은행은 유사 민원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까지 지급했다.
금융권은 지난해 말 문제유발소비자에 대해 법적 소송을 진행하는 등 강력하게 처벌하겠다고 결의했지만 법보다 가까운 민원평가 때문에 처벌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열린 '금융부문 문제행동소비자 대처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금융경제연구소 정혜자 연구위원은 시중은행이 악성 민원을 수용하는 이유로 '상급기관 민원제기'와 '매스컴을 통한 민원제기'를 들었다.
상급기관 민원센터 등에 민원이 접수될 경우 지점과 업무담당자에게 불이익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대부분 민원인 주장이나 업무처리가 정당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수용한다는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업무프로세스를 잘 아는 문제행동 소비자는 금융사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즉시 상위기관으로 올라가 민원을 낸다"며 "이럴 경우 은행들은 악성임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에 금융노조가 나서 금융당국에 제도개선을 요구했다.
금융노조는 지난달 28일 금감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에게 민원발생평가제도 개선과 민원 프로세스 개선 등의 요구안을 전달했다.
노조는 민원 발생시 관련기관이나 직원에 소명기회를 의무적으로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악성 민원인에게 특혜나 금품을 제공하는 금융사에 평가상 불이익 조치를 주고 금융소비자보호처에 악성민원 관리 전담팀 설치를 요구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언론이나 가이드라인 사례로 알려지는 민원·해결 사례는 수 많은 민원 중 일부에 불과하다"며 "은행원들은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큰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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