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새누리당이 변화의 첫 발을 떼었다. 새누리당은 지난 9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4차 전당대회에서 호남 출신인 이정현 의원을 당대표로 선출하며 ‘전국정당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전당대회를 전후해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수행, 11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광주·전라 지역에서 새누리당의 정당지지도는 14.1%로 지난달 11일 조사(6.3%)에 비해 두 배 이상 뛰어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서진(西進)’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남아 있다. 2030세대의 표심이다. 〈리얼미터〉의 11일 발표에서 새누리당의 정당지지도는 34.1%로 더불어민주당(27.2%)과 국민의당(12.6%)에 크게 앞섰다. 반면 20대(19세 포함)에서는 16.0%, 30대에서는 17.0%로, 20대에서 37.0%, 30대에서 36.8%를 얻은 더민주당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새누리당이 2030세대에서 획득한 지지도는 호남에서 얻고 있는 지지도와 별반 차이가 없다.
유승민과 새누리당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대표이자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박사는 저서 〈정당의 발견〉에서 “정당 조직의 기능 중 하나는 정체성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성의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정당이란 ‘정치적인 주의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인 만큼, 정당이 지지를 받으려면 ‘동일한 정체성’과 ‘집권 가능성’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설명이다.
새누리당은 두 요소 중 경쟁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서있다. 집권 여당이자 의회 내 다수당인 새누리당만큼 높은 집권 가능성을 지닌 정당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새누리당이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원인은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이 대목에서 지난해 4월 유승민 의원이 한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 유 의원의 연설은 온라인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 보수여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온라인에서, 그것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관심을 받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즉, 유 의원의 연설은 그동안 새누리당이 대변하지 못했던 젊은 층의 의견을 상당 부분 포괄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유 의원이 연설문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국가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재조정’이었다. 그는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국가는 왜 존재합니까”라며 세월호 인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중(中)부담-중(中)복지’”라며 “새누리당은 고통 받는 국민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면서도 ‘공정한 경쟁의 장(場)’을 만들기 위해 재벌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바탕 아래, ‘공정한 경쟁’과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확보’를 강조한 유 의원의 일성(一聲)은 새누리당을 과거의 정당, 기득권 정당, 낡은 정당으로 치부했던 젊은 층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자유를 벗어던진 자유주의정당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유 의원이 내세운 주장은 ‘리버럴’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흔히 리버럴은 사회·문화적으로 개인주의·다원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경제적으로는 복지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존 스튜어트 밀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국가는 오로지 개인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때만 개입할 수 있다”는 대전제에 동의하면서도 “구조적 문제로 인한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허용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리버럴적 마인드가 강한 젊은 층이 새누리당의 가치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이는 상당히 이상한 일인데, 오래 전부터 새누리당은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당’으로 포지셔닝 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누리당의 강령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에 바탕을 둔다’는 문구가 또렷이 박혀있다.
여기서 새누리당의 ‘인지부조화’가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정당은 정체성과 경쟁성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정체성보다 경쟁성을 부각시키는 데 더욱 초점을 맞춰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미네르바’ 사건이다. 당시 집권 여당이던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은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기소했던 전기통신기본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이 나오자 ‘인터넷 허위글’을 ‘사이버 범죄’로 다루겠다는 법안 마련에 착수했는데, 이것은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국가 질서’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겠다는 논리는 자유주의자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사고 흐름이 아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또한 마찬가지 사례다.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이 아는 진리는 대부분 반쪽짜리기 때문에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올바른 역사 교육’을 위해 자유주의를 과감히 벗어던졌다.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의견이 필요하다’는 자유주의의 대원칙을 망설임 없이 깨부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전 더민주당 대표는 “국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아니다”라며 “이들은 독재주의자들이고 전체주의자들이고 국가주의자들”이라고 새누리당을 힐난하기도 했다.
문 전 대표의 말대로, 그동안의 행보를 종합하면 새누리당은 자유주의정당이라기보다 국가주의적 정당에 가깝다. ‘국가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전형적인 국가주의적 레토릭이다. 새누리당의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지난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유승민 공천 논란’에서 고스란히 반복됐다. 새누리당은 유 의원을 향해 ‘새누리당과 철학·가치관이 다르다’고 몰아세웠고, 유 의원은 자신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새누리당의 당헌·당규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맞섰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측의 발언은 모두 옳았다. 지금까지의 새누리당은 자유주의의 깜빡이를 켜고 국가주의를 향해 크게 회전하는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딜레마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 새누리당이 겪고 있는 ‘젊은 층의 외면’은 당헌·당규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새누리당의 강령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와 함께 촘촘한 사회안전망과 실효성 있는 복지제도 확립, 공정한 시장경제라는 단어가 모두 포함돼 있다. 이는 유 의원의 교섭단체 대표연설 내용과 정확히 부합한다. 스스로 결정한 강령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젊은 층의 외면 현상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새누리당을 지탱하고 있는 양대 축이 지역적으로는 영남, 철학적으로는 국가주의자라는 점이다. 이현우·이지호·서복경·남봉우·성홍식이 함께 펴낸 〈표심의 역습〉에서 저자들은 2016년을 기준으로 57~66세에 속하는 이들을 ‘유신체제 세대’로 정의한다. 그러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까지 청소년기를 보내며 정치·사회 의식을 다진 유신세대 체제의 보수적 투표 성향은 “보수 경향은 청소년기의 교육을 통해 이미 머릿속에 내재화된 것으로 시간이 지나도 영향력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처럼 보수 경향을 내면화한 유신세대 체제는 국가의 목적을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희생시킬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특히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낀, 또 나의 희생이 눈부신 경제 발전의 거름이 될 수 있음을 체험한 세대는 ‘국가가 잘 돼야 개인도 잘 된다’는 가치관을 새누리당에 투영하고 있다.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한 직후인 지난해 11월 〈리얼미터〉가 발표한 결과만 봐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른바 ‘유신체제 세대’인 50대(55.9%)와 60대 이상(70.5%)는 국정화에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다. 국정교과서 국면 초반까지만 해도 비등하던 찬반 비율이 후반에는 반대 우위로 흘러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60대 이상의 국가주의적 신념은 새누리당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표밭’이기도 하다.
14일 정치권의 한 노정객은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현재 새누리당의 강고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박정희 정신’을 내면화한 사람들이다. ‘박정희 정신’이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즉, 박정희 정권을 뿌리로, 그의 철학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주 지지층으로 삼는 새누리당으로서는 박정희 정권이 지녔던 논리 구조를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젊은 층의 표를 가져오는데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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