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2015년 11월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조문하기 위해 들어섰다. 방명록 작성대 앞에서 김덕룡 전 원내대표를 만났다. 그는 “왔어”라며 악수를 건넸다. 빈소 안팎에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가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서서 나오자 장례식장 입구에서 “어이구, 어이구”하는 곡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보니 오전 11시 35분. 백발의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이었다. 이 모습을 본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가 다가가 최 전 장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최 전 장관은 문 대표가 안중에 없었다. 최 전 장관의 시선은 빈소 안의 YS 영정을 향하고 있었다.
장례식장 앞에서 울음을 멈추지 않는 최형우와 방명록 작성대 앞의 김덕룡. 그리고 빈소 안의 김현철. 이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필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들은 YS의 정치 60년史 안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YS 대통령 만들기’에 선봉에 섰지만, 문민정부 이후 경쟁적 관계였다. 때문에 생겨난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오해. 진실은 무엇일까? 그들은 한곳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 그들은 개혁적 의식을 가진, 바로 상도동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입니다”
최형우
최형우 전 내무부 장관은 일반인에게 YS의 오른팔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최 전 장관은 단 한 번도 YS의 비서로 활동한 적이 없다. 때문에 측근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동지’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듯싶다.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때문에 YS와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72년 9월 이른바 진산파동으로 불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가 유진산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최형우는 YS와의 식사자리에서 밥상을 발로 차 엎어버리며 “그 딴 식으로 하면 대통령은커녕 소통령도 안 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일화는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최형우는 그야말로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YS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다. 1972년 유신이 선포된 직후 중앙정보부는 최형우를 불법으로 연행, ‘김영삼의 정치자금을 대라’며 모진 고문을 했다. 최형우는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했지만 함구하며 만신창이가 된 채 풀려났다.
갖은 회유도 있었다. 1979년 유신말기 YS가 박정희 정권과 정면대결을 선언하자, 박 정권은 ‘YS 제거’에 나섰다. 직계로 분류되던 문부식, 김덕룡 등을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하고 서석재, 문정수 등을 지명 수배했다. 또한 ‘총재 가처분 파동’을 일으켜 YS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뉴욕타임스 기자회견’ 내용을 트집 잡아 의원직까지 뺏었다. 김영삼을 제거했다고 판단한 중앙정보부는 최형우를 회유하며 ‘당기위원장과 정무위원장’사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최형우는 “차라리 감옥에 나를 보내라”며 버텼다.
1983년 전두환 정권은 최형우에게 ‘보사부 장관이나 건설부 장관을 맡으라’고 회유했지만,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서 당시 민자당 김종필(JP) 최고위원이 ‘YS 지지’를 유보하자 칩거 중인 청구동 자택까지 들어가 “YS를 한 번 만나시라”며 설득한 주인공도 최형우였다.
그런 그였지만, 1990년 3당합당 때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평생 군정종식을 위해 뛰어왔던 우리가 독재세력과 하나로 합친다’는 것에 대해 차라리 ‘정계은퇴’를 하겠다며 반발했다.
친분이 있던 황명수가 나서서 설득을 했지만, 최형우는 “형님(황명수)이나 가서 혼자 부총재하고 다해 처먹어라”며 버텼다. 인척인 심완구가 나섰지만 “아니 죽으러 가는 굴에 혼자나 가서 죽지, 왜 여러 사람 끌어 들이냐”고 욕을 들었다.
결국 YS가 직접 최형우를 만나 “너 없으면 안 된다. 내가 이거(3당합당) 다시 물릴까”라고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YS가 “니, 진짜 내 놔두고 그럴끼가”라고 재차 설득했다. 부인 원영일 여사와 딸 은지 씨도 “YS와 정치적 생명을 같이 하자”고 설득, 민자당에 합류할 수 있었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는 내무부 장관을 맡아 ‘부패세력 척결’을 외치며 기득권 세력과 단호히 싸워나갔다. 하지만 1997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최형우의 정치일생은 결국 독재세력과의 싸움이었다. 2013년 5월 최형우는 <시사오늘>과 인터뷰에서 ‘어떻게 지독한 고문을 견딜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어눌하게 답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입…니…다.”
“감옥에서도 독재세력과 싸웠다”
김덕룡
김덕룡은 YS 복심으로 통한다. YS를 이야기할 때면 앞에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YS와 생활한 친숙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치인이다.
지난 1970년 상도동 사단에 입문한 이래, 4차례투옥, 민주산악회 결성, 민추협 발족, ‘2.12 선거혁명’, 대통령 직선제 쟁취, 3당합당, 문민정부창출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정치구도를 바꾸는 큰 흐름 속에서 언제나 김덕룡이 있었다.
YS가 험난한 민주화 운동의 가시밭길을 헤치고 문민정부를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은 김덕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통치 시절, 김덕룡은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에 관한 유인물을 작성 배포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투옥됐다. 이후 유신말기인 1979년 YH 사건의 와중에서 노동자 김경숙 씨의 죽음을 실은 ‘YH백서’를 작성 배포하다가 또다시 구속됐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덕룡은 ‘YS의 23일 단식투쟁’을 외부에 알리려다 또다시 투옥됐다.
