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원과 라이언 긱스]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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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과 라이언 긱스]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노병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4.03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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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로 풀어본 정치인(14)>서청원,‘소장파에서 주류로’vs.라이언 긱스,‘돌격대장에서 항해사로’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 ⓒ 뉴시스

정치는 축구와 비슷하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겨뤄야 하고, 승자와 패자도 생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슷한 점은, ‘사람’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축구 팬들은 잔디 위에서 뛰는 ‘사람’에게 멋진 플레이를 기대하고, 국민들은 정치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희망을 투영하고 미래를 건다. 다른 듯 닮은 정치계와 축구계의 ‘사람’을 비교해 본다.

혹자들은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을 ‘가장 정치인스러운 정치인’이라고 말한다. 정치의 본질이 갈등 조정과 타협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만큼 ‘유연함’을 갖췄다는 의미일 터다. 그러나 서 최고위원은 정치 입문 초기, 상도동계이면서도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뜻에 반기를 들 만큼 강단을 갖춘 소장파였다. 만72세의 고령에도 여전히 집권여당의 최고위원으로 활약할 수 있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킨 유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 최고위원은 만40세까지 세계 최고의 리그인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서 선수로 활약하다가 은퇴한 라이언 긱스를 떠오르게 한다. 긱스 역시 신체 능력의 저하 등 환경의 변화에 맞춰 스스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가며 은퇴 직전까지 최고의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패기로 가득했던 시절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주한국당 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했던 서 최고위원은 12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상도동계로 눈을 돌려 1985년부터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 활동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1985년 12대 총선을 기준으로 상도동계 직계와 민주계를 나누므로, 그를 ‘완벽한’ 상도동계로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서 최고위원은 상도동계에 합류한 후 한동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파이터’였다. 상황에 기죽기보다는, 활발하게 정부의 실정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조금씩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5공 청문회’를 통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스타로 만들었던 13대 국정 감사에서 서 최고위원은 통일민주당에서 몇 안 되는 국감 스타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자신의 정치적 대부인 YS가 1990년 3당 합당을 결행할 당시에는 YS와의 결별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YS의 설득에 3당 합당에 동참한 후에도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계를 거침없이 공격했고, 민정계가 민주계를 견제하려 할 때마다 ‘집단 탈당’ 카드를 꺼내들고 민정계를 역으로 압박할 정도로 야성이 살아 있는 ‘소장파’가 서 최고위원이었다.

“긱스가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세계의 어떤 팀도 그의 스피드와 돌파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젊은 시절의 긱스를 이렇게 평가했다. 젊은 시절의 긱스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술과 스피드, 판단력, 차분함을 갖춘 선수였다. 199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이 맞붙은 FA컵 준결승전은 긱스가 어떤 선수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명이 퇴장 당한 상태에서 연장전으로 접어든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긱스는 자신의 진영 중앙에서 패트릭 비에이라의 패스를 가로챈 뒤 폭발적인 드리블로 네 명의 아스널 수비를 제쳐내고 데이비드 시먼 골키퍼가 손쓸 수 없는 곳으로 슈팅을 날려 경기를 마무리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 시즌 프리미어리그와 FA컵, UEFA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석권하는 ‘트레블’을 달성했고, 퍼거슨 감독은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에 서임됐다. 이때의 긱스는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과 공이 발에서 떨어지지 않는 기술을 갖춘 ‘폭주기관차’와도 같았다. 

▲ 2007년 방한한 라이언 긱스 ⓒ 뉴시스

변화를 택하다

YS 집권후 민주자유당 내부에서의 세력 다툼, 정치발전협의회 결성 등의 과정을 통해 ‘투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서 최고위원은 조금씩 파이터의 면모를 벗고 노련한 정치인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1997년을 전후해 반(反) 이회창 노선의 선두 주자로 나섰던 서 최고위원은 2002년 당대표 당선을 계기로 이회창 대통령 후보와 호흡을 맞추며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선거 압승을 이끌었고,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상도동계 인사들의 이 후보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정치력을 과시했다.

서 최고위원의 스타일 변화가 가장 직접적으로 감지된 시기는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둔 때였다. 서 최고위원은 상도동 YS의 자택을 방문해 “박근혜 전 대표가 도와달라고 하기에 그러겠다고 했습니다”라며 ‘친박계’로의 변신을 알렸다. 군사독재 타파와 민주화 실현이라는 YS의 뜻에 공감해 상도동계에 몸담았던 서 최고위원의 이 같은 선택은  ‘투쟁의 정치가’였던 서 최고위원이 ‘타협의 정치가’로 거듭났다는 방증이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발적인 드리블 능력을 지녔던 긱스는 20대 후반에 접어든 이후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과거의 모습을 상실했다. 발이 느려져 더 이상 상대 수비를 따돌릴 수 없었고, 순발력도 떨어지면서 일대일 상황에서조차 헤매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박지성을 ‘긱스의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도 신체 능력의 저하에서 비롯된 긱스의 기량 저하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긱스는 자신의 몸에 나타난 변화를 그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고, 화려함을 버리는 대신, 영리함과 정교함을 살리는 쪽을 택했다. 은퇴를 바라보는 30대의 나이에 중앙 미드필더로의 변신을 시도한 긱스는 넓은 시야와 정확한 킥 능력, 빠른 두뇌 회전을 무기로 새 포지션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이후 긱스는 상황에 따라 중앙 미드필더와 측면 날개 자리를 오가며 제2의 전성기를 열어젖혔고, ‘퍼거슨 시대’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이 됐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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