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흠, “YS 내가 만든 민정당과 합당, 그 힘으로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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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흠, “YS 내가 만든 민정당과 합당, 그 힘으로 대통령 당선”
  • 정세운 기자 박근홍 기자
  • 승인 2015.06.27 1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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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흠 전 국회의원 "YS와의 만남이 인생에 가장 큰 축복"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박근홍 기자)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서 정보부 개입으로 DJ 당선”
“YS-박정희 밀약설 제기한 이택돈 증언, “있을 수 없는 억측”
“권정달 제의와 YS 허락으로 신군부 주도한 민정당 합류”

▲ 박권흠 전 의원은 YS와의 만남이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었다고 술회했다.ⓒ시사오늘

23년째 ‘차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권흠 전 의원은 한국 정치사의 산증인이다. 1964년 김영삼(YS) 전 대통령 수필집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를 실질적으로 집필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이후 1971년 YS 권유로 상도동 비서실에 합류하면서 유신체제가 몰락하는 순간까지 YS와 함께 반(反)박정희 투쟁의 선봉에 선 주인공이다.

하지만 박 전 의원은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민정당에 합류하면서 야당인사에서 여당인사로 탈바꿈했다. 그의 여당 합류는 상도동 인사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가 YS 최측근에서 여당인사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2011년 박 전 의원은 자신의 정치 일대기를 담은 자서전을 출간했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궁금증을 풀고자 박 전 의원과의 만남을 요청했고, 6월 1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차인연합회에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박 전 의원은 인터뷰에 앞서 “자연인 20년, 신문기자 20년, 정치인 20년, 차인 20년으로 살았다. 그 80여 년의 세월이 ‘짜여진 내 삶의 일정표’였다”고 회고했다.

박권흠, YS 스피치라이터 역할 해오다 71년 상도동 합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궁금하다.

“속기를 배운 인연으로 기자를 하게 됐고, YS와 나는 정치인과 기자 사이의 평범한 인연을 맺어 왔다. 그러다가 1964년 YS 수필집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를 집필해 주면서 가까워졌다.”

박권흠은 <국제신문> 정치부장으로 재직하던 1964년 YS로부터 세계여행 수필집을 집필하는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아 실질적으로 책을 쓰면서, YS와 밀접한 인간관계를 맺었다.

-속기를 배운 게 기자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됐나?

“국회 속기사를 해볼 생각으로 배웠다. 속기 공부를 열심히 해 통신사 속기사로 취직이 됐고, 속기사를 열심히 하니 기자로 발탁됐다. 당시에는 통신기계가 좋지 않아 일본방송 NHK를 보고 번역해서, 그것이 기사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속기사니까 내가 빠르고 정확하게 기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수년 간 하니까 문장력도 좋아지고 세계 정세를 정확히 볼 수 있었다.”

-YS가 수필집을 만족해했나.

“동아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 광고가 신문에 났을 때 YS가 기뻐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아주 만족했던 것으로 안다.”

그러면서 그는 “120일 간 미국과 유럽, 동남아, 일본 등을 여행하고 돌아온 YS가 1964년 가을 풍림이라는 식당으로 불렀다. 만났더니 대학노트 한 권을 주면서 책으로 써 달라고 청했다. 즉석에서 내가 ‘해 보겠다’고 했다. 그것이 어쩌면 YS와 나의 인연을 더 가깝게 해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부터 낮에는 신문사에 나가 정치부장으로 일하고 밤에는 경동호텔에서 집필하기를 한 달여 만에 책을 탈고했다”고 덧붙였다.

-그때부터 YS 스피치라이터 역할을 한 것인가.

“그렇다. 낮에는 신문사에서 밤에는 YS를 위한 원고를 썼다. 시사 등 중요한 문제를 논평이나 문제제기 글을 써서 YS에게 보내면, ‘원내총무 김영삼’의 이름으로 신문에 나왔다. YS는 당시에 원내총무였지만 당수(대표)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YS의 스피치라이터 역할에 만족했나.

“YS 스피치라이터가 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터닝포인트였다. 인생의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전, 이재영과 정보부 개입으로 김대중 당선”

-YS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선언문을 직접 쓴 것으로 기억한다.

“1969년 가을 풍림으로 YS가 불렀다. 1971년 대선이 있는데 야당의 후보는 젊은 사람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익희 조병옥도 실패했으니 40대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신민당 대선후보로 나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어떻게 대답했나.

