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로 풀어본 정치인②]'해결사' DJ와 히딩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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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로 풀어본 정치인②]'해결사' DJ와 히딩크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5.12.25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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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뛰어난 언변·실용주의적 리더십 등 비슷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정치는 축구와 비슷하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겨뤄야 하고, 승자와 패자도 생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슷한 점은, ‘사람’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축구 팬들은 잔디 위에서 뛰는 ‘사람’에게 멋진 플레이를 기대하고, 국민들은 정치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희망을 투영하고 미래를 건다. 다른 듯 닮은 정치계와 축구계의 ‘사람’을 비교해 본다. 

▲ 故 김대중 전 대통령 ⓒ 뉴시스

'해결사' DJ와 히딩크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폴란드를 꺾고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승리를 거두던 날, VIP석에는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한국’을 이끈 지도자였던 두 사람은, 묘하게 닮은 점이 많았다. 독서광답게 언변이 뛰어났고, 반대파의 거센 비난을 뚫고 성공을 이뤄냈으며, 실용주의적인 리더십으로 ‘해결사’적 면모가 강했다.

라이벌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용장’이자 ‘덕장’이라면, DJ는 ‘지장’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광으로 유명한 DJ는 풍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뚜렷한 철학과 흠잡을 데 없는 논리, 박학다식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문열을 만났던 DJ가 아직 무명이었던 이 소설가의 문체까지 거론하며 대화를 이끌었던 것은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 있다.

DJ는 아는 것이 많은 만큼 말도 잘 하는 정치인이었다. 1964년, ‘공화당 정권이 한·일 협정 협상 과정에서 1억3천만 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한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원고도 없이 연설했던 일화는 DJ의 지성과 연설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날 DJ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는 훗날 기네스북에 국회 최장 발언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히딩크도 축구계에서 유명한 독서가 중 한 명이다. 소설과 역사책을 좋아하는 그는 비행기에서도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만 읽는 것으로 알려졌다. 히딩크와 함께 2002 월드컵을 준비했던 당시 한국 대표팀 코치진은 늘 책이 잔뜩 들어있는 히딩크의 가방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만큼 ‘말’을 이용한 동기부여 능력도 탁월했다. 2002 월드컵을 앞두고는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며 연이은 실패로 기가 죽은 선수들의 자신감을 북돋웠고, “나는 아직 배고프다”라며 16강 진출에 들뜬 선수들의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월드컵 4강을 달성한 후 한국을 떠나면서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겠다”며 국민들에게 여운을 남긴 인사는 아직도 회자된다.

내부의 극심한 반대를 뚫고 성공을 이뤄낸 것도 공통점이다. DJ는 정치활동 내내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군사독재 정권이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DJ에게 붉은 낙인을 찍었기 때문이다. 1980년 신군부세력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DJ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내란’으로 규정하고 DJ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은 그 절정이었다. 이후 DJ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심지어 대통령 당선 후에도 터무니없는 비난을 감내하며 정치를 해야 했다. 

▲ 거스 히딩크 감독 ⓒ 뉴시스

히딩크도 4강이라는 성과를 내기 전까지 숱한 비난을 받았다. 히딩크 본인은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며 항변했지만, 박종환 전 대표팀 감독은 “히딩크는 한국 축구를 너무 모른다”며 히딩크의 대표팀 운영 방식을 맹비난했고, 신문선 해설위원은 “히딩크가 한국에 자신을 맞추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 외의 전·현직 감독들도 ‘외국인 지도자는 한국 축구 사정을 너무 모른다’며 ‘외국에서 온 명장’을 견제했던 탓에, 히딩크는 끊임없는 경질설에 시달리며 월드컵을 준비해야 했다.

리더십 스타일도 비슷하다. DJ는 늘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정한 이념에 매몰돼 현실에서 유리되기보다는, 현실에 바닥을 딛고 이상을 추구하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선택했다. 1960년대에는 월남 파병에 조건부로 찬성했고, 군사 독재 세력과의 화해를 추구했으며, 수많은 비난과 오해 속에서도 실용적인 대북 정책을 고수했다.

히딩크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명장’들에게는 고유한 전술 색깔이 있다. 주제 무리뉴 감독은 4-3-3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한 역습 축구를 즐기고, 호셉 과르디올라 감독은 점유율을 중시하는 패스 축구를 선호하는 식이다. 그러나 히딩크는 맡은 팀의 상황에 맞게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압박 축구라는 큰 틀은 유지하되, 스리백과 포백, 점유율 축구와 역습 축구 등 기술적인 면은 상황을 고려해 융통성 있게 결정했다. 한국 대표팀에 포백을 도입하려 하다가 여의치 않자 곧바로 스리백으로 회귀, 김태영 - 홍명보 - 최진철로 이어지는 '철벽 수비진'을 구축한 것은 히딩크의 실용주의적 면모를 볼 수 있는 좋은 예다.

선수기용도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선수를 활용했으며, 기술적으로 화려한 선수보다는 쓰임새가 다양한 ‘멀티 플레이어’를 선호했다. 한국 대표팀처럼 객관적인 전력이 떨어지는 팀은 기술보다 체력과 조직력에 바탕을 둔 축구를 펼쳐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에 따른 선택이었다.

이처럼 실용주의적 면모야말로 두 사람이 ‘해결사’로 불린 비결이다. 이념과 철학에 집착하지 않고 상황에 맞는 리더십을 과시한 DJ는 한국을 ‘IMF 조기 졸업생’으로 만들었다. 또 자신을 ‘빨갱이’로 보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북유화정책을 펼치며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히딩크 역시 2002년 전까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우리나라에 16강 진출을 선물할 ‘해결사’로 등장, 주어진 환경과 자원을 120% 활용해내며 4강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한국을 떠난 후에도 PSV 아인트호벤, 오스트레일리아 축구대표팀, 러시아 축구대표팀, 첼시 FC 등을 맡아 위기에 빠진 팀을 구해내는 ‘해결사’로 명성을 떨쳤다. 2015년 12월 현재, 히딩크는 성적 부진으로 해임된 주제 무리뉴로부터 첼시 FC 지휘봉을 이어받아 다시 한 번 ‘해결사’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려 하는 중이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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