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기범 영화평론가)
세상의 모든 남과 여는 애틋한 사랑을 꿈꾼다.
거기에다 자신만의 사랑은 완벽하고 이상적이어야 한다.
점점 더 척박해지고 지난해지는 이 세상에 몸을 담글수록,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은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감싸주면 더욱 아름답다.
사랑에 대한 욕망은 조물주가 그나마 인간에게 자유로이 허락한 본능이다.
하지만 대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저 영화 속 타인의 애잔한 사랑을 보고, 감성에 젖는 것으로 대리할 뿐이다.
삶 속에 시간이 더할수록 사랑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져가며 한편으로는 체념하고, 그러면서도 현재와 상관없이 여전히 갈망한다.
남과 여의 사랑이란 진정 인간의 영원한 테제요, 난제다.
이윤기 감독의 영화 <남과 여> 는 인간의 그 영원한 문제에 대한 정답을 대신하여, 스산한 겨울에 얼어붙은 눈꽃의 결정처럼 점점 단단해지는 우리의 마음에 긴 공명의 감성을 채운다.
핀란드의 하얀 설원은 현실과는 유리된 동화 속의 순수한 남녀의 사랑을 일깨운다.
적막하고 때로는 세차지만, 그 순백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본능은 뜨거워진다.
동시에, 손을 맞잡고 가로지르고 싶어 망설이는 한겨울의 얼어붙은 호수는 두 남녀의 아슬한 일탈을 예견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의 모든 남과 여의 사랑은 어차피 줄타기다.
핀란드식 사우나가 있는, 눈 내린 숲속의 홀연한 오두막은 그런 지친 영혼들의 안식처이자 몽환의 탈출구다.
어찌 보면 일탈에 대한 잠재된 욕망의 표출은 당연하다.
이를 두고 불륜이라 부를 수 있는 세인들이 부대끼는 현실로 남과 여는 귀환한다.
다시 돌아가야 할 익숙한 일상이지만, 동시에 익숙한 외로움과 허전함이다.
또다시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고, 순환된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미숙하듯, 물론 이 영화도 한계는 존재한다.
겨울 동화 속의 드넓은 하얀 적막함에 귀가 가려진 관객들에게 처음 만나 이름도 모르는 남과 여가 왜 서로를 갑자기 원했는지에 대한 납득은 생략된다.
논리와 설득을 항시 희구하는 이들에게 이는 합당치 못하다.
사전적 불륜에 대한 강박에 거부감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이들에게도 당연히 이 영화는 늘 온당하지 않다.
거친 세파와는 단절된 중산층의 사랑 놀음에 대한 허울 좋은 포장이라 비아냥거리는 혹자들에게 이른 봄의 이 멜로는 차라리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가 허락지 않는 불륜보다도 훨씬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늘 이상과 양심을 사변하기만 하는 이들과 이를 논하기엔 그 주제마저 덮어 버리는 묘한 힘이 이 영화에는 있다.
오히려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복잡다단하기만 한 인간의 본능과 감정보다 차라리 이 영화는 단순하고 선명하다.
얼굴 근육의 미세한 감정선까지 표현하는 전도연의 연기는 작년의 미진함을 털어내고, 한국 최고의 ‘멜로의 여왕’ 이라는 수식어를 소환한다.
그런 칸의 여왕을 뒷받침하는 것은 여성 전유의 섬세함마저 울려주는 공유의 절제된 목소리다.
적어도 물질적으론 걱정 하나 없을 것 같은, 그런 두 남녀의 만남은 이상한 몰입감을 준다.
세상이란 배경 속에서 주변인들은 지워 버린 채, 오로지 두 남녀만 보이게끔 하는 기묘함이다.
그러나 그 기묘한 힘을 이끄는 것은 긴 여백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솔직한 내면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길 바라는 감독의 연출력이다.
아직도 추운 겨울의 끝자리에 홀로 남아 있는 이들의 가슴에 늦서리 대신 멜로의 이름으로 정제된 감성이 내리길 원했다면, 그는 적중했다.
50년 전, 클로드 를르슈의 <남과 여> 는 배우자를 잃은 두 프랑스 남녀의 사랑을 시대를 앞서가는 함축된 대사와 장면, 그리고 감각적 선율의 음악으로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고, 멜로의 영원한 환상으로 남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타지에서 우연히 만나 한 차에 동승하면서 사랑의 긴 여운이 시작되는 두 남녀와 그들을 둘러싼 정화된 배경 음악은 동명의 이 프랑스 고전 멜로에 대한 오마주라고 생각하고 싶다.
★★★★☆
·영화 저널리스트
·한양대학교 연구원 및 연구교수 역임
·한양대학교, 서원대학교 등 강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