“나에게 의견을 묻는 형식이었지만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세상 사람 누구도 그런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내가 ‘좋은데 언론이나 국민들이 호응 안 해주면 웃음거리가 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YS가 ‘호응해 줄 것이다. 빨리 선언문이나 준비하라’고 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한 3선개헌을 강행했고, 야당은 3선개헌 저지 투쟁을 벌였다. 3선개헌을 막지 못한 야권은 침체 일로를 걸었다. 

“YS가 출마를 선언하는 것까진 좋았다. 당시 신민당의 최고 권력자가 유진산 선생이었는데 YS가 상의 없이 기습 출마 선언을 한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유진산 선생이 ‘구상유취’라고 평가절하했다. ‘네가 무슨 대통령 출마냐’, 이런 식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야당 정치인들이 꼼짝을 안 했다.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서 YS가 김대중(DJ)과 이철승을 찾아가 ‘당신들도 40대니까 경쟁하자’고 제안했고, 이들이 기자회견하고 하니까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민당 대선후보는 DJ가 됐다.

“다음 날이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인데 YS가 이재영을 만나고 왔다고 전했다. 당시 야당에서 가장 많은 계보 의원을 거느린 사람이 유진산과 이재영이었는데, YS가 ‘이재영이 나를 밀기로 했다’고 말했다. YS도 진산만 가지고는 불안했던 거다. 그런데 다음 날 내가 이재영계 대의원에게 물으니 ‘YS를 지지하라’는 얘기가 없었다고 했다. 뒤에 알아보니까 중앙정보부에서 이재영한테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DJ가 후보가 됐다.”

40대 기수론이 신민당 대세로 자리 잡자 당초 이를 ‘구상유취’라고 평가절하하던 유진산은 ‘불출마’를 선언하는 대신, YS DJ 이철승 중 한사람을 대선후보로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YS와 이철승은 찬성했고, 자신을 지지해줄 리 없다고 판단한 DJ는 이를 거부했다. YS와 이철승은 유진산을 만나, ‘유진산이 추천하는 후보를 밀겠다’고 서약했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유진산은 “나는 당수로서 YS를 대통령 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YS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눈앞에 와 있었다. 하지만 이철승의 배신으로 DJ가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는 게 일반인에게 알려진 사실이다. 박 전 의원은 여기에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언을 내놨다.

박 전 의원은 필자가 구속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하자, "그렇지 않다. 당시는 오히려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시사오늘

-YS가 순순히 승복했나.

“1차 투표에서 YS가 1등이었는데, 그게 2차 투표에서 뒤집혔다. 그때 YS가 단상에 올라가 ‘김대중 동지의 승리는 나의 승리다. 제주는 물론 무주 구천동까지 가서 DJ의 당선을 돕겠다’고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그 장면은 정치사에 없던 명장면이었다. YS는 실제로 지원유세를 전국으로 다녔다.”

-상도동 비서실 합류는 언제인가.

“1971년 대통령 선거가 박정희 대 김대중의 치열한 격전 끝에 박정희의 승리로 끝나면서 막을 내렸다. YS는 1975년 대권 꿈을 위해 그해 한국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때 나를 불러 ‘도와 달라’고 했다.”

-쉽게 결심을 했나.

“당시에 언론인이 청와대 비서관이나 여당 전국구 의원으로 간 적은 있어도 야당에 뛰어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YS 스피치라이터 역할을 하고 있었고, 정보부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말 안 하고 가겠다고 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YS가 ‘경향신문에서 얼마 받느냐. 내가 그만큼 줄 테니 같이 일하자’고 물어서 내가 좀 부풀려서 말했다. 채 10만 원이 안 됐는데 10만 원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내가 1978년 신민당 공천 받고 출마할 때까지 YS한테 월급 10만 원씩 받았다.”

막후에서 YS를 돕던 박권흠은 신문사에 아예 사표를 쓰고 1975년 대선을 준비하자는 제의를 받아 정식으로 상도동에 합류했다. 이후 그는 1974년부터 YS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상도동 직계 인사가 됐다.

-그런데 1972년 유신이 단행됐다.

“한국문제연구소와 YS 의원 사무실을 오가며 열심히 일했는데 10월 유신이 단행됐다. YS는 그때 국회 외무의원으로 주미대사관 국정감사차 미국에 가 있었는데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는 해산됐다. 그때 DJ도 함께 미국에 가 있었다. YS가 보여준 행동은 최고의 지도자감이었다.”