이처럼 수차례의 투옥을 거친 그는 1982년 연금이 해제되면서 YS가 민주산악회를 결성하자 ‘연락책’을 맡아,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이를 기반으로 1984년 민추협을 창설한 후 초대 기획실장을 맡아 신민당 탄생의 산파역할을 했다. 신민당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당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직선제를 일궈내는데 큰역할을 했다.
하지만 1987년 대선에서 YS가 패하고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은 제2야당으로 추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YS의 대권도 눈앞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위기에 직면하자 김덕룡은 민정 민주 공화당의 3당 합당을 기획하면서 돌파했다. 그리고 3당 합당 통합협상의 주역으로 나섰고, 끝내 YS를 대권에 올려놓았다.
합당 후 김덕룡은 내각제 파동으로 YS가 위기에 몰리자 ‘여권 내 후보조기 확정 관철’을 외치며 정면 돌파했다. 급기야는 그의 이런 지혜가 ‘YS대세론’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권력이동을 이끌어냈다.
문민정부 후 김덕룡은 개혁그룹의 사령탑으로 급부상하며 ‘개혁=DR’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YS 집권기 동안 실세가 된 김덕룡은 정무 1장관, 사무총장 등 요직을 맡으며 문민정부 개혁 작업에 앞장섰다.
2013년 3월 김덕룡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여러 번 구속을 당해 심적으로 위축됐을 것 같다’는 질문에 “감옥 생활이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난방이 안 돼 감방 안에 있는 물통이 다 얼었다. 그 물을 깨서 냉수마찰 하고 그랬다. 독재정권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 그런 기분으로 감방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졌다”고 회고했다.
혁명보다 어려웠던 개혁공천 주도
김현철
김현철 국민대 특임교수는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레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서석재 등 야당 핵심 정치인들과 스킨십을 하며 성장했다. 미국에서 MBA를 취득하고 귀국해 쌍용증권에서 근무하던 그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고, YS가 대선에 출마하자 직장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선거를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얼굴을 내밀었다.
1987년 대선 패배 이후 과학적 선거 전략의 필요성을 느낀 김 교수는 국내 최초의 과학적 사설 선거전략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는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소선거구제로 선거를 치를 경우 DJ가 이끄는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김현철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상도동 내부에서 김현철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3당합당 이후 연구소를 당에 흡수시킨 김 교수는 1992년 YS 대권가도에 주춧돌 역할을 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YS 개혁정책의 중심에는 김현철이 있었다. 개혁을 말하면 정권이 망하지만,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일념으로, 기득권 세력에 대한 개혁 작업을 추진했던 문민정부.
YS 정부의 궁극적인 개혁 목표는 '인적개혁', '제도개혁'. 그리고 '의식개혁' 이렇게 세 가지였다. '공직자재산공개'로 기득권을 어느 정도 척결한 후 '금융실명제' 역시 금융 부문을 투명하게 해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자는 명분을 가지고 추진했다. '하나회 청산'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인적개혁과 제도개혁은 이 같은 방식으로 추진할 수 있었지만, 의식개혁은 사회 전반에 걸친 기득권 세력과 이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바꾸는 작업이기에 문민정부 임기 내에 완료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정권재창출을 통해 문민정부가 추구하려 했던 변화와 개혁을 지속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판단한 김현철은 개혁주도세력의 확장을 꾀했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문민정부의 성공을 위해 개혁공천을 주도했다. 이재오, 김문수, 손학규, 정의화 등 오늘날 정계를 주름잡는 정치인들은 모두 김현철 통해 원내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상도동 핵심에서 개혁주도세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공천과정에서 여당 내 기득권 인사들이 반발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들의 반발을 뒤로 하고 총선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김현철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비수였다. 개혁주도세력의 세는 확장됐지만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극심했다.
그러던 중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고 김현철은 기득권 세력의 타깃이 됐다. 그는 개혁주도세력 핵심 인사에서 순식간에 부패 분자로 매도당했다. 더욱이 'YS 차남=소통령'이라는 꼬리표가 달리면서 문민정부의 과를 그가 짊어졌다. 1997년 한보사태는 그 꼬리표가 낳은 비극이었다. 야당과 언론은 한보사태의 배후로 김현철을 지목했고, 대선을 앞두고 YS를 흔들기 위해 그의 아들을 공격했다. 여당 내 반(反)개혁 세력도 덩달아 이에 합세했다. 김현철은 마녀사냥 식으로 구속됐다.
검찰 조사 결과, 김 교수는 한보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사법부는 당시 여론에 떠밀려 ‘대선잔금 조세포탈죄’라는 기상천외한 죄명을 만들어 김현철을 구속시켰다. 개혁주도세력의 핵심이었던 김현철에게 부패 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현철은 2015년 10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다 내 불찰이다. 하지만 야당과 여당 내 기득권 세력, 그리고 비판적인 여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기득권 세력들을 개혁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보통 지난한 일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개혁적 의식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 그게 바로 민주계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최형우 김덕룡)이 지금 어떻게 돼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득권 세력과 싸우다 정치권 전면에서 멀어졌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기득권 세력과 싸워보고 싶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