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장대한 기자·최준선 기자·안지예 기자)
97년 전 오늘, 수 많은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하는 평화적 만세운동을 벌였다. 비록 일제의 총칼에 선조들은 쓰러져 갔지만 대한민국의 자주독립 염원만은 꺽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97년이 흐른 지금 <시사오늘>은 3·1 독립운동의 의미와 정신을 되새기고자 가슴 아픈 역사적 장소들을 찾아봤다.
탑골공원, 97년 전 오늘 독립운동 봉화의 불을 당기다
“매일 이 앞을 지나면서도 삼일문이 3·1절의 '삼'과 '일'을 얘기하는 줄은 몰랐네요.”
97주년 3·1절을 앞두고 탑골공원을 찾은 지난달 28일, 탑골공원의 삼일문 앞을 지나던 한진영(31세, 서울 거주) 씨는 삼일문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와 같이 대답했다. 한 씨는 이어서 “어르신들 모이는 작은 공원으로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삼일문 현판 글씨체는 ‘삼’자와 ‘일’자의 경우 독립 선언서의 글자를 그대로 이용했고 선언서에 없는 ‘문’자의 경우 다른 글자에 쓰인 ㅁ, ㅜ, ㄴ을 조합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3·1운동의 정신이 고스란히 어려 있는 셈이다.
탑골공원은 1897년 서울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구식 공원이다. 고려시대에는 흥복사, 조선시대 전기에는 원각사가 현재 공원 자리에 위치했으나 연산군 때 폐사되고, 이후 고종34년 공원으로 조성됐다.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독립운동가이자 동학·천도교의 지도자이기도 했던 손병희 선생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운동을 주도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그 옆에 위치한 기미독립선언 기념비에는 독립선언서 전문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만세를 외치고 있는 듯 한 두 개의 동상이 태극기를 두르고서 기념비 옆을 지키고 있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3·1운동에 참가한 학생대표 정재용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팔각정이 보였다. 독립운동 봉화에 불이 당겨진 곳, 시민들의 독립만세 소리가 처음으로 울려 퍼졌던 곳이다.
동쪽으로 나있는 길에 들어서면 ‘삼일정신찬양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젊은이들이여 보라. 한국의 지성 높은 젊은이들이여.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이 나라의 주춧돌인 청년 학생들이여.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어 고요히 주위를 살피고 둘러보라. 민족자결의 고함치는 독립만세소리 그대의 귀에 쟁쟁하리라. (후략)” 이곳이 3·1운동의 성스러운 발상지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게끔 했다.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을 포함, 3·1운동 당시의 모습을 담은 10개의 벽화가 그 옆에 길을 따라 세워져있다. 벽화를 통해 총칼로 민중을 탄압하던 일본군의 잔인함과 이에 맞서는 애국자들의 독립을 향한 염원이 새겨져 있다.
‘아아 젊은이들이여 이 정신을 이 땅과 함께 길이 간직하라.’ 삼일정신찬양비의 마지막 문장이다. 한편 오늘(1일) 오후2시 탑골공원에서 ‘3·1 독립운동 희생선열 추모식’이 열린다.
서대문형무소, 순국선열 희생 위에 새겨진 역사
기자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위치한 서대문 독립공원을 찾은 것은 지난달 27일. 주말이라 산책나온 주민들은 물론 서대문역사관형무소로 체험학습을 나온 부모들과 아이들로 공원은 붐볐다.
공원은 도심 속 쾌적한 근린공원 형태로 꾸며졌는데 곳곳에 독립문, 3·1 독립선언 기념탑, 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세워져 있어 우리 선조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느끼고 추모하기에 충분했다.
그 중에 3·1 독립선언 기념탑은 지난 1963년 탑골공원에 세워졌다가 1979년 정비사업을 이유로 철거되는 수난도 겪었다. 그러다 지난 1992년에서야 항일 운동의 터전인 서대문 독립공원 한켠에 복원돼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공원을 쭉 따라 걷다보면 서대문형무소가 나온다. 서대문형무소는 지난 1908년 일제가 만든 감옥으로 주로 항일투사들을 수용, 사실상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고 핍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이 곳은 지난 1987년 문닫기까지 독재에 맞선 민주화 투사들도 옥고를 치른 곳으로 유명,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역사관으로 꾸며져 일제강점기의 역사 교육은 물론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데에도 일조하고 있다.
우선 역사관을 들어서면 일제 때 지어진 옥사를 비롯해 작업장, 사형장 등을 둘러볼 수 있다. 특히 역사전시관 지하에 있는 고문실은 당시 상황을 재현한 모형들이 있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악행을 직시할 수 있다.
형무소 곳곳에는 학습 겸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과 학부모들 뿐만 아니라 젊은 커플들도 많았다. 특히 3·1절을 앞둔 주말이라 그런지 외국인 방문객들 간혹 눈에 띄었다.
서대문 형무소를 찾은 이예진(33세, 서울 거주) 씨는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악행에도 절대 두려워하거나 굽힘없이 오직 대한민국의 자주독립만을 외쳤다고 하니 지금을 사는 우리들이 얼마나 나약하고 이기적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며 "아이가 더 크면 다시 한번 방문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것"이라고 말했다.
부천 안중근공원, 쓸쓸한 항일 역사의 장
3·1절을 앞둔 지난달 27일 찾은 부천시 원미구 중동에 위치한 안중근공원은 화창한 주말이 무색하게 한산했다. 이 곳은 현대백화점과 부천 터미널을 오고 가는 시민들의 길목으로 여겨져 안중근 의사 동상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소녀상)'는 쓸쓸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다.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우뚝 서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을 볼 수 있다. 안 의사 동상은 과거 오갈 데 없던 아픔을 안고 있다. 재중 사업가인 이진학 안중근의사 동상건립위원회 회장이 지난 2006년 중국에서 자비로 안 의사 동상을 제작해 하얼빈시에 세웠으나 당국의 외국인 동상 설치 불허 방침에 따라 철거, 같은 해 동상을 국내로 들여와 보관했다.
이에 하얼빈시와 1995년부터 자매결연을 맺어온 부천시는 10여개 지자체와의 경쟁 가운데 동상 유치를 확정, 지난 2009년 10월 안중근공원에 세웠다. 안 의사 동상 곁의 커다란 비석을 따라 걷다보면 안 의사의 생애, 업적, 어록과 관련된 기록도 읽어볼 수 있다.
공원 가운데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야외공연장 옆에 기림비가 자리하고 있다. 기림비는 건립비용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난 2월3일 제막식을 열었다. 지난 2014년 부천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건립추진위원회(이하 건립추진위원회)가 2540만원을 모금했으나 추가 설치비 1500만원이 부족해 가림비 추진이 잠시 중단됐다.
이후 올해 1월 한일 협상과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 문제가 논란이 되자, 부천시의회 정재현 의원이 시민모금운동 재개를 제안했다. 모금 운동 시작 20일 만인 1월27일 1500만원의 시민 성금이 모아졌고 기림비도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키 160㎝의 소녀의 뒷모습은 저고리와 치마 차림에 곱게 땋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소녀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전면이 거울로 돼 있는 앞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소녀상에 비친 자신을 보며 숙연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소녀상은 지난 2014년 프랑스 앙굴렘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특별전 ‘지지 않는 꽃’의 참여 작품인 최인선 만화작가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모티브로 했다.
한편, 부천시는 안중근공원을 ‘부천의 항일투쟁전적지’로 꾸미고 안 의사 관련 학술대회와 공연, 백일장, 그림대회 개최 등 다양한 추모사업을 펼칠 계획이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관심과 눈길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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