-YS가 어떻게 했나.

“부인인 손명순 여사가 ‘여기 상황이 불투명하니 당분간 미국에서 머물러라’고 주문했다. 그랬더니 YS는 ‘구속되는 한이 있어도 돌아가겠다’고 귀국했다. 반면 DJ는 망명을 선언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유신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에서 납치돼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YS가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며 대여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과의 영수회담 후 투쟁 강도가 약해졌다.

“YS는 박정희의 인간적 호소에 상당히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박정희 얘기를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YS는 ‘민주주의 될 거요’만 되풀이했지, 그 외는 일절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박정희로부터 비밀 약속을 받은 게 있다고 귀띔해 줬다. <동아일보> 광고탄압을 중지하고 구속 중인 정치인 석방을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1974년 8월 정보부 개입에도 불구하고 최연소 총재로 선출된 YS는 선명 야당 구축을 통한 대여 투쟁을 선언하며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도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며 맞섰다. 하지만 당시 국제상황이 야당에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1975년 4월, 크메르 정부군과 월남이 공산군에 함락되면서 한반도에도 긴장감이 고조됐다. 국제상황이 여의치 않자 4월 말 YS는 박정희와의 회담을 제의했다. 한 달 후인 5월 21일 영수회담이 열렸다.

두 시간 가량 회담 후 집무실을 나온 두 사람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YS는 회담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박정희와 약속했다는 이유를 들어 함구했다.

청와대 김성진 대변인도 “난국 극복을 위해 여야가 힘을 모으기로 의견을 같이했다”는 정도의 내용만을 발표해, 의구심은 증폭됐다. 회동 후 YS의 대여투쟁 강도도 약해졌다.

-당시 YS를 수행했던 이택돈 대변인은 YS-박정희 간 밀약이 있었다는 증언을 내놨다.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자기 측근도 아닌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는 건 믿기 힘들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택돈 전 의원은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진행하는 현대한국구술자료관을 통해 “내가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YS는 ‘요는 말이야 이거야. 여당은 지(박정희)가 하고 말이야. 야당은 내가 하라 이 얘기야’라고 답했다. 그래서 내가(이택돈) ‘DJ는 어떻게 하고요?’그랬더니, ‘갔어’이러는 거야. 그러면서 YS는 박정희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야. ‘내가(박정희) 누가 있느냐. 다음은 네(YS) 차례다.’”고 증언했다.

아무튼 YS는 박정희의 말을 철저히 믿고 대여 투쟁의 강도를 낮췄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검찰에 불구속 입건됐다.

인도차이나반도 공산화 정세를 살펴보기 위해 동남아를 방문하고 돌아온 YS가 1975년 8월 23일 귀국 보고 형식으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빠른 시일 내에 유신헌법을 개정,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 게 화근이 됐다. 검찰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YS를 불구속 입건하고 출두요구서를 보냈다. YS가 검찰의 소환에 응할 리 만무했다. 5번의 출두요구서를 거부하자 검찰은 동남아 방문에 동행했던 박 전 의원을 불러 조사를 벌였다.

“검찰 공안부장이 ‘YS는 대한민국 검찰을 어떻게 보는 거야, 소환해도 출두하지도 않고 말이야. 당신이 대신 들어가야겠어’라고 하면서 구속영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내가 며칠 후 딸의 결혼식이 있으니 끝난 뒤 구속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구속됐나.

“곧바로 서대문구치소로 이송됐다. 그런데 감방에서 수의를 입으려는 순간 검찰이 나를 다시 서울 대검 수사국으로 데려갔다. 그러더니 담당 검사가 영장 집행을 보류한다며 날 풀어줬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다행’이라고 말하자, 박 전 의원은 손사래를 치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때 그대로 구속돼 유죄 판결을 받았으면 국회의원 출마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비서실장인 내가 들어갔다 나오면 YS의 훈장이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오히려 실망스러웠다.”

"YS 인기로 국회의원 당선…YS와 DJ, 정치사에 남을 아름다운 관계”

박 전 의원은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정보부 개입으로 DJ가 당선됐다는 증언을 내놨다.ⓒ시사오늘

-1978년 10대 총선에서 경북 경주 월성 청도 지역구에 도전, 당선됐다. 동력은 무엇인가.

“나는 지역구에 나가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공천을 받아 지역에 내려가 보니 지역 언론은 내가 3등이라고 했다. 하지만 YS가 지원유세를 2번이나 왔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솔직히 YS 인기 덕에 당선된 건데…. 이것도 내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일정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1976년 당권을 이철승에게 빼앗겼다, 1979년 다시 YS가 되찾아왔다. 이때 DJ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안다.

“1979년 5월 엄청난 탄압 속에서 YS가 다시 총재가 됐다.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김덕룡까지 나서서 ‘돌아가는 사태가 심각하다. 이번에는 후퇴하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할 정도였다. 차지철도 나서서 ‘아예 YS를 구속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다녔다. 그런데 YS는 요지부동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DJ까지 나서서 YS 당선을 도왔다. 두 사람은 최대 라이벌이었지만 상부상조하는 사람이었다. 도울 땐 돕고, 경쟁할 땐 경쟁하고 그랬다. 정치사에 남을 만한 아름다운 관계라고 생각한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당사 4층 건물에서 거행됐다. 당권에는 이철승 김영삼 이기택 신도환 등이 도전했다. 하지만 당권은 이철승과 김영삼의 2파전으로 압축돼 갔다.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당선을 막는데 주력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확보할 후보가 없다고 판단한 박 정권은 이기택과 신도환 등이 결선 투표에서 이철승을 밀도록 공작했다. 신도환과 달리 42세의 이기택은 알 듯 모를 듯한 행보를 거듭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박 정권은 이기택을 이철승 지지로 돌리기 위해 처가 쪽에서 운영하는 ‘태광’ 장부를 압수하는 등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2차투표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기택은 YS 지지를 선언했다. YS는 그렇게 당권을 되찾았다.

-당권을 되찾은 후 YH 사건 등으로 큰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안다.

“폭력 경찰이 총재실에 쳐들어올 때 출입문과 가까이 있었다. 내가 ‘이게 무슨 짓이냐, 여긴 총재실이야’라고 삿대질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그중 한 명이 내손을 낚아채 주먹질을 해댔다. 내가 다시 ‘나 대변인이고 국회의원이야, 무슨 짓이냐’고 저항했지만 ‘대변인, 너 잘 만났다’며 더 때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차지철이 거느리는 특수부대가 경찰로 위장해서 들어온 거였다. 순간 기절했고, 정신이 들어 눈을 떠 보니 떠지지 않았다. 얼굴의 광대뼈에 금이 가고 전신 타박상을 입었다. 한 달 간 입원하다 퇴원했다.”

무역회사 YH는 장용호가 자본금 100만 원으로 설립, 가발을 만들어 수출해 온 회사였다.1970년 1천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릴 만큼 큰 무역회사였다. 하지만 장용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후 서울 본사로부터 물건을 가져간 후 대금 결제를 하지 않았다. 결국 회사가 폐업을 하게 되자 김경숙 등 여공 170명이 신민당 마포당사 4층에서 1979년 8월 10일부터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이틀째인 8월 11일 무장경찰 수백 명이 총재실까지 난입해 현역의원과 당직자들을 집단 폭행하는 사건이 펼쳐졌다. 그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YS 총재직 박탈과 의원직 제명 등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10·26 사태가 일어났다.

“누가 뭐라고 해도 유신을 붕괴시킨 데 앞장선 사람은 YS다. 정치권에서 DJ는 연금됐고, 거의 YS 혼자서 싸웠다. 같이 싸워줄 사람이 없었다. 겁이 나서 아무도 안 나섰다. 오직 YS만이 ‘민주주의 해야 한다. 유신헌법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말하는 자체가 긴급조치 위반이다. 그러니까 아무도 그런 말을 못했다. 그런데 YS는 했다.”

“YS, 돌아오라고 한 적 없고, 돌아갈 생각 안 해”

박권흠 전 의원은 신문기자, 정치인, 차인 등 자신이 살아온 인생은 짜여진 일정표 같다고 회고했다.ⓒ시사오늘

-결국 YS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정계 은퇴를 했다.

“비극적인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신군부가 권력을 잡고 제5공화국이 태동하기 시작할 때로 기억한다. YS가 가택 연금된 지 3개월이 되던 1980년 8월 12일이다. YS가 나를 불렀다. 김동영과 김덕룡이 와 있었다. YS가 ‘은퇴 성명을 내야 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연금 상태여서 정치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데 무슨 은퇴 성명이냐?’고 세 사람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YS는 무조건 은퇴성명서를 만들어 내일 아침까지 가져오라고 했다. 은퇴성명서를 만들어서 보여줬더니 이대로 기자들에게 발표하라고 했다.”

-YS가 진짜로 다시는 정치를 안 할 것이라고 믿었나?

“그 무렵 YS 정치자금과 여자 문제를 조사한다는 등 온갖 소문이 정보기관원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고 있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정계 은퇴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성명서 발표하는 날 YS가 ‘박 대변인 나는 영원히 정치를 안 할 것이다. 이 말을 기자들에게 꼭 전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알겠다’고 하니 ‘박 대변인은 젊으니 정치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부터가 박 전 의원에게 꼭 듣고 싶은 이야기다. 박 전 의원은 YS와 함께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섰지만 신군부가 주도한 민정당 창당발기인 15인에 들어갔다. 박 전 의원의 민정당 참여는 당시 상도동계 인사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3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까지 박 전 의원은 입을 다물고 있다. 박 전 의원은 자신의 정치 인생을 담은 자서전 〈YS와 나 그리고 다(茶)〉를 2011년 출간했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담고 있지 않다.

-신군부가 주도한 민정당에 참여한 계기가 무엇인가.

“신군부에서 민정당을 만드는 작업을 했고 그 핵심 인사가 권정달이었다. 권정달이 ‘새 정치 질서를 만드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내가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YS를 찾았다. YS가 ‘당신은 젊으니까 계속 정치를 해라’고 허락해서 민정당에 참여했다.”

-고민은 없었나?

“당시 신민당과 공화당 모두 해체돼 버리고, 정국이 어떻게 될지 앞이 캄캄한 상황이었다. 야당의 한계도 느끼는 시절이었고, 새 체제를 만드는데 들어가 활동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참여를 결정했다.”

그러면서 박 전 의원은 “민정당에서 의원도 2번 하고 상임위원장도 두 차례나 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나를 YS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만나면 늘 ‘YS는 잘 있느냐’고 물었다”고 회상했다.

-민한당 등 야당을 할 생각은 없었나. 서석재 신상우 등 민한당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다시 YS한테 돌아왔다. 여당을 하다 보니 돌아오기 힘들었던 것 같다.

“돌아갈 생각도 안 했고, YS도 돌아오라고 말한 적 없다. 솔직히 YS 주변에서는 나한테 비판도 많이 했지만, 정작 YS는 날 미워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박 전 의원은 이어“결국 내가 만든 민정당과 3당합당을 통해 YS가 대통령이 됐다”며 민정당 합류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논리적으로는 부합될지 몰라도 YS나 주변 사람들은 박 전 의원의 민정당 합류에 대해 비판이 있었을 듯싶다.

“YS가 5공 탄생에 대항해 정계 은퇴하고 23일 단식투쟁도 벌였지만, 결국 민정당과 합당해서 그 힘을 가지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것도 엄청난 모순 아닌가? 그렇게 반대한 민정당과 어떻게 합당을 할 수가 있겠는가? YS는 반드시 군정종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모순된 길로 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길이다고 생각하면 가는 게 진정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현실 정치로 질문을 돌려봤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 정도 하면 잘하는 거다. 흔들리지 않고 소신대로 꾸준히 밀고나가고…. 박근혜 대통령은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고 본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김무성 대표는 YS한테 정치를 배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잘하고 있다. 김무성 시대가 서서히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실수하지 않으면, 김무성을 누를 사람이 지금 대한민국에 없어 보인다. 그리고 청와대와 적당히 거리 두고 적당히 협조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아주 잘한다. 특히 김무성 대표는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계파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어떻게 수습해야 한다고 보나.

“예전에도 계파 갈등이 심했지만, 거긴 하나의 룰이 있었다. 이철승하고 YS, 이철승과 DJ. 이들은 융합될 수 없는 그런 사이였다. 항상 결과에 승복했다. 소송하고 이런 거는 없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원칙을 정하고 거기에 벗어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차인연합회 회장인 박권흠 전 의원에게 ‘차’에 대한 의미를 물었다.

“한국차인연합회 역사가 37년째다. 그중 23년을 내가 있었다. 감개무량하다. 내가 1992년에 처음 회장이 됐는데,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빚만 있었다. 솔직히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생각한다. 23년 동안 회원 차회 700개가 될 정도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수많은 차인을 만난 것이 내 인생 후반기를 행복하게 했다. 이번에 국회에서 제35회 차의 날 행사를 가졌다. 차문화가 성장하는 걸 보면 이에 대한 일정 역할